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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커 Dec 23. 2023

묘비명

이름을 찾아서 #17 Walker X Morris

  우리는 수풀을 헤치며 길을 찾듯 이름과 이름 사이를 지나쳐 걸어왔다. 쉽게 써 내려간 이름들이었다. 무라사키 시키부, 크리스틴 드 피장, 난설헌 허경번, 마리 마들렌, 울스턴크래프트, 제인 오스틴, 브론테들, 조지 엘리엇, 에밀리 디킨슨, 버지니아 울프, 박경리, 애거서 크리스티, 실비라 플라스, 토니 모리슨의 이름이 한 자리에 놓였다.


  어떤 기준에서 보아도 무질서의 에너지를 실감하게 하는 명부(名簿)다. 노벨상을 받은 작가부터 기록적으로 잘 팔린 작가, 살아서는 자그마한 영광도 누릴 수 없었던 작가의 이름이 한 통에 담겼으니 「명성」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무라사키 시키부, 난설헌, 박경리의 이름이 함께 하지만, 여전히 영미 문화권 출신 작가의 점유도가 높다. 세계 문학사에 족적을 남긴 이름들이라고 부르기에는 여전히 갑갑한 명부다. 아프리카에도, 이슬람 국가들에도, 남미에도, 동남아시아에도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아니 발견하고자 하는 의욕의 빈곤 탓에 아직 부르지 못한 이름들이 많다.


Wey (1882-83) William Morris(English, 1834 – 1896)


  울스턴크래프트와 애거서 크리스티의 이름을 한 통 안에 담은 것은 어떤가. 혁명가와, 질서를 애호하는 보수적 세계관의 인물이 친구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긴 하다. 긴즈버그와 스캘리아의 평생을 건 우정을 생각해 본다면, 그저 한 권의 미미한 책 안에 두 사람의 이름을 나란히 둔 것이 각별한 일은 아닐 것이다. 문학의 관점에서라면, 에밀리와 샬럿 브론테를 함께 두는 것이 오히려 어색한 것일지 모른다.


  명부만의 문제도 아니다. 이 제멋대로인 명부 앞에서마저 여러 번 서성여야 했다. 이름의 숲을 헤매며 걸음을 뒤척였다. 떠나고 싶지 않은 이름, 몇 개의 장을 늘려서라도 해야 할 말을 담고 싶은 이름들은 차마 지나치기 어려웠다. 애초, 「모음집(Compilation)」이 수박 겉핥기가 되지 않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한 사람의 인생, 한 작가의 세계관, 한 작품에 관한 생각을 단지 몇 장의 말무리 안에 담을 수 있다는 믿음은 버리는 것이 좋다. 누군가의 작품에 말을 얹는다는 것은 대체로 눈을 가린 채 코끼리를 만지는 것 이상이 되기 어렵지만, 한 사람의 인생과 작품에 관한 통찰은 좁고 깊게 파고드는 함축적인 언어의 힘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모험임이 틀림없다. 형식에 얽매일 이유가 없는 자유로운 프로젝트임에도 「분량의 정의(正義)」라는 관성을 못 버린 결과로 한 개의 장(章) 안에 가둘 수밖에 없었음을 밝혀둔다.    


Acanthus (1879-1881) William Morris (English, 1834 – 1896)

 

 문학. 아직 화해하지 못한     


  나는 문학과 화해하지 못했다. 다툰 사실은 없지만, ‘문학’이라는 말을 쉽게 뱉지 않는다. 등한시한다. 오래 만났지만 어딘지 대면한 느낌이 드는 ‘아는 사람’ 같은 느낌이기도 하다. 프로젝트의 제목에 「문학편」이라는 통 큰 사족을 붙인 것은 그나마 저 이름들에 대한 애정을 오랫동안 거둘 수 없었던 덕분이다. ‘문학’ 속으로 파고들 생각 같은 것은 없었음에도 난설헌과 박경리, 버지니아 울프를 이야기하기 위한 일종의 스스로에 대한 강제 조치 같은 것이다. 물론, 미술과 음악, 영화, 철학과 같은 다른 영역을 다룬 에디션을 가져오겠다는 여지를 두기 위한 것도 있다. 아직은 아무것도 결정한 바 없으므로 그저 여지일 뿐이다. 어쩌면 문학만으로 또 다른 에디션을 더할지도 모른다.


  문학과 나의 이상한 거리 두기는 현실의 문학 씬이 보여주는 기막힌 반전들, 오랜 관행이라 불리는 것들과 조금은 관련되어 있기도 하다.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문학을 이끌어가야 할 문학판이 오히려 온갖 불합리와 부조리에 둘러싸인 채 거짓 권력에 휘둘리는 모습을 목격하는 것이 유쾌할 리 없다. ‘불합리한 것’이야말로 ‘현실’을 설명하는 적절한 술어임을 자주 망각하는 자의 최후일지 모른다. 「예술과 예술가를 분리해서 볼 수 있는가」 같은 이제는 물릴 법한 오래된 질문을 다시 꺼내는 것은 잠시 접어두자.


Honeysuckle (1874) William Morris (English, 1834 – 1896)


  문학에 관해 적어도 한 가지 공감한 이야기가 있다. 다른 예술 장르들과 달리 ‘문학’만은 그 이름 안에 배울 학(學)이라는 글자를 붙인 채로, ‘학문의 영역’에 걸쳐 있다는 이야기. 이것이, 문학을, 어떤 대상을 공부하듯이 메타적 시각을 유지한 채 기술적으로 접근해서 배워야 한다는 주장은 아닐 것이다. 특히, 문학 창작의 영역에서, 기술적인 방법론을 배운다고 그 결과물이 저절로 품격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보다는 그 수행(修行)의 방식이 다른 어떤 장르보다 학문의 방법론을 닮아있기에 ‘문학’이라 불린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매일 자료를 읽고, 정보를 수집하고, 때로는 취재하고, 하나의 아이디어 위에 글을 붙여가는 거의 동시에 전체의 틀을 쌓아가는 행위, 쓴 것을 수없이 절차탁마하는 행위는 온전히 학문의 길을 닮아있다. 우리는 애거서 크리스티가 범죄의 심리적인 구조를 그려내는 천재적인 통찰력만으로 놀라운 성취를 거둔 작가가 아닌 것을 앞서 다루었다. 거의 학자와도 같은, 매일의 성실성이 없었다면 번뜩이는 통찰 역시 없었을 것이다. 그가 셰익스피어가 그려낸 인물들의 숨은 심리를 작품 안에 풀어놓을 때마다 놀라곤 했다. 그 연구와 궁리의 깊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거의 일생의 시간을 들여 쉼 없이 이어간 수행이 없이는 도달할 수 없는 깊이다.


A dream of John Ball and A king’s lesson William Morris (English, 1834 – 1896)


  죽은 자들에게서 발견한 오늘     


  아직은 흉내내기의 트위스팅 정도에 이른 버전이라고는 하지만, AI가 스스로 창작하는 시대에, 오래된 이름의 숲을 헤쳐 고작 몇몇 묘비명을 불러온 이유는 무엇인가. 이끼로 둘러싸인 묘비명이 오늘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들은 순환 오류에 가까울지 모른다. 죽은 자들이 남긴 문헌들이야말로, 그 문헌들 속 당대의 삶, 당대의 문명, 당대의 기술, 당대의 언어야말로 오늘의 삶, 오늘의 문명, 오늘의 기술, 오늘의 언어를 낳은 거대한 프레임웍, 거대한 모체의 일부임을 생각해 본다면 무의미한 질문이다.


  저, 어지러워 보이는 명부를 들여다본 누군가는 분명 발견해 낼 것이다. 그들이 여성이고, 그들이 죽은 자들이며, 적어도 문학적 성취를 이룬 자들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는 것뿐 아니라, 서로 붙여 놓았을 때 비로소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거대한 계선(契線, Lineage)」을 공유하고 있는 관계임을 발견해 낼 것이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거대한 계선. 단지 반복의 역사가 아니다. 더디지만, 수도 없는 개인의 희생이 있었지만, 조금씩이나마 앞으로 걸어 나간 흔적을 이은 계선이다. 그리고 현실의 문학판이 어떤 모습이든 여전히 그 선을 이어가는 이들이 있다. 믿기 힘든 기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뜻밖에도 ‘이름을 찾아서’라는 밋밋한 제목이 평면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한 프로젝트가 되었다.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밝히지 못한 이들, 다른 성별의 이름을 사용해야만 했던 이들, 스스로 불리고자 한 이름을 밝혔으나 오랫동안 오해받아온 이들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었다. 시인의 말처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그제야 '오늘의 존재'가 되었다. 피, 땀, 눈물을 흘리는 오늘의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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