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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현 Jul 29. 2022

운명을 배신하는 방법에 대하여

넬라 라슨, <패싱: 백인 행세하기>

Unsplash, @Samuel Branch
바로 그게, 그 사람들이 오늘의 나를 만든 거야. 내가 도망가기로 결심했거든. 동정의 대상도 골칫거리도 아니라 심지어 불량한 함의 딸도 아니라, 그냥 한 사람으로 살려고 말이야. 그리고 난 정말 많은 것들을 욕심냈어. 내 외모가 나쁘지 않고, 충분히 백인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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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넌 모를 거야. 내가 남쪽 지역을 방문할 때마다 얼마나 너희들을 증오했는지. 너희는 내가 원했지만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것들을 다 가지고 있었어. 그래서 나는 너희들이 가진 것과 그 이상을 손에 넣기로 결심했지. 내가 느꼈던 것을 너 이해하겠니, 이해할 수 있니?

*함은 아버지 노아에게 불경한 죄로 인해 그의 자식들이 그 사촌들의 노예가 되는 벌을 받았다. 미국의 노예 제도 지지자들은 이 성경의 설명을 아프리카인들에게 적용하여 노예 제도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삼았다.



#운명 #배신 #인종


 두 명의 여자가 있다. 두 가지 삶이 있다. 그리고 갈라진, 두 개의 운명이 있었다. 넬라 라슨의 문제작 <패싱>은 흑인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혐오, 그리고 억압된 운명에 대해 드러내며 문학사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넬라 라슨은 1920년대 할렘 르네상스를 주도했으며 특유의 도발적인 문체와 겹겹이 쌓인 이야기로 독자들을 매혹시킨다. 특히 그녀는 <패싱>에서 흑인들의 삶과 문화를 그저 동정의 대상으로 한정하지 않고, '삶을 걸어서라도 얻고 싶은 무언가'로 설정함으로써 독자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근본적으로 이 이야기는 '배신'에 대한 것이다. 첫째는 누군가에 대한 배신이다. 클레어는, 자신을 믿어주었고 흑인 사회로 돌아오려는 욕망을 받아준 아이린을 배신했다. 아이린의 눈을 피해 그녀의 남편인 브라이언을 '꼬여낸' 것이다. 물론, 이는 아이린의 시선에서 포착된 불확실한 사건이며 그녀의 표현이다. 그러나 클레어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하고, 누구든지 상처 입히고, 어떤 것도 던져버릴 수 있는' 위험한 사람임을 아이린에게 알림에 따라, 이 꼬임은 사실로 암시된다. 그럼에도 클레어는 부계로부터 내던져진 현존재(現存在)의 운명과 특유의 성정을 변명으로 삼아 스스로를 보호한다.


 둘째는 운명에 대한 배신이다. 클레어는 백인 행세를 하고 자신의 삶을 위장함으로써 '흑인'이라는 운명을 배신했다. 비록 그녀가 살아있는 삶을 열망하며 흑인 사회로 돌아오기를 자처했지만, 그토록 처절하고 철저했던 배신의 과정에 흑인을 향한 존중과 애정은 없었다. 이 것이 바로 아이린과 가장 대비되는 지점이다. 아이린은 흑인을 경멸하는, 클레어의 남편 벨루에게 사건의 전말을 다 말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침묵에 무릎 꿇은 것은 인종에 대한 본질적 소속감과 그에 대한 순응 때문이다. 비록 클레어가 자신의 안온한 삶을 위협하는 배신자일 지라도, 그녀는 침묵을 택했다. 아니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클레어를 처벌하는 일을 넘어 클레어와 자신이 속한 인종을 배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종에 대한 본능적인 충성심, 어째서 그녀는 거기서 벗어나지 못할까? 왜 거기에 클레어가 포함되어야 하는가? 클레어는 그녀나 그녀가 속한 인종을 배려하지 않는데 말이다. 아이린은 억울하다기보다 막막한 절망을 느꼈다. 그녀는 이 점에서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사람들을 인종으로부터 분리해 생각할 수 없었고, 그녀 자신을 클레어 켄드리에서 떼어낼 수 없었다.
처음으로 그녀는 흑인이라는 짐이 너무 무거워 고통스러웠고 반항심이 들었다. 인종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녀는 여자로서, 그리고 다른 개인적인 일들로 고통받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소리 없이 부르짖었다. 잔인하고 부당한 일이었다. 정말이지 검은 피부를 지니고 태어난 흑인들만큼 저주받은 존재는 없었다.


 논점은 ‘클레어의 배신은 용인될 수 있을까’라는 것이다. 욕망하는 바를 끝내 얻어내는 그녀의 성정과 능력은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되기도 하나,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두 갈래의 판단 근거는 사람의 삶을 관찰하는 것을 넘어 개인의 ‘삶의 방향과 철학’의 문제로 비화할 수 있다. 따라서 독자들의 인상을 반추하기 위해 이 지점이 명확히 짚어져야 할 것이다.


 우선, 흑인이라는 운명에 대해 아이린과 클레어가 받아들인 바는 상이했다. 아이린은 이를 운명의 실처럼 벗어날 수 없는 굴레로 보았으며, 자신과 같은 인종으로 이어진 모든 이들을 짊어져야 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반면 클레어는 실을 풀어헤치듯 인종이라는 운명을 장난스럽게 농락했다. 자존(自尊)과 삶을 담보로 내놓아 백인과 흑인의 소속을 번갈아 얻었기 때문이다.


 물론 흑인을 향한 세간의 혐오와 천대는 평생에 걸쳐 벗어나야 하는 그물과 같다. 이렇듯 불리한 조건은 둘 모두에게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클레어는 이를 벗어나고자 했고, 아이린도 가끔씩 '패싱'을 이용해 삶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낮추었던 것이다. 그녀가 남편과 싸워가며 아이들에게 '흑인이 처한 현실'에 대해 일찍이 교육하지 않았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아이들에게 세상의 밝은 면을 더 오래 보여주고 싶었을 테니.


 그러나 비극은 결국 그녀들이 패싱을 행했다는 이유 때문에 시작된다. 아이린은 아이들의 장난감을 쇼핑하다가 지쳐 백인들만 이용할 수 있는 호텔에 잠시 머물렀고, 그곳에서 클레어와 재회했다. 남편의 외도와 친구의 죽음이라는 비극의 시초가 패싱이라는 것은 너무나 가혹하다. 클레어의 입장에서 보면 이 비극의 원인은 더욱 명확하다. 감히 백인을 탐했고, 바꾼 운명을 다시 뒤엎고자 한 결과로 죽음을 맞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판도라와 같은 신의 농담을 이기지 못한다. 흑인은 힘없는 인간이며, 함의 딸이다. 반면 백인은 신과 같은 지위를 갖는다.


 그렇다고 클레어의 배신이 흑인의 비극적 운명을 근거로 용인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흑인을 배신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아이린을 배신했다. 그녀에게는 운명조차 수단이며 주위에서 숨 쉬는 모든 것들이, '진짜'인 자신의 삶을 위해 존재하는 모조품 인양 이용하고 버린다. 심지어 자신을 향한 아이린의 연민과, 그녀가 끊어내지 못하는 흑인의 속박마저 이용한다. 불가항력에 빠진 아이린은, 이미 피맛을 본 클레어에게 살마저 쉽게 내어주고 만다. 그리고 종국에는 그녀의 죽음마저 직접 책임지려 할 것이다.


 비극의 무게와 모양은 각기 다른 법이다. 클레어는 종국에 흑인이 되어 죽었으므로, 인종이라는 삶의 굴레를 벗어던진 것이라 볼 수 있다. 클레어가 회귀를 열망했던 흑인의 문화는, 살아있는 열정과 삶에 대한 열망을 간직한 탐나는 무엇이었다. 이미 삶을 걸었던 그녀에게, 비로소 다시 흑인이 되어 죽는 결말은 그리 비극이 아닐지도 모른다. 적어도 아이린에 비하면 말이다.


 클레어의 죽음이 감춘 진실이 무엇이든, 아이린은 클레어에게 느낀 직관적인 불안감으로부터  시도 멀어지지 못했다. 클레어에게 붙잡힌 그녀는 내내 불안해했으며, 그녀가 토해낸 위화감과 기시감은 마침내 정확히 들어맞았다. 비교할  없이 아이린의 비극이  무겁고 복잡하다. 클레어로 인해 그녀는 안락한 삶에 대한 욕망과, 자신이 속한 인종에 대한 충절을 끝없이 시험받아야 했다. 운명의 장난이다. 나는 아이린의 비극에 대한 증인이 되기로 했고, 이에 따라 클레어는 용서받을  없게 된다.


 도발적인 문체와 겹겹이 쌓인 이야기는 모호한 결말로 매듭지어진다. 끝내 작가는 클레어처럼 속을 다 내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녀의 소설은 오랫동안 핍박당한 아름답고 고귀한 인종에 바치는 헌사이자, 한 사람의 욕망과 또 한 사람의 비극을 다룬 아름다운 이야기로서 손색이 없다. 위대한 문학은 늘 책장을 쉽게 덮지 못하게 만든다.



- 넬라 라슨, <패싱>, 민음사(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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