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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현 Dec 06. 2021

쾌락에 대한 오해와 진실

민규동, <간신>

간신 (2015)

#쾌락 #고통 #철학


 영화 <간신>은 연산군 융의 폭정과 성 도착증에 대해 그린다. 이는 군주시대의 왕이라는 절대적 권력과 인간의 본능적 쾌락, 그리고 어머니를 잃은 가정사가 얽힌 서사로 전개된다. 이러한 연산군의 폭정은 관객들이 일부 공감할 수 있는 맥락을 제시한다.


 공감의 맥락은, 첫째로 상상이다. 욕망하는 무엇이든 다 현실화할 수 있는 신분적 지위를 가졌다면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이때 쾌락은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인간의 욕망으로서 이해되기 때문에 상당한 자유를 갖는다. 법적으로나 규범적으로 인식되기 이전의 것들, 그러니까 자연 상태의 인간을 정의하는 데 있어 쾌락과 무질서 그리고 욕망 같은 것들은 기본값으로 이해되기 마련이다. 규범이 없거나 당신이 규범을 초월한 존재라면 당신의 쾌락은 자유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연산군의 쾌락추구는 일부 이해될 수 있다. 그가 규범 위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정신적 고통이다. 자기 연민을 가진 인간의 감정이 이에 기여한다. 타인의 죽음보다 자신의 상처가 더 아프게 느껴지는 것이 인간이다. 어머니의 죽음에 관련한 비밀은 연산군의 불온전한 정신에 영향을 미친다. 모성에 대한 경험이 부재한 어린 시절의 연산군은 연약했고 그의 연약함이 관객들에게 동기를 제공한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누군가는 그를 동정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를 동정하기를 독려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이것이 옳을까.


 실제로 연산군의 삶을 재현하고 해석하는 후대의 시각은 매우 관대한 것처럼 보인다. 그를 미치광이처럼 묘사하다가도 한 편으로는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서사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서구 철학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쾌락에 대한 대중의 전반적인 이해가 뒤바뀐 측면도 있다. 예컨대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는 쾌락이 개인적인 것이며,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삶의 존재 이유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오도한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욕망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을 쾌락으로 본 것이 아니라 고통을 없애는 것을 쾌락으로 인지했다. 또한 궁극적으로는 정신적 평정을 추구하는 것이 그가 말한 쾌락추구 방식이다. 그러나 <간신>이 묘사한 연산군의 쾌락 추구 방식은 어떠했는가. 정신적 평정을 원한 것은 맞으나, 이를 위해 타인의 고통을 제물로 삼았다. 자신의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것을 즐김으로써 욕망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연산군의 쾌락추구는 에피쿠로스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쾌락에 관한 인류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불의 발견을 살필 수 있을 것이다. 불을 사용할 수 없었던 시절 느꼈을 추위와 배고픔은 인류에게 크나큰 고통이었을 것이고, 이를 해결하는 것이 고통의 제거에 해당하는 일일 것이다. 인간은 우연의 결과이든 어떻든 불 피우는 방법을 터득하였고 이는 추위와 배고픔이라는 고통의 제거에 기여했다. 이것이 에피쿠로스가 말한 쾌락이다.


 즉 고통을 제거함으로써 사회 공동체의 쾌락을 증진한 것이다. 바람직한 쾌락이란 이와 같다. 물론 개인적이고 소소한 쾌락들도 얼마든지 존중받아 마땅하지만, 연산군과 같이 쾌락의 영향력을 고려해야 하는 주체라면 사회적으로 존중받는 범위에서 쾌락 추구가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더불어 공동체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끈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연산군은 ‘운평’이라는 이름으로 만 명에 가까운 여성들을 징집한 뒤 자신의 쾌락을 위해 교육시켰다. 여성들은 나이와 기혼 여부와 관계없이 징집되었다. 당연히 많은 이들이 누이와 딸, 아내를 잃었다. 그리고 나라가 연회와 잔치에 골몰함에 따라 백성들의 가난은 더욱 극심해졌다. 공동체는 그로 인해 잠식되어갔다.


 물론, 연산군 개인의 측면만을 고려해도 평가는 달라질 수 없다. 그는 끝내 망령에 시달리다가 반정에 의해 죽음을 맞는다. 그의 쾌락추구는 자신의 성도착증과 정신 착란 증세를 더 심화할 뿐이었다. 쾌락은 방종이나 파괴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지했듯,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 혼란한 사회를 떠나 은둔 생활 속에서 수양을 자처했던 에피쿠로스는 작은 공동체 속의 우정을 중요시했다고 한다. 그가 우정을 나눈 장소 ‘더 가든’에는 노예와 여자, 그리고 매춘부까지도 드나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특수성으로 인해 더 가든은 욕망에 얽힌 육체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곳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가 추구한 쾌락의 실상은 인간애에 가깝다. “빵과 물이 있다면 신도 부럽지 않다”는 그의 말처럼 쾌락은 관계 속에서 최소한으로 추구될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필수적이지 않은 쾌락은 공허한 욕망일 뿐이다. 결국 수세기 동안 오해로 점철된 쾌락의 진실은 쾌락의 추구 방식이 조화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연산군의 쾌락 추구는 어떠한 이유로든 존중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산군을 위한 변명을 준비하는 이들에게는 니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니체는 고통에 대해 “나를 죽이지 못한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에피쿠로스가 쾌락 추구를 통해 고통을 제거하고자 했다면, 니체는 고통 그 자체를 긍정했다는 점에서 한 차원 더 높은 경지의 철학을 논한다고 할 수 있다. 니체에게 고통은 주권을 앗아갈 만한 실체가 아닐뿐더러 더 높은 존재로 나아가는 사고의 과정을 선사하는 것이다. “고통이야말로 정신의 최후의 해방자”라는 말은 결코 실언이 아니다.


 이를 연산군에게 적용하자면, 그의 폭정에 대한 변명으로 모친의 사망을 드는 것은 어리석다. 그는 고통을 떠안지 못하고 표출하기 바빴으며 영원히 그를 좀먹게 할 쾌락에 갇히고 말았다. 과연 모친의 사망이 그에게 실체적 고통이었을지도 의문이다. 오히려 그가 고통을 키웠으며 자신의 상태를 설명할 마땅한 이유로 이를 선택한 것은 아닐까. 어쨌든 연산군의 죽음과 함께 쾌락에 대한 신화는 미신으로 남아야 한다. 상처뿐인 쾌락은 인간을 해방시킬 수 없다.



- 민규동, <간신>(2015

- 프리드리히 니체, <화려한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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