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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현 Dec 10. 2021

당신에게 건네는, ‘본능’의 충고

이안, <Life Of Pi>

Life of Pi (2012)

#이성 #본능 #공존


 영화를 두고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다. 문외한이었던 어린 나조차도 엔딩 크레딧이 오를 때쯤 형언할 수 없는 벅찬 감동이 느껴졌으니. 그래서 이 완벽한 영화에 남은 아쉬움은 영화관에서 보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여전히 영화를 한 마디로 정의 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벵갈 호랑이 리처드 파커의 존재를 두고 여러 가지 해석이 오간다. 그중에서 내 마음을 가장 크게 끌었던 것은 그 호랑이가 소년의 본성이고 소년 자신은 이성이라는 해석이다. 해석에 의하면 상황을 인지하고 대비하는 쪽은 이성을 갖춘 소년이지만, 정작 발생한 문제를 동물적인 감각으로 해결하는 것은 본능 그 자체인 호랑이다.



 아름다운 맹수의 표본과도 같은 이 호랑이는 삶과 죽음이 결정될 매 순간마다 무시무시한 집중력을 보여준다. 그는 어떠한 망설임도 허용하지 않는다. 소년이라면 수백 번 넘게 주저했을 결정들을 그는 단순에 해치운다. 호랑이는 겁먹은 소년이 내세운 또 다른 ‘완벽한’ 자아이다. 이 자아가, 어머니를 죽인 주방장을 죽였고 그를 미끼로 물고기들을 사냥함으로써 삶을 연명하게 했다. 결국 소년을 살게 한 것은 본능이다.


 그렇다면 소년의 삶에서 이성은 어떠한 의미를 가졌던 걸까. 동물원에서 자라난 인도 소년은 어릴 적부터 참 특이했다. 특히 종교를 해석하는 일에 그랬다. 이슬람과 힌두교, 그리고 기독교를 동시에 믿었으며 각기 종교의 신들로부터 평안과 깨달음을 얻는다. 망망대해에서 펼쳐진 생존싸움에서 그가 찾은 신은 누구였을까. 잘 모르겠다. 다만 그의 의식 속에서 신들은 상호 조화를 이루며 서로를 소개하는 존재다.


 예컨대 소년은 예수를 알게 된 일에 대해 비슈누 신께 감사를 드린다. 신들을 객관적이고 맹목적인 이해의 대상으로 남긴 것이 아닌 대화의 상대로서, 주체성을 가진 인격체로서 인식한 것이다. 물론 예수도 한 때 인간이었으니 소년의 인식에 전혀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니다. 어쨌든 소년은 예수의 사랑을, 비슈누의 배려를 느끼며 자랐다.


 동물 형태관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코뿔소를 큰 것과 작은 것, 털이 부드러운 것과 뻣뻣한 것으로 구분할 순 없을까? 돌고래에게는 돌고래처럼 생긴 것이 간단하지 않을까? 답은 앞에서 한 얘기 속에 있다고 믿는다. 그 미친 짓이, 이상하지만 구원받는 길이자 삶을 이끌어가는 수단인 것을.


 소년에게 이성은  다른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동물에 대한 그의 사고가 이를  보여준다. 그는 동물 형태관을 거부한다. 동물을 종으로서 구분하는 것이 아닌, 각각의 개체의 특성에 따라 분류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에게 동물들은 유희를 위한 도구적 수단이 아니었다. 오히려 동물들과의 교감을 통해 구원에 이를 수도 있다고 보았다. 동물에 대한 그의 친밀한 태도는 아버지의 화를 불러, 리처드 파커의 먹이 사냥 장면을 관찰하게 만들었다. 아버지는  시연을 통해 아들에게 파커와 친구가   없음을 분명히 일러둔다.


 신에 대한 깊고도 넓은 이해, 그리고 동물에 대한 가치관은 소년의 이성이 가진 특징이다. 그에게는 이성의 합리성이 존재하되, 통념에 매몰되지 않는 날 것의 철학이 갖춰져 있다. 그의 이성은, 단 둘만이 남겨진 망망대해에서 호랑이를 조련시키는 데 성공한다. 소년은 호랑이의 필요를 무기로 그를 휘두르며 그가 자긴의 반경에 다가오지 못하게 만든다. 소년의 본능은 그렇게 숨고 만다.


 그러나 하이에나를 공격하고 날치들을 사냥하고, 무엇보다 식인 섬으로부터 탈출구를 만들어준 것은 리처드 파커, 소년의 본능이다. 대자연의 폭풍우 앞에서는 둘은 모두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며 화해했지만, 자연적 상황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보인 쪽은 호랑이이다. 그렇기에 무수한 날을 먹고 마실 것도 없이 보낸 날의 끝에 먼저 일어설 수 있었던 이도, 단연 호랑이었던 것이다.


 내가 흐느낀 것은 리처드 파커가 아무 인사도 없이 날 버리고 떠났기 때문이었다. 서투른 작별을 하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나는 일의 순서에 맞추어 형식을 차려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가능하다면, 일에 의미 깊은 모양새를 입혀야 한다. 예컨대 당신이 내 뒤죽박죽 이야기를 100장으로 구성할 수 있을까? 한 장이 모자라지도 남지도 않게 딱 100장으로?


  그러나 멕시코 해안의 연안에 다다라서, 소년과 함께 생사를 같이 한 호랑이 리처드 파커는 뒤도 안 돌아보고 그를 떠난다. 모든 감정들이 극도로 억제된 이별은 무엇을 암시하는 것일까. 본능의 조련자를 자처했던 이성의 역할은 허상이었나. 소년은 일어설 힘도 없었지만 호랑이와 인사를 나누길 원했다. 뜨거운 생의 기억은 늘 마찬가지로 뜨거운 작별을 필요로 했다.


 이 작별이 본능과 이성의 타협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지막 작별을 불가하게 만든 것은 본능이 저질렀던 일들을 무마하기 원했던 이성의, 무의식의 발로였을 것이다. 살육으로 점철된 생존의 경험은 현실을 살아갈 소년의 의식에 해로우니 말이다.


 물론 이는 그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기 원했던 소년의 본능적 의지에 위배된다. 결국 이토록 불완전한 이별은 극한의 위험이 배제된 안전한 삶에서는 본능이 설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아마 소년은 그가 살아갈 삶에서 다시는 그 호랑이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본능이 파이라는 사람의 존재 본질일 지라도, 이를 마주하는 것은 너무도 많은 희생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성과 본능이 함께할 수 있었던 곳은, 아무도 없는 망망대해 위에 표류한 배 한 척의 공간이 유일하다. 소년과 우리가 살아갈 안온한 삶은 본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물론 예외는 있을 것이다. 당신의 본능을 확인하고 싶거나, 그 소년처럼 삶에서 잠깐 스쳐갔던 본능을 다시 보고자 하는 이들 말이다. 그도 아니면 그 둘이 공존하는 삶을 사는 이들이 있을지도. 어쨌든 소년의 생존기는 삶에 대해 여러 의문을 남긴다. 그래서 묻는다. 당신의 본능은 삶을 향해 기울어 있는가.



- 이안, <Life of Pi>(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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