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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현 Feb 08. 2022

소설이 허락한 유일한 폭력, 비극

이동하, <장난감 도시>

@monohont, Unsplash
어머니의 죽음은 내 작은 우주의 붕괴였다. 우리 삶이 지닌 근원적인 비극에 대해 눈을 뜬 것도 바로 그 죽음을 통해서였고, 아직도 코흘리개 중학생의 마음속에 인생의 보다 깊은 곳을 지나온 듯한 느낌을 준 것도 바로 그 죽음이었던 것이다.
-이동하, <나에게 소설은 무엇인가>


#비극 #소설 #죽음


 전쟁으로 인한 가난과 삶의 붕괴는, 6·25 전쟁 이후로 망국을 향해 치닫는 나라의 죄 없는 국민들이 떠안았던 현실적 고통이다. 누구도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을 알지 못했다. 허우적댈수록 깊이 빠져드는 늪처럼, 우리는 절망에 잠식돼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른들을 살게 하는 희망은 자라날 아이들의 존재에 있었다. 그들은 이 아이들이 무너져 가는 나라를 재건하고, 오늘의 가난과 비애를 역전시켜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이 힘겨운 생애를 버텼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은 아이들이 눈앞의 비극을 알지 못하게 함으로써 이어질 수 있다. 아이들이 눈앞의 비극을 실존적으로 자각한 순간, 모든 희망은 사라진다. 연약한 이들도 이 절망에 잠식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나약하다. 그러나 인간은 현실을 받아들이며 ‘성장’하는 존재이고, 동시에 환경에 적응해나가는 적응의 동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성장과 적응이 언제나 아름다울 수는 없는 법이다. 이 사실이 소설을 읽는 우리를 괴롭게 한다. ‘나’의 가족들은 절망에 잠식된 지 이미 오래였으며 이내 절망과 중첩된 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누나는 몸을 팔아 가족들을 먹였고, 반복된 실패는 모두가 희망을 사치품처럼 여기게 만들었다. 심지어 어머니의 뱃속에 있는 아이는 산모의 육체를 갉아먹는 ‘썩은 사과’로 묘사된다.


 비극이 덮친 삶은 ‘나’를 예외로 두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의 죽음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자각한다. 이는 마치 싱클레어가 가족의 따스한 품으로부터 벗어났던 순간이나, ‘인생은 아름답지 않다’는 게임의 법칙을 알아버린 조수아의 자각과도 같다. 그러나 ‘나’에게는 구원자 데미안도 포로수용소에서 나를 지켜줄 아버지도 없다. ‘장난감 도시’에 존재하는 게임의 법칙은 “울고 싶을 때 울고, 웃고 싶을 때 웃어서는 도시의 삶을 영위해나갈 수 없다"라는 것이다. 그렇게 아이는 감정을 반납한다. 생을 선물해 준 이의 죽음 앞에서도 울지 못하고, 비극의 파편들을 더듬어가며 아이는 삶을 삼키는 법을 배운다.


 이동진 평론가는 ‘캐릭터를 학대해서 가장 최악의 상황에만 가도록 이끄는 영화가 좋은 평가를 받아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아이를 꼬집어서 이끌어 낸 눈물이 감동이 될 수 없듯이 말이다. 그러나 영상의 문법이 아닌, 아이의 시선으로 쓰인 글은 비로소 나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아이에게 펼쳐진 비극은 누군가의 작위가 개입되지 않았다. 마치 겨울밤의 어둠처럼 순식간에 내게 다가온 것이었다. 밤을 누가 만들었는지 묻지 않듯, 나는 자연스럽게 이 비극을 받아들였다.


 물론 희극보다는 비극이 더 쉬운 법이다. 더 많은 이들을 이야기에 동화시키는 데는 말이다. 그러나 이토록 섬세한 언어로 전개된 비극에 나는 모든 것을 잊고 다시 빠져든다. 언제든 이 세계를 멈출 수 있는 ‘독자’의 권위는 잊은 채 말이다. 책장을 넘기는 손끝이 시리도록 아프지만, 나는 몇 번이고 이야기 속을 걸어 들어간다. 그리고 이 비극에 참전한다.


 다시 나의 현실로 돌아와, <장난감 도시>의 비극은 소설이기에 정당화될 수 있다. 소설의 울타리 안에 이 비극을 가두어야 역설적이게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현실을 사는 누구도 이러한 기억을 오래 간직해서는 안 된다. 어쨌든 살아야 하니까.



- 이동하, <장난감도시>, 문학과지성사(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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