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올드보이>
모래알이든 바윗덩어리든, 물에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다.
우선, 기분 나쁘도록 완벽한 영화였다. 영화 곳곳에 새겨진 신화나 성경 모티프 때문에도 그러했지만, 내 의지와 관계없이 영화에 빨려 들어가고 있다는 느낌 때문에 그러했다. 박찬욱 감독이 천명했듯이 <올드보이>는 '어떤 이야기를 서서히 문을 열어간다기보다, 다짜고짜 어느 순간에 관객들을 툭 들어가게' 만든다. 감독이 의도한 대로 관객이 영화에 들어간 순간은 이렇다. 근친상간이라는 금기와 사랑이 함께 시작되는, 극적인 절망과 현실이 함께 너울거리는 그런 순간이다.
복수를 관조하는 영화
복수를 논한 많은 영화들이 있지만, 특히 복수 시리즈를 배출한 박찬욱 감독의 시선은 복수 그 자체보다 ‘복수를 이해하는 과정’에 있었다. 복수를 관조하는 것, 그리고 관조의 대상으로 복수를 선택한다는 것이 그 흔한 복수극과 올드보이를 분리하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복수를 위해 존재하는 수많은 인물들은 심연의 어둠을 걸어가다 괴물이 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어느새 익숙한 클리셰가 되었다. 그러나 올드보이는 이와도 결이 다르다. 복수라는 불분명한 목표보다, 왜 복수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더 분명한 목표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제 복수심이 하나의 내 성격이 돼버렸다’라는 대수의 말이 우리를 후자의 목표에 머물게 한다.
그래서 왜냐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잘못은 대수의 혀에 있다. 근친을 범한 우진과 수아의 관계를 목격하고 이를 주환에게 알린 것이 화근이 된 것이다. 걸레라는, 아이를 가졌다는 소문에 시달리던 수아는 상상임신에 이르렀고 결국 죽음을 택했다. 근친상간이 알려질까 두려워진 수아가 불러오는 배를 감당하지 못하고 삶을 끝낸 것이다.
이때 수아가 느낀 두려움은 온전히 혼자의 것이었을 테다. 우진은 어렸고 현실을 감당해야 하는 것은 여자인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고독과 외로움은 15년의 감금을 통해 대수에게 전해지게 된다. 좁은 방을 나와서도 끝나지 않는 고독, 대수는 끝도 실체도 알 수 없는 복수를 좇는다.
물론 그렇다고 우진의 복수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우진은 한 사람의 인생을 파멸에 이르게 함으로써 자신의 삶마저도 그저 복수를 위해 희생되는 것으로 만들었다. 그의 삶의 대부분의 욕망운 소년기에 대한 복수에 초점화되어 있다. 이는 삶에 존재할 무궁무진한 가능성들을 모두 제거한다.
외로움과 죽음으로 귀결되는 삶을 결코 그저 받아들일 수는 없다. 말 한마디의 실수는 두 사람을 파멸시켰고 종국에 자기 자신을 겨누었다. 그러나, ‘하나의 성격’이 되어버린 복수 그 자체는 왜 가라앉지 못했을까. ‘나를 기억해달라’는 수아의 말의 진의나, 미도의 존재가 당신들의 복수를 멈추게 하지는 못했던 걸까.
허구의 세계, 그러나
난 이 영화가 기분 나쁘도록 완벽해서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영화에 빠져들수록, 금기 혹은 사랑이라는 외줄 타기를 고집할수록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화는 강렬한 색채와 문양을 사용해 탈출구를 마련해 주었다. 이는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영화라는, 허구의 세계라는 일종의 암시이다. 그러나 이 허구의 세계에서 대수의 사랑이 낭만이 될 수 있는지, 그래서 영웅이 될 수 있는 것인지는 당신에게도 줄곧 의문으로 남을 것이다.
빨강이 상징하는 분노와 파멸, 그리고 빨강이 감싸 안은 보라의 상실은 이 세계의 진실을 말해준다. 복수와 상실이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있다는 것과 사랑은 홀로 설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대수가 피 흘리는 대부분의 장면과 그가 미도를 만나는 장면에는 늘 빨강과 보라가 포함관계로 존재한다. 복수를 향한 우진과 대수의 강렬한 욕망이 빨강으로 상징된다면 보라는 필연적으로 마주할 상실을 뜻한다.
미도를 만난 일식집이나 대수를 가둔 7.5층에는 붉은색 가구들로 꾸며져 있다. 반면 피를 닦는 손수건과 우진으로부터 온 상자가 모두 보라색이다. 욕망과 상실이 함께 하듯, 사랑은 상실을 이끌 것이다. 수아를 잃은 우진이 그러했고 모든 진실을 알게 된 대수가 그러할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며칠이 지나도 이를 다 소화할 수 없었다. 이토록 원초적이고 투박한 영화가, 한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강렬하게 사로잡을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마 금기와 사랑을 동일선상에 놓음으로써 ‘금기를 깨는 사랑이 고귀할 수 있는 것인지’를 고민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박찬욱 감독이 말했듯이, 나는 오대수를 신화적이고 낭만적인 ‘영웅’으로 간직해야 하는 것인지 끝없이 고민하게 될 것 같다. 영화의 발칙한 물음이 끝내 내 머리를 온통 헤집어 놓는다.
- 박찬욱, 올드보이(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