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를보다 May 01. 2023

2023.05.01.

빌린 책을 반납하러 도서관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나는 문득, 다리가 불편하신 이모를 위해 매주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던 그 애가 생각이 났다. 늘 그렇듯 갑작스레 떠오른 기억은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는 기어코 깊숙이 숨어있던 기억들까지 불러 모아 추억이라는 새끼줄을 엮어낸다.


도서관은 나에게 아주 애틋한 곳이다. 취업을 준비하던 시절, 그 어둡고 막막하던 시절에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던 곳이라 그런걸까? 개인적으로는 아주 어눌했던 시절이었음에도 가끔씩 그때의 기억이 그리워 종종 도서관을 찾곤 한다. 도서관 곳곳에서 그때 그 시절의 내가 조금씩 흘려놓은 소소한 행복들을 마주할 때마다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피어나기도 하고.


 정말 공부가 하기 싫은 날이면, 근처 카페에 들러서 아이스바닐라라떼를 사들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천근만근인 몸을 이끌고 집 밖을 나온 나에게 줄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보상이었다. 열람실에서 해가 가장 잘 비치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커피를 한 모금 쪽 빨아 마시면 그게 그리 좋았다. 살짝 열린 창문 틈새로 바람이 솔솔 들어오면 그 바람결에 스며든 계절의 냄새는 또 어떻구. 간지러운 바람이 머리카락, 뺨, 콧잔등을 차례로 건드리면 전혀 새로울 것 없는 나의 일상에도 불현듯 설렘이 들이닥치곤 했다.


밥 먹는 시간이 아까워 집에서 싸 온 어설픈 도시락은, 점심시간이 되면 가방에서 숙성이라도 된 듯 쿰쿰한 냄새를 풍겨댔지만 도서관 앞 벤치에 앉아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음악 삼아, 푸르른 녹음이 흔들흔들 추는 춤을 감상하며 까먹는 도시락은 나름의 운치 있는 한 끼였다.


집과 도서관을 오가는 길에 힘차게 내달렸던 자전거 위에서, 이어폰을 꽂고 흥얼대던 노래들과 나와 같은 목표를 향해 뚜벅뚜벅 걷던, 날 많이 닮았던 그 애의 목소리는 우렁찬 위로가 되었고. 그래서 나는 더 힘차게 페달을 밟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서로의 목표를 위해서, 안정적인 미래를 향해서. 언젠가 다정한 부부가 되어 여유로운 저녁시간을 함께 보내며 산책로 따위를 거닐고 있을 우리를 그리면서 말이다.


우리는 도서관에 매일같이 출근했지만 책을 빌려볼 여유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그 애는 종종 이모를 위해서 책을 몇 권씩 빌렸다. 어릴 적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하신 이모가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혼자 보내시기에 심심할 것 같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 애의 그런 무심한 듯하면서도 서글서글한 마음씨를 가장 좋아했지. 나중에 취직을 해서 이곳에 올 때에는 책을 왕창 빌려다가 서로의 머리맡에 쌓아두고, 하루종일 방구석에 틀어박혀 책만 실컷 읽으리라 다짐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봄. 시간은 미끄러지듯 흘러갔고. 서로가 원하던 목표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나도 그 애도 적당한 직장을 얻었다. 그리고 우리는 낯선 일상에 적응하기 바빠 점차 소원해지기 시작하다가 그냥 그렇게 각자의 길로 돌아섰다.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자연스럽게.


벌써 5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고 직장 내에서 한 사람의 몫쯤은 어엿하게 해내는 위치까지 오게 되었지만 여전히 막막하고 불안정한 삶을 위태롭게 살아가고 있는 나다. 인생이라는 것이 원래 그런가 보다.

대학만 가면, 취직만 하면 다 끝날 것이라 착각했던 것처럼. 앞으로의 인생에도 결혼, 출산, 육아, 그리고 또 나의 노후, 죽음. 뭐 이런 장벽들이 하나 둘 정신없이 쏟아지겠지.


문득 떠오른 그 애의 얼굴이 보고 싶어 졌다.

이제 거의 흐릿해져 희미해진 그 얼굴을 보며 묻고 싶다. 너 역시 이 험난한 인생이라는 여정을 잘 견뎌내고 있는지, 여전히 그 서글서글한 마음씨를 간직한 채 뚜벅뚜벅 씩씩하게 걸어 나가고 있는지. 나의 청춘을 고스란히 담은 그 얼굴이 뭉게뭉게 피어나는 그런 날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2023.04.29.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