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린 책을 반납하러 도서관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나는 문득, 다리가 불편하신 이모를 위해 매주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던 그 애가 생각이 났다. 늘 그렇듯 갑작스레 떠오른 기억은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는 기어코 깊숙이 숨어있던 기억들까지 불러 모아 추억이라는 새끼줄을 엮어낸다.
도서관은 나에게 아주 애틋한 곳이다. 취업을 준비하던 시절, 그 어둡고 막막하던 시절에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던 곳이라 그런걸까? 개인적으로는 아주 어눌했던 시절이었음에도 가끔씩 그때의 기억이 그리워 종종 도서관을 찾곤 한다. 도서관 곳곳에서 그때 그 시절의 내가 조금씩 흘려놓은 소소한 행복들을 마주할 때마다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피어나기도 하고.
정말 공부가 하기 싫은 날이면, 근처 카페에 들러서 아이스바닐라라떼를 사들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천근만근인 몸을 이끌고 집 밖을 나온 나에게 줄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보상이었다. 열람실에서 해가 가장 잘 비치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커피를 한 모금 쪽 빨아 마시면 그게 그리 좋았다. 살짝 열린 창문 틈새로 바람이 솔솔 들어오면 그 바람결에 스며든 계절의 냄새는 또 어떻구. 간지러운 바람이 머리카락, 뺨, 콧잔등을 차례로 건드리면 전혀 새로울 것 없는 나의 일상에도 불현듯 설렘이 들이닥치곤 했다.
밥 먹는 시간이 아까워 집에서 싸 온 어설픈 도시락은, 점심시간이 되면 가방에서 숙성이라도 된 듯 쿰쿰한 냄새를 풍겨댔지만 도서관 앞 벤치에 앉아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음악 삼아, 푸르른 녹음이 흔들흔들 추는 춤을 감상하며 까먹는 도시락은 나름의 운치 있는 한 끼였다.
집과 도서관을 오가는 길에 힘차게 내달렸던 자전거 위에서, 이어폰을 꽂고 흥얼대던 노래들과 나와 같은 목표를 향해 뚜벅뚜벅 걷던, 날 많이 닮았던 그 애의 목소리는 우렁찬 위로가 되었고. 그래서 나는 더 힘차게 페달을 밟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서로의 목표를 위해서, 안정적인 미래를 향해서. 언젠가 다정한 부부가 되어 여유로운 저녁시간을 함께 보내며 산책로 따위를 거닐고 있을 우리를 그리면서 말이다.
우리는 도서관에 매일같이 출근했지만 책을 빌려볼 여유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그 애는 종종 이모를 위해서 책을 몇 권씩 빌렸다. 어릴 적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하신 이모가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혼자 보내시기에 심심할 것 같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 애의 그런 무심한 듯하면서도 서글서글한 마음씨를 가장 좋아했지. 나중에 취직을 해서 이곳에 올 때에는 책을 왕창 빌려다가 서로의 머리맡에 쌓아두고, 하루종일 방구석에 틀어박혀 책만 실컷 읽으리라 다짐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봄. 시간은 미끄러지듯 흘러갔고. 서로가 원하던 목표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나도 그 애도 적당한 직장을 얻었다. 그리고 우리는 낯선 일상에 적응하기 바빠 점차 소원해지기 시작하다가 그냥 그렇게 각자의 길로 돌아섰다.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자연스럽게.
벌써 5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고 직장 내에서 한 사람의 몫쯤은 어엿하게 해내는 위치까지 오게 되었지만 여전히 막막하고 불안정한 삶을 위태롭게 살아가고 있는 나다. 인생이라는 것이 원래 그런가 보다.
대학만 가면, 취직만 하면 다 끝날 것이라 착각했던 것처럼. 앞으로의 인생에도 결혼, 출산, 육아, 그리고 또 나의 노후, 죽음. 뭐 이런 장벽들이 하나 둘 정신없이 쏟아지겠지.
문득 떠오른 그 애의 얼굴이 보고 싶어 졌다.
이제 거의 흐릿해져 희미해진 그 얼굴을 보며 묻고 싶다. 너 역시 이 험난한 인생이라는 여정을 잘 견뎌내고 있는지, 여전히 그 서글서글한 마음씨를 간직한 채 뚜벅뚜벅 씩씩하게 걸어 나가고 있는지. 나의 청춘을 고스란히 담은 그 얼굴이 뭉게뭉게 피어나는 그런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