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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서고요 Mar 15. 2023

낯익은 타인이 되어 경계 지키기

예의 바른 무관심

유리는 큰 눈으로 응시하며 말없이 말을 건다.


-유리 왔어? 안녕.

-4시 30분에 알려주세요.

작은 목소리. 느낌으로 알아챈다.


유리는 자신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 아이다.

늘 앉아 있는 자리. 그곳에 유리가 있으면 있는 것이다.

그런 유리가 내게 다가와 시간을 알려달라고 말했다.

나는 이름을 물어보았고 유리는 대답해 주었지만

목소리가 너무 작아 알아듣기 어려웠다.

-유리?

끄덕끄덕.



화장실에 다녀오니 유리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유리야. 4시 30분에 알려줄까?

고개를 가로저었다.


5시쯤 키가 큰 남자가 도서관에 들어왔다.

도서관을 한 바퀴 돌더니 유리 옆에 앉았다.

유리 아빠였다.


유리는 처음으로 책을 빌렸다.

도서관리 프로그램에 뜬 이름은 유리가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계속 유리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름의 마지막 글자만 따서 소리내어 부르면

유리라고 발음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유리에게 궁금한 게 많다.

그래도 물어보지 않고 말을 걸지 않는다.

4시 30분이 되면 유리 이름을 부르고 눈을 마주치고 시간을 알려준다.



예의 바른 무관심.



예의 바른 무관심(civil inattention)이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자기가 그를 보았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시인하면서) 그의 존재를 느끼고 있음을 나타내기에 충분한 시각적 신호를 보내고, 이어서 자신의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림으로써 자기가 그에게 별다른 호기심이나 의도를 품고 있지 않다는 점을 표현하는 것이다.
Erving Goffman, Behavoir in Public Places, New York:Free Press, 1969, p.84_<사람, 장소 환대> 김현경, 문학과 지성사, p.86


사서로 일을 하면서 자주 떠올리는 말이다.

나와 독서취향이 비슷한 분을 만나도,

자주 보는 이용자와 스몰토크를 하고 싶어도,

어떤 책을 볼까 고민하는 어린이에게 책 소개를 하고 싶어도 참는다.

도움을 요청하거나 대화를 하고 싶어 하는 이용자와는 경계를 지키며 말을 이어간다.


책을 읽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활동에 가깝다.

그런 시간을 누리러 온 분들의 시간을 지켜주고 싶다.

그건 어린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수영커뮤니티에서 누군가의 아는 척이 수영보다 더 힘들다는 글을 보았다.

몇 살이냐, 직업은 무엇이냐, 결혼은 했느냐, 아이는 있느냐.

개인적 호기심이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자연스럽지 않은 말 걸기는 오히려 어색한 관계를 만들기도 한다.


책모임을 같이 하는 11살 소정이도 그랬다.

나와 처음 만났을 때 눈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고 말할 때 목소리가 살짝 떨리기도 했다.


소정이가 나라는 사람을 천천히 관찰할 수 있도록 특별한 시간을 마련했다. 모임마다 그림책을 읽어주며 나의 취향, 목소리, 눈빛을 드러냈다.


적응하는데 긴 시간이 필요한 아이들에게는 예의 바른 무관심으로 그 시간을 존중해 준다.

소정이는 지금 누구보다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모임에 참여한다.


나도 그랬다.

유리와 소정이처럼 경계하고 낯설어했다.

사람이든 공간이든 대상이든 온전히 파악해야 마음을 열어주었다.

섬세하고 꼼꼼했지만 남들보다 느렸다.

내가 갈 때까지 기다려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일이 많았다.

아쉽게도 그런 일을 자주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그런 어른이 되려고 노력한다.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님을 매일 깨닫는다.   


오늘도 4시가 되면 유리는 그 자리에 앉아 책을 볼 것이다.

나 또한 내 자리에서 내 할 일을 할 것이다.

낯익은 타인이 되어 경계를 지켜주는 일.

그게 유리에게 할 수 있는 유! 관심 아닐까.




*어린이 이름은 가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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