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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리는 강선생 Nov 27. 2023

베리스모 오페라와 소포모어 징크스

기적같던 2022년과 부침을 겪었던 2023년을 정리하며

1.  카르멘의 비제처럼


2012년 7월의 일입니다. 춘천에서 여수까지 800km를 걸어서 21일간의 도보여행을 마무리했습니다. 돌아가는 길은 KTX를 탔습니다. 21일 동안 걸어서 온 길은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니 3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뿌듯한 성취감을 안은 채로 푹신한 좌석에 앉아 앞에 놓인 KTX매거진을 읽었습니다. 거기서 베리스모 오페라에 관한 글을 읽었습니다.


베리스모 오페라 오페라의 한 장르로 그 시초는 비제의 카르멘을 들 수 있습니다. 카르멘의 서곡을 들어보면 지금은 너무도 익숙한 곡이지만, 비제가 카르멘을 초연할 때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오히려 굉장한 비판을 받았다고 하죠. 그 이유는 당시 오페라는 주로 왕족, 귀족이 즐겨 들었고, 그래서 극은 고급스럽고 우아한 것들로 가득 채워있었다고 합니다. 그에 반해서 카르멘은 거지, 도둑, 집시, 창녀, 살인 등 거리의 부랑자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기 때문에 주 소비층에게 외면을 받았던 것이죠. 카르멘은 그렇게 외면과 비판을 받았지만 비제의 사후에 비로소 주목을 받았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비제는 시대를 너무 앞서나간 것이라고 할 수 있죠. 매거진을 쓴 필자는 이야기합니다.


자아 부재의 시대이다. 모두들 남들이 원하는 것, 남들이 하고자 하는 것을 따라 살아간다.
진정한 예술가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아간다고. 그게 진정한 예술가의 삶이라고.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비제에 저를 투영했습니다. 남들이 원하는 것, 남들이 하고자 하는 것을 하지 않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나와 그를 동일시해봤습니다. 그리고 마치 돈키호테처럼 남들과 반대로 달리는 제 자신을 누군가 공감해 주고 위로해 준 것 같아서 든든한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용기가 생겼어요. 그래 한 번 해보자. 진정한 예술가의 삶을 살아보자. 비록 지금은 주목받지 못하더라도,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실천하면서 살아보자. 주변의 속도와 시선을 신경 쓰지 말고 나만의 속도와 방향을 갖고, 무엇보다 진정성을 갖고 살아보자. 그렇지만 욕심도 조금 생겼습니다. 비제처럼 사후에 주목받는 게 아니라 그래도 너무 늦지 않은 시간 내에 인정을 받고 싶다는 욕심. 그렇게 2012년 7월, 저는 카르멘의 비제처럼 살기로 결심합니다.

2012년 7월, 춘천-여수 도보여행을 마치고 KTX를 타기 전



2. 안정이라는 불안정


누구나 안정을 추구합니다. 저 역시 편한 집에서 좋은 차를 타고 괜찮은 직장을 갖고 살아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상. 대. 적으로 저는 안정보다 불안정을 추구합니다. 안정적일 때는 가끔 혹은 자주 지루함을 느끼고, 불안정할 때는 자주 혹은 가끔 짜릿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2016년 7월부터 2017년 2월까지 결혼과 임용시험 합격이라는 두 가지의 강렬한 안정감을 획득한 후 그에 비례하는 강렬한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삶의 짜릿함이란 다가올 하루, 불확실하지만 설레는 내일을 기대하는 '그 순간'을 느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불안정에 익숙해져 있던 저에게 갑자기 다가온 안정감은 극도의 답답함과 불안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불확실하지만 내일이, 다음 달이, 내년이 어떻게 될지 궁금해지는 하루하루가 아니라 너무도 명확히 미래가 그려지는 삶을 처음 살아보니까 역으로 극도로 불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삶의 생기가 사라지는듯한 기분이 들었고, 삶이 나아간다는 기분을 느끼지 못해서 성취감 또한 느낄 수 없었습니다.

안정이라는 티켓을 두 장이나 움켜지니까 오히려 불안감이 다가왔습니다



3. 인플루언서의 삶


이렇게 정체된 삶을 지내면서 시들어가던 중,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습니다. 처음에는 코로나로 인한 온라인 수업이 목적이었지만, 고성-부산 도보여행으로 본격적으로 영상을 촬영, 편집하였고, '선생님이 교복 입고 출근하면 생기는 일'로 첫 100만 영상이 탄생하였습니다. 100명 언저리에서 정체되어 있던 구독자 수는 1000명, 10000명, 3만으로 가파르게 상승했습니다. 다양한 매체에서 인터뷰를 하였고, 이제는 교사 강이석보다 유튜버 지리는 강선생으로 알아보는 사람이 더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구독자 상승률 2주간 1위!


2022년 11월 유튜브로 겸직신청을 허가받았고, 구글 본사로부터 수익금을 입금받았습니다. 같은 해 9월 여행 에세이 '여행이 부르는 노래'를 출판하였습니다. 책은 처음 몇 주처럼 계속 잘 팔리지는 않았지만, 책을 출간했다는 이유로 꽤 많은 곳에서 특강을 다녔습니다. 2021년 여름부터 시작한 '빅데이터와 스토리텔링' 특강도 틈틈이 했고, 거기다 이제는 유튜브를 주제로도 특강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저는 교사이자 유튜버이고, 작가이면서 틈틈이 특강을 다니는 엄연한 N잡러가 되었습니다.



4. 소포모어 징크스


그렇게 기적 같았던 2022년을 보내고 2023년 3월 학교를 옮겼습니다. 새로운 학교에서는 유튜브 촬영이 금지되었고, 그에 따라 제 유튜브 채널의 주요 내용이었던 학교의 리얼한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급격하게 상승하던 구독자 수는 정체되었고, 자연스럽게 유튜브를 하면서 신나게 학교 생활을 하던 교사 유튜버의 모습도 자취를 감추고 맙니다. 이대로 지리는 강선생은 끝나는 것인가...


비록 학교에서 영상을 촬영할 수는 없었지만 새로운 길을 모색해 봤습니다. 라이브 방송을 처음 시도해 보았습니다. 학교에 대해 교육에 대해 학생과 선생님에 대해 궁금한 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했습니다. 4시간 동안 라이브 방송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지올팍의 크리스찬 커버곡 뮤직 비디오를 촬영하기도 했고, 구독자 5만 기념 팬미팅을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의미 있는 영상들을 만들려고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서이초 사건 이후로 많은 예비교사들이 교대나 사범대 가기를 꺼려하고 교사가 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예비 교대생과 신규 초등교사의 만남'이라는 영상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반대로 퇴직한 초등학교 선생님과 인터뷰를 하면서 교사를 그만두고 다른 삶에 도전하는 모습을 담아보기도 했습니다.


물론 중간중간에 제자의 닭갈비 영상과 상남자 아버지의 전기톱 영상이 대박이 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구독자 수는 그래도 꾸준하게 상승하였습니다. 그렇게 2023년 11월 27일 현재 구독자는 7만 5천 명을 향해가고 있습니다. 2023년은 고3 담임을 맡으며 글쓰기와 특강 등 다양한 활동을 한 것 치고는 그래도 소포모어 징크스를 잘 이겨낸 한 해라고 스스로 평가해 봅니다.



5. 지금, 여기에서 다시 시작


약 10년 전 저는 도보여행을 끝마치고 베리스모 오페라를 쓴 카르멘의 비제처럼 살고 싶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비록 지금은 인정받지 못 하지만 남의 시선을 과도하게 신경 쓰지 말고 나만의 색깔을 유지하며 밀어붙인다면 언젠가는 인정받는 날이 올 것이라는 막 800km를 걸어서 정복한 20대 청년이 품은 날 것 그대로의 다짐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10년 후, 저는 특강을 하면서 이 '베리스모 오페라'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정도는 된 것 같습니다. 제가 엄청난 성공을 거둔 사람도 아니고, 당연히 그런 엄청난 성공을 바라는 사람도 아니지만, 적어도 지난 10년 간 남들 시선에 자신을 맞추면서 살아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조금은 그 유지해 온 색깔을 인정받고 있노라고 남들 앞에서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정도는 된 것 같습니다.


베리스모 오페라 필자가 KTX 매거진 마지막에 밝힌 '진정한 예술가의 삶'이 지금 저의 모습인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앞으로도 계속 저의 색깔을 유지하면서 그 예술가의 삶을 지향하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혹시 크고 작은 시련이 오더라도 저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바로 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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