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여행을 하다 보면 전날 아무리 많이 걸었어도 신기하게 다음날 아침에는 개운하게 눈에 떠진다. 그 이유는 아마도 오늘 해야 할 너무도 분명하고 구체적인 목표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젯밤 하루 신세를 졌던 제자가 또다시 어제 픽업받았던 하조대 자전거 휴게소까지 픽업해 주었다. 생각해 보면 10년도 더 지났지만 참 고마운 인연이다.
어제 뜨거운 뙤약볕에서 5시간 넘게 걸어왔던 똑같은 길을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며 30분 만에 거침없이 달렸다. 차를 타고 가던 도중, 어제 빠른 길로 가지 않고 굳이 양양 국제공항 방향으로 돌아 돌아 걸어가며 개고생 했던 갈림길이 나왔다. 참 언제나 순간의 선택이 중요한 것 같다.
하조대 해수욕장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도보여행 셋째 날을 시작했다. 아직 오전 8시인데 30도가 훌쩍 넘는 덥고 습한 공기는 아직 한걸음도 걷지 않은 온몸에 땀을 적신다. 흐르는 땀을 연신 닦으며 오늘의 최고 기온이 35도가 넘는다는 격렬한 휴대폰 폭염 경보 알람을 바라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캡을 쓰고 신발 끈을 단단하게 맨 후 첫 발걸음을 떼면, 모든 더위와 걱정은 순식간에 날아가린다. 그리고 어느새 새로운 여행에 대한 행복감 만이 물씬 밀려온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선곡해 준 오늘 도보 여행의 오프닝 곡은 볼빨간 사춘기의 여행이다.
도보여행은 3일 차가 가장 힘들다. 1일 차에는 처음 시작한다는 설렘 덕분에 힘듦을 버틸 수 있다. 2일 차는 아직 그 설렘이 남아있고 걷는 피로가 덜 쌓여있는 상태이다. 그런데 3일 차는 시작의 두근거림은 사라져 버리고 아직 완전히 걷는 것에 적응하지 못했지만 피로는 3일 동안 누적된 상태이다. 비로소 4일째가 되면 적당한 성취감과 함께 몸과 마음이 적응된다. 그 이후로는 그냥 쭉쭉 걷기만 하면 된다.
도보여행은 장비가 정말 중요하다. 그렇다고 무조건 비싸고 좋은 장비가 필수적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하루 10시간 이상 걸으며 발을 혹사시키는 도보여행에서 좋은 트래킹화는 필수적이다. 조금 돈을 투자해서라도 최대한 기능이 좋고 발이 편한 트레킹화를 사는 것이 좋다. 도보여행 직전 아이더 해파랑 T1500을 구매했다. 참고로 끈보다 조그 다이얼이 있는 신발이 신고 벗을 때 조금이라도 불필요한 에너지를 아낄 수 있다.
배낭은 멨을 때 어깨가 아프지 않고 등이 불편하지 않은 것이 좋다. 이번 도보여행은 첫 유럽 배낭여행부터 함께했던 나의 오랜 여행 친구 트레블 메이트 45L과 함께 했다. 또한 이번에는 앞으로 메는 웨이스트 백을 자주 사용하였는데 자주 사용하는 물건들, 예를 들어 블루투스 이어폰이나 안경 닦이, 식염 포도당 등을 이곳에 넣어두면 걸으면서 바로바로 꺼내 쓸 수 있어서 유용하다.
그럼에도 이번 도보여행에서 가장 유용했던 장비는 바로 일명 '양봉 스타일' 페이스 마스크다! 얼굴 전체와 뒷 목까지 완전히 감싸줘서 작열하는 뜨거운 태양을 모조리 막아준다. 매쉬 소재여서 바람이 잘 통하고 시원하다. 코와 입 부분에는 작은 구멍이 나있어서 걸을 때 숨쉬기도 수월하다.
이 페이스 마스크가 ‘양봉 스타일’인 이유는 마치 양봉업자들이 쓰는 장비같이 생겼기 때문이다. 낮에 걷다가 휴식을 취할 때 잠시라도 이 양봉 스타일을 벗으면 엄청난 더위가 온몸으로 느껴질 정도로 그 역체감이 대단하다. 만약 이 양봉 스타일이 없었더라면 이번 도보여행은 아마도 매우 힘든 시간이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 외에도 무릎과 발목 관절 보호대, 햇빛 알레르기에 취약한 피부를 보호해 주는 쿨토시도 정말 유용했다.
웨이스트 백과 쿨토시, 그리고 양봉 스타일!
하지만 장비를 준비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편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장비라도 내 몸에 조금이라도 불편하다면 걷는데 쓰일 에너지가 온통 그 불편함에 쓰일 수밖에 없다. 마치 사막을 걸을 때 가장 힘들었던 점이 신발에 들어간 작은 모래 알갱이 하나였다는 말처럼. 장비의 목적은 나의 에너지를 최대한 보존하고 그 에너지를 오로지 걷는 데 사용하기 위함이다.
고프로 렌즈에다 한참 장비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오르막길이 끝나고 내리막길이 시작됐다. 평소 걸을 때는 당연히 오르막길이 더 어렵고 내리막길이 훨씬 쉽다. 하지만 도보여행에서는 오히려 그 반대이다. 하루종일 걸으며 다리에 힘이 완전히 풀린 상태로 내리막을 걷다 보면 온몸의 무게가 집중되어 관절에 무리가 갈 수 있고 자칫 잘못하면 발목을 접지를 수도 있다. 그래서 도보여행하다가 오르막길이 나오면 오히려 반갑게 맞이한다. 물론 오르막길이 숨이 차고 힘들긴 하지만!
내리막을 조심스럽게 걷다 보니 어느새 평지가 나왔다. 거기다 이번에는 너무도 걷기 편한 자전거 전용 도로다! 해파랑길은 가끔씩 이렇게 걷기 좋은 자전거 도로나 트래킹 전용 도로가 나오지만, 대부분 차도의 갓길인 경우가 많았다. 갓길을 걸을 때는 반대편에서 차가 쌩쌩 달리다 보니 긴장을 하면서 집중해서 걷게 되고 그래서 시간이 더 빨리 가는 편이다.
반면 트래킹 전용 도로를 걸을 때는 여유롭고 편하게 걸을 수 있는 반면 긴장감이 풀린 나머지 오히려 육체적 정신적으로 더 피곤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렇게 도보여행을 하다 보면 평소에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반대로 느껴보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마치 동네 뒷산에서 등산을 하듯 경사도 적당하고 그늘도 시원해서 걷기 좋았던 북분리를 지나 바다로 진입했다. 동해안 길을 따라 북쪽에서 남쪽으로 가로지르다 보면 하루 중 70% 이상 시간을 바다를 왼편에 끼고 걷게 되지만 그래도 바다는 항상 반갑다.
바다는 언제나 반갑다!
여름휴가 시즌이 시작된 시점이라 해변마다 인파가 넘친다. 특히 요즘은 캠핌족들이 늘어나면서 캠핑장에서는 저마다 자신의 고급 캠핑 장비를 자랑하기 바쁘다. 가족과 연인, 친구들과 함께 캠핑을 하는 무리들을 가로질러 양봉 스타일을 쓰고 커다란 배낭을 멘 채로 뚜벅뚜벅 걸었다.
대한민국 서핑의 성지로 불리는 인구리 해변에 도착했다. 서핑 덕분에 강원도에서도 꽤나 변두리였던 양양이 전국적으로도 핫 플레이스가 됐다. 물론 서핑뿐만 아니라 다른 면에서도. 이곳에는 마치 캐리비안 해안 분위기가의 펍과 힙한 분위기의 서핑 샵이 즐비하다. 하와이 북부 서핑 해변에 위치한 하와이 새우 트럭도 보인다. 매우 이국적인 분위기와 음악이 흐르는 서핑의 성지를 나 혼자 터덜터덜 걷는다.
고성, 속초, 양양에 이어 4번째 도시 강릉에 진입했다. 북강릉의 활기찬 어촌 마을 주문진이 반겨준다. 주문진에는 어업이 발달한 항구와 경포대나 망상처럼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포켓비치가 일품인 주문진 해수욕장이 있다. 이곳에서 세종시에 근무하는 선생님을 만나기로 했다. 도보여행을 한다는 소식을 SNS로 접하고 나를 응원해 주러 그 먼 거리를 달려온 것이다. 막국수와 수육을 맛있게 먹고 함께 기념사진도 찍었다. 주변사람들의 따뜻한 응원을 받으니 발걸음에 한결 힘이 난다.
주문진의 아기자기한 골목을 지나 사천해변으로 향했다. 사천해변을 걷다 보니 옛 생각이 난다. 이곳은 아내와 처음 바다 여행을 온 곳이다. 이곳에서 조금은 어색하지만 풋풋한 커플 사진을 찍었다. 아 맞다! 그리고 다음 날 출근해서 학생들과 농구를 하다가 발목을 심하게 접질렸다. 깁스를 하고 목발을 짚어야 겨우 걸을 수 있을 정도로 굉장히 심하게 다쳤다.
그런데 하필이면 바로 다음주가 학교 축제였고, 축제에서 나는 EDM Party 부스를 맡았다. 당시 나는 EDM, 일렉트로닉 디지털 뮤직에 한참 빠져있었고, 전국에 있는 EDM 클럽들을 섭렵하며 춤을 췄다. 그러다 한국의 클럽 문화가 시시하게 느꼈는지 EDM의 본고장 네덜란드로 떠났다. EDM을 향한 열정은 북유럽까지 이어졌고, 한국인은커녕 아시안이라고는 찾아볼 수 있는 클럽 스테이지 가운데서 춤을 췄다. 결국 나는 EDM을 직적 내 손으로 만들고 싶어 디제잉까지 배웠다.
어쨌든 그렇게 학교 축제에서 EDM 디제잉을 하게 되었는데 발목이 다쳐서 목발을 짚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대신 DJ 네이밍을 이렇게 했다. DJ Cluch! 어감은 멋있지만 DJ 목발이다...ㅋㅋㅋ
아무튼 그렇게 EDM은 커녕 클럽과는 전혀 동떨어진 정선에서 나는 학생들에게 신세계를 보여줬다. 마치 홍대 지하 클럽을 연상케 하는 어둑한 분위기의 영어 교실 스크린에는 투마로우랜드 실황 영상이 나오고 있었고, 나는 사비로 빌린 턴테이블과 각종 디제잉 장비들로 열정적으로 디제잉했다. 그리고 학생들은 활어처럼 미친 듯이 춤을 췄다.
그렇게 사천해변에서 시작해서 EDM 파티까지 의식의 흐름대로 썰을 풀다 보니 어느새 오늘의 종착지 경포대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가장 친한 친구를 만나서 픽업받았다. 오늘은 이 친구 집에서 잔다. 친구는 나를 보자마자 배가 왜 그렇게 나왔냐며 살 빼라고 다그치고, 나는 격렬한 욕설로 받아친다. 찐 친구의 텐션은 이런 거다.
강릉 시내로 가는 도중 차 안에서 10년도 훨씬 전 이 친구의 도보여행 썰을 들었다. 당시 코스를 너무 어려운 산길로 잡았고, 비도 많이 와서 도중에 포기했는데, 그래도 돌아오는 길은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서 왔다고. 왜냐하면 '가오가 있으니까!'라는 친구의 말. 이 썰은 정말 10번을 넘게 들어도 웃기다.
15년 지기 찐 친구와 장군 시오야끼
동해안 도시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장군 시오야끼에서 저녁 겸 반주를 했다. 사실 그날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하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그게 뭐가 중요한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 편하니까 그만이다. 그렇게 도보여행 3일 차 밤이 저물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