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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리는 강선생 Sep 07. 2024

미친듯한 폭우를 뚫고 걷기

Day2_고성 아야진에서 양양 하조대까지

새벽 6시, 평소 같은 아직 침대에 누워있을 시간이지만 도보여행 중에는 모든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야 할 시간이다. 햇빛이 본격적으로 뜨거워지는 11시 전까지 최대한 많이 걸어둬야 하기 때문이다. 숙소를 나와 편의점에서 아침으로 전복죽을 먹었다. 원래 아침을 잘 먹지 않지만 도보여행 중 아침을 거르면 걷다가 도중에 쓰러질 수도 있다.


이제 해가 막 뜬 바다를 바라보며 둘째 날 아침을 시작했다. 첫째 날 밤을 꼬박 새운 상태로 하루 종일 걸었지만 오늘 의외로 상태가 괜찮다. 발바닥이 조금 아프고 무릎이 그보다 조금 더 아프다는 것 빼고는 몸상태가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다행히 아직까지 물집은 잡히지 않았다.


도보여행 둘째 날 일정은 다음과 같다. 고성군 아야진 해변에서 시작해서 속초시로 진입한다. 청초호, 영랑호, 아바이 마을을 지나며 속초를 관통해서 다시 양양군으로 이동한다. 물치해변, 낙산사를 지나 양양 하조대 해수욕장에서 마무리한다. 마침 10년 전 교생 때 제자가 양양 서핑샵에서 일하고 있어서 오늘은 그 친구 집에서 묵을 예정이다.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왼편에 바다를 두고 오른손으로 액션캠 고프로를 들고 걸으니 다시 행복감이 밀려온다. 귀에는 볼빨간 사춘기의 노래 여행이 흘러나온다. 나는 그렇게 춤을 추며 신나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나저나 고작 하루 걸었을 뿐인데 출발하기 전 떠들썩하게 소문을 내서인지 친구, 직장 동료, 제자 등 많은 지인들에게 응원의 메시지와 선물을 받고 있다. 주로 카카오톡 선물들인데, 에너지 드링크부터 이온음료, 치킨, 피자, 햄버거, 그리고 편의점에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상품권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이렇게 각종 선물로 지원을 받으면서 걷다 보니까 유튜버나 아프리카 BJ들이 팬들에게 도네(후원)를 받을 때 기분이 어떨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의외로 컨디션도 좋은 데다 기분 좋은 응원까지 받으니까 발걸음이 가볍다. 천진 해수욕장과 봉포 해수욕장을 힘차게 걷다 보니 갑자기 도보여행과 유럽 배낭여행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럽 여행을 할 때 평소 보지 못했던 건축물들이나 유럽의 문화를 즐긴다는 점도 좋았지만 개인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특히 좋았다. 어떻게 보면 이렇게 배낭 하나 메고 하루 종일 걷는 도보여행도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으면서 할 수 있는 여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걷다 보니 런던 느낌의 빨간 공중전화 부스가 보인다. 해수욕장의 이름은 켄싱턴 비치! 이름이 왜 이렇게 이국적일까? 궁금증이 들었는데 바로 옆에 켄싱턴 리조트가 있다. 이렇게 호텔 이름으로 해수욕장 이름을 바꿔도 될까 의문이 들긴 한다. 조금 더 걸으니까 영국 런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빨간 2층 버스도 보인다. 갑자기 나의 최애 여행지이자 무려 7번이나 가본 런던을 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2층 버스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딱 봐도 도보여행객처럼 보이는 아저씨가 반대편에서 걸어오신다. 단번에 해파랑길을 종주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말을 걸었다. 나의 최종 목적지인 부산에서 출발해서 오늘이 17일째라고 하신다. 아저씨는 이제 막 2일째 아침을 시작한 나를 응원해 주셨고, 나 또한 아저씨의 도보여행 종주를 축하해 드렸다.


고성 까리타스 피정의 집이 있는 언덕을 넘으니 속초로 진입하였다. 첫 번째 행정구역 이동이다. 이때부터 조금씩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도보여행 기간이 장마철이긴 했지만 우산을 들고 걷는 것은 너무 불편하고 어차피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면서 걸을 생각이어서 우산은 따로 챙기지 않았다. 영랑호와 청초호를 지나면서 비는 점점 거세졌다. 열대지방의 스콜 같은 게릴라성 집중호우가 쏟아졌다. 이 와중에도 나는 스윙스의 'Rain Showers'를 들었다. ‘밖에 비 온다 주륵주륵주륵‘


이대로 걷기는 힘들어서 아바이 마을 쪽으로 들어가서 처마 밑에서 잠시 비를 피했다. 하지만 비가 금방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그냥 폭우 속을 걷기로 했다. 다행히 옷은 고어텍스 재질이고, 고프로와 휴대폰도 방수가 지원되니까 상관없는데 가방 안에 있는 양말과 속옷, 그리고 보조 배터리가 걱정이다. 속초 시내에 완전히 진입해서 대로변 갓길로 걸으니 커다란 덤프트럭이 커다란 파도를 나에게 쏟아내며 거세게 지나친다. 눈이 제대로 안 떠질 정도로 빗물을 맞으면서 빠른 걸음으로 대포항까지 도착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비를 쫄딱 맞은 상태로 삼각김밥 한 개로 점심식사를 때웠다. 대포항 튀김 골목에 들어섰지만 그냥 지나쳤다. 원래 도보여행 때는 식욕이 별로 없다.


그렇게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속초를 관통해서 양양 물치해변에 도착했다. 도보여행 세 번째 행정구역이다. 조금씩 비가 그쳤고 하늘은 거무튀튀한 먹색에서 원래의 푸른빛으로 바뀌고 있었다. 동글동글한 자갈이 수북이 쌓여있는 몽돌해안에서 잠시 쉬었다. 바다가 정면으로 보이는 벤치에 앉아서 5겹의 레이어를 바라봤다. 파도를 형상화해 놓은 해안 산책로, 그 위로 몽돌자갈과 파도치는 진짜 파도, 이제 완전히 파랗게 변한 하늘과 하얀 구름. 이렇게 다섯 겹의 풍경과 파도소리를 들으니까 음악이 따로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침부터 귀에 꽂고 있던 블루투스 이어폰을 뺐다.

5겹의 레이어가 인상적이었던 물치 해변


오후 2시, 이제 날씨는 완전히 맑음. 오전 내내 비가 내려서 공기는 매우 습하다. 그래도 날이 맑으니까 고프로 화면에 비친 화면은 예술이다. 낙산 해수욕장에 들어서니 서핑을 배우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우리나라가 언제부터 이렇게 서핑에 진심인 나라가 되었을까? 서핑샵에서 일하고 있는 제자를 찾아갔다. 사장님은 지금은 강습 중이라면서 조금 기다리라고 하셨다. 어차피 이따 저녁때 만날 테니 제자 잘 부탁드린다는 말만 전하고 서핑샵을 나섰다.


낙산 해수욕장에는 소나무가 많이 보인다. 이렇게 바닷가에 있는 소나무를 해송이라고 하는데, 이는 원래 이곳에 있던 것이 아니다. 바닷가는 바다와 육지의 온도차이 때문에 필연적으로 해풍이 부는데, 이 바다에서 육지로 부는 바람에는 모래와 소금기가 섞여있다. 그래서 바닷가 옆에 있는 마을 사람들이 이 해풍의 피해를 막기 위해 오래전부터 소나무를 심었다. 그것을 바람을 막는다는 뜻으로 방풍림이라고 했다. 즉, 소나무들은 사람들이 심은 인공림인 것이다.


낙산사로 가는 오르막길의 경사도는 6도라고 나와있지만 실제 경사는 숫자보다 더 가파르게 느껴진다. 오후 3시쯤 양양읍내에 도착했고 갈림길이 나왔다. 왼편으로 가면 해변을 따라 쭉 걷다 보면 오늘의 종착지인 하조대 해수욕장이 나온다. 오른편으로 가면 약간의 그늘이 있지만 언덕을 넘어야 한다. 오늘 대부분을 바다를 보면서 걸었으니까 오른쪽 산길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이는 크나큰 실수였다.


언덕은 끝없이 이어졌고 아직 해는 너무도 뜨겁다. 다행히 언덕이 끝나는 지점에 편의점이 있다. 이탈리아인들에게 커피에 대한 모욕으로 불리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드링킹 한다. 그들도 한국의 여름을 경험해 보면 알 수 있을 거다. 왜 한국인들이 그토록 아아를 좋아하는지 말이다. 다행히 오후 4시가 지나자 해는 조금씩 그 열기를 줄여줬지만, 발걸음은 점점 무거워졌다. 그리고 오르막길을 양양 국제공항까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양양 국제공항. 강원도 유일의 국제공항이자 강원도의 항공사 플라이 강원이 취항하는 공항이다. 생전 처음 와보는 공항을 걸어서 오다니! 이번 도보여행 참으로 버라이어티 하다. 이곳이 과거 군부대였다는 흔적을 철조망으로 데코레이션 된 콘크리트벽으로 보여준다. 공항을 지나 끝없이 이어진 철조망길을 따라 내려간다. 도보여행을 장기간 하다 보면 내리막길이 오르막길보다 훨씬 힘들다. 오르막은 숨은 차지만 무릎관절에 큰 데미지가 안 쌓이지만, 내리막은 나의 체중이 그대로 관절에 실리기 때문에 피로감과 통증이 더해진다.


오후 6시, 하늘은 점점 어둑해지고 철조망길은 끝이 없다. 몸이 힘들어지니까 '아까 그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갔어야 했는데'라는 의미 없는 후회가 마음속에서 계속 밀려온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한 시간 넘게 걸어오는 동안 공항옆 철조망 길에는 나 말고 아무도 없다. 나는 밀려오는 후회와 쌓여오는 피로와 끊어질 것 같은 무릎 통증을 이겨내기 위해 엠씨더맥스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성대가 찢어지듯이 다섯 곡쯤 부르고 나니 어느새 바다가 보인다.


지겨운 양양국제공항 철조망길이 끝났지만 아직 하조대 해수욕장까지 가려면 두 시간 이상 걸어야 한다. 이미 해는 졌고 바닷가 길은 어둑어둑하다. 제자를 만나기로 한 시간은 여덟 시, 지금 이 속도로 가다 보면 늦는다. 이제 다리에 감각이 점점 사라졌지만 걸음을 재촉했다. 정신이 몽롱한 가운데 숲이 우거진 어둠 속을 걷다 보니까 갑자기 조선시대 선비들이 생각났다. 선비들은 과거를 보기 위해서 한양까지 이런 어둠 속을 걸어갔겠지. 그러다 도중에 주막이 나오지 않으면 호랑이한테 물려갈 수도 있었을 거다. 선비들은 참 대단한 것 같다. 그런 용기가 있어야지 과거에 합격하는구나.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하조대 해수욕장 자전거 쉼터에 도착했다.


다행히 제자와 거의 비슷하게 도착했다. 오랜만에 만난 제자와 반가움의 하이파이브를 하고 트렁크에 짐을 실었다. 원룸에 도착하는 시간과 맞춰서 후라이드 치킨 두 마리를 시켰고, 시원한 맥주도 준비했다. 12시간 30분 동안 48km를 걸은 후 마시는 맥주 첫 모금의 맛이 상상이 가는가? 그렇게 5리터 넘게 흘린 땀의 빈자리를 맥주와 치킨으로 가득 채우고 하루를 마무리했다.




- 4편에서 계속됩니다.

- 유튜브 영상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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