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도보여행을 떠나기 하루 전날은 상식적으로 숙면을 취해야 했다. 그것도 17일 동안 700km 넘게 폭염 속을 걷는 하드코어 한 일정에서는 더욱 그래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사실 이번 고성에서 부산까지 걷는 도보여행의 근본적인 이유는 영상의 기록이었다. 그동안 수없이 여행을 다니면서 살까 말까 고민했던 액션캠 고프로를 그래서 구입하였고, 더 나은 영상 편집을 위해 유료 영상 편집 프로그램 프리미어 프로를 설치했다. 유튜브에서 영상 편집 방법을 배웠고, 완성된 영상을 내 유튜브 채널 '지리는 강선생'에 업로드할 계획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출발하기 전 영상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새벽에 그 영상을 편집하고 있다.
출발하기 전날 마지막 여행지리 수업에서 찍은 영상 '폭염 속에서 도보여행을 떠나는 이유'에 자막이 입혀지고, 썸네일을 만들고, 오프닝과 엔딩까지 완성되고, 인코딩이 완료되어 업로드된 시간은 새벽 4시 30분. 오전 8시에 고성 통일 전망대에서 출발하려면 지금 바로 차에 올라타야 했다. 나는 서둘러 배낭에 짐을 챙겼고, 그렇게 도보여행을 출발 전날 밤을 새우고 말았다!
영상 편집으로 밤을 꼬박 새운 이른 새벽, 정신은 혼미하고 눈은 감겨왔지만 테슬라의 자율주행 덕분에 무사히 대한민국의 북쪽 끝 통일 전망대에 도착했다. 앞으로 17일 간 나의 발목과 무릎을 지켜줄 관절 보호대를 착용했고, 뜨거운 햇빛을 막아줄 양봉 스타일의 마스크 선캡도 착용했다. 아이더 해파랑 T-1500 트래킹화의 조그 다이얼을 꽉 잠그고 20년 동안 나와 여행을 함께한 45L 트래블 메이트 배낭을 짊어졌다. 마지막으로 이번 도보 여행의 모든 것을 기록할 고프로 9의 빨간색 녹화 버튼을 누르며 나의 도보여행은 시작됐다.
그렇게 나는 남쪽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금강산 콘도가 보였고, 표지판에는 김일성 주석의 별장이 보이는 것을 보니까 여기가 과거 38선 이북 땅이었다는 게 실감이 났다. 아침이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많이 덥진 않았다. 어제 춘천은 아침인데도 30도가 넘어서 출근길에 땀이 뻘뻘 났고, 한낮에는 무려 37도여서 이런 폭염에 하루 종일 걷는다는 것이 걱정이 됐었는데, 이 정도 날씨면 꽤 걸을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발 직후 금강산 콘도를 배경으로
배낭에는 '내 생애 단 한번 2021 여름, 고성→부산' 현수막을 써붙였다. 누가 봐도 도보여행자처럼 보이는 나에게 바닷가에서 캠핑 중인 아저씨가 말을 건네신다. 아침부터 한잔 걸치신 것 같은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혼자 걷는 나를 응원해 주신다. 아직 초반이어서였을까? 아니면 오랜만에 혼자 떠나는 여행이 설레서였을까? 밤을 새웠는데도 이상하리만큼 몸에 에너지가 넘친다. 너무 신이 난다! 그래서 고프로를 저 멀리 미리 배치해 주고 내가 걸어오는 영상을 찍어보기도 했다. 여행 유튜버들이 하는 것보고 꼭 해보고 싶었거든. 물론 다시 뒤로 돌아가서 고프로를 가져와야 하는 수고를 해야 한다.
아뿔싸! 걷다 보니까 생각났다. 밤을 새우고 나서 정신없이 나오다 보니까 중요한 세 가지를 빼먹고 왔다. 장기간 여행에서 반드시 필요한 보조배터리, 실시간으로 걸은 거리와 현재 시간을 볼 수 있는 스마트 워치, 그리고 햇빛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쿨토시. 셋 다 정말 중요한 것들인데 이걸 빼놓고 오다니! 살짝 현타가 오긴 했지만 그래도 뭐 어쩔 수가 없다. 이미 지나간 일이고 지금 걷는 도중에 지나간 일을 자꾸 생각하면 방해만 될 뿐이다. 나는 그저 지금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을 해결하면 된다.
보조 배터리는 걷다가 읍내가 나오면 휴대폰 대리점 같은 곳에서 사면되고, 쿨토시는 아마 읍내 다이소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계는... 뭐 한 며칠 동안 시계 없이 걸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걷는다. 고맙게도 걷고 있는 바닷가 길은 동풍이 분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라 시원하다. 흐르는 땀을 금세 날려준다.
대진고등학교를 지나자 우측으로 화진포가 나온다. 강릉의 경포호, 속초의 영랑호, 청초호는 가봤는데 화진포는 처음이다. 고성은 아직 관광지가 많이 개발되지 않아서 강릉, 속초의 석호들과는 다른 자연 그대로의 매력이 느껴진다. 고프로를 들고 호수와 내 얼굴을 번갈아 찍으며 '너무 예쁘다!'를 반복하면서 걸었다. 마음속에서 이유 없는, 하지만 너무도 뚜렷한 행복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계속 걷는다면 50km도 더 걸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들었다.
바닷길과 항구를 지나서 사구 위에 심어진 소나무길을 따라 걸었다. 시간이 점점 정오에 가까워오면서 햇빛은 점점 강렬해져 갔고 애석하게도 해송들은 시원한 그늘로 나를 감싸주지 않았다. 한 시간 넘게 햇빛을 온몸으로 맞으며 걷다가 발견한 그늘에 시원한 바위에 누워 쉬며 '아 이게 지중해성 기후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다행히 아직 물집은 잡히지 않았지만 출발하기 전부터 수상했던 왼쪽 아킬레스건이 아파왔고, 오른쪽 무릎이 조금씩 욱신거리기 시작한 것도 그때쯤이다.
이제 더 이상 그늘은 없었다. 밤샌 후유증이 스멀스멀 밀려오고 있었고, 아지랑이 피는 논길 사이로 개장수 아저씨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점심 식사를 하면서 잠시 쉬려고 했던 간성읍내는 아득히 멀었다. 그 와중에 또 길을 잃어 30분 넘게 걸어왔던 길을 다시 30분 걸려 원점으로 돌아오기까지 했다. 그럴 때마다 왜 그리도 동네에 풀린 개는 따라오는지.
30도가 넘는 땡볕에서 4시간 넘게 걸으며 땀을 4리터는 족히 쏟은 후에 마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맛이 어떤지 상상이 가는가? 아아를 혀와 머리가 얼얼해질 정도로 딥 드링킹 한 후에 편의점에서 포카리 스웨트 1.5리터짜리를 샀다. 그리고 한 모금 마셨는데,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방금 마신 아아보다 딱 10배 더 맛있었다. 단 한 번 입을 댔을 뿐인데 파란색 페트병 속 액체는 반만 남아있었고, 그 나머지 반까지 모두 마시고 나서 이걸로 점심을 대신하기로 했다.
수분과 전해질, 그리고 카페인을 가득 채우고 걷는 길은 조금 나아질까 했지만, 지금은 오후 2시 30분이다! 태양은 바로 내 머리 위에 놓여있고, 그 열기는 아스팔트에 한껏 머물다가 내 발로 또다시 내 온몸으로 전달된다. 그래도 걷고 또 걸었다. 도로 갓길은 목적지에 조금 더 빨리 데려가지만, 그만큼 덥고, 위험하고, 지루하다. 다행히 도로 갓길은 곧 시골길로 이어졌고, 어느새 바닷길도 보였다. 오션뷰가 보이는 길가에는 어김없이 카페가 있었다. 우리나라는 언제부터 이렇게 커피공화국이 되었을까? 아마 서울 같은 큰 도시 말고 양양이나 고성처럼 시골 도시에 이렇게 카페가 많은 나라는 아마 세계에서 대한민국밖에 없을 것이다.
이탈리아인들이 '커피에 대한 모욕'이라며 죽도록 싫어한다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하나 더 마시며 걷고 있는데, 눈앞에 '부부 횟집'이 보인다. 부부 횟집. 가만 보면 부부 횟집도 참 이상하다. 내가 살았던 지역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전국 어딜 가나 부부 횟집은 있었던 것 같다. 왜 하필 부부 횟집일까? 부부 삼겹살, 부부 한우, 부부 떡볶이는 없는데 왜 하필 부부 횟집은 이렇게나 많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걷다 보니 정말 '여행은 생각의 산파'라는 알랭 드 보통의 말이 맞는 것 같다.
언덕 위 하얀 집 울타리 옆에 걸터앉아서 조금 쉬다가 언덕을 넘으니 시야가 탁 트인 바다가 바람과 함께 다가온다. 가진항을 지나면서 보이는 마치 부메랑처럼 휘어진 가진 해수욕장부터 저 멀리 보이는 송지호 해수욕장까지 이어진 바다의 라인은 오후 4시가 조금 넘은 하늘빛과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이제 30km 정도 걸으면서 몸도 어느 정도 적응을 했고, 약간의 피로감에 몽롱한 기분도 들어서 그런지 몰라도 바다의 모습이 코타키나발루의 모습과 흡사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난 코타키나발루는 가본 적이 없다.
거기서 조금 더 가다 보니 송지호가 보인다. 아까 오전에 봤던 화진포만큼은 아니지만 여기 송지호 옆길도 꽤나 아름답다. 송지호 호수길을 걸을 때쯤에는 이제 슬슬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소나무 옆으로 지나갈 때는 서늘했고, 옥수수 밭을 지나갈 때는 아직 뜨거웠다. 그래도 반 정도는 서늘하게 걸으면서 송지호 해수욕장을 지나 오토 캠핑장에서 잠시 쉬었다. 도로 옆 갓길에는 '통일 전망대 42km' 표지판이 보인다.
이제 조금씩 하늘이 노란빛으로 변해갔다. 그래도 아직은 여름 햇빛이다. 걷는 방향의 오른쪽으로 태양이 마치 동남아의 어느 시골마을처럼 노랗게 영글고 있었다. 산과 구름과 하늘도 베트남 중부지방 어느 도시의 모습과도 같다. 유튜브 뮤직은 신기하게도 지금의 분위기와 너무도 절묘하게 맞는 노래를 계속해서 추천해 준다.
마치 베트남 중부 지방 시골마을과 같았던 풍경
지금 나오는 노래, 오웬의 오늘
집으로 가는 길은 자꾸만 멀어지는데 저만치 멀어지는 찾을 수 없는 잡을 수 없는
Take it easy 나만 왜 이렇게 힘든 건가요
오늘 밤이 왜 오늘의 나를 괴롭히죠
바닷길을 두어 번 더 지나고 공사판 갓길을 세 번쯤 지나니 오늘의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가 아야진 해변 근처라고 해서 여기로 왔는데 정작 아야진 해변에서 걸어서 한 시간이나 넘게 걸려서 살짝 속은 기분이 들었다. 숙소에 도착해서 땀에 절어버린 옷과 양말, 보호대, 쿨토시, 양봉 스타일을 모두 벗어던져버리고 침대에 그대로 쓰러져 누웠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먹은 건 포카리스웨트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밖에 없는데 이상하게도 배가 하나도 고프지 않았다. 그래도 뭔가는 먹어야 내일 걸을 수 있을 것 같아서 편의점 도시락 하나를 사 와서 먹다가 그것도 미처 다 먹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