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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보씨 May 18. 2021

봄은 무보정이야

Květen 5월은 꽃피는 계절이라는 뜻

이곳 체코는 4월 내내 봄꽃과 봄비와 봄눈을 번갈아 뿌리며 극성스러운 봄맞이 준비를 시키더니

오는 듯 마는 듯 끝나지 않던 겨울과의 밀당 끝에 드디어 봄이 찾아온 듯하다.

타이틀만 봄이라고 단 4월은 변덕스러운 날씨만큼이나 나 역시 속 시끄러운 달이었는지, 나의 모든 기록 활동 역시 어디론가 통째로 사라져 버린 것 같다. 

다이어리의 4월 부분을 아무리 들춰보아도 빠듯한 스케줄표 외에는 내 마음 상태에 대한 기록은 한 줄도 없었다.


나는 그동안 끈질기게 놓지 못했던 히트텍을 벗어던지고 가벼운 차림에 카메라와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집을 나서 봄 속으로 간다.

한 달 동안 기록이 없다는 브런치의 채찍 아닌 채찍을 등에 맞으며 찬란한 봄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은 어디에 카메라를 들이밀어도 무보정 컬러로 즐길 수 있는 진짜 봄이 와 있었다.




체코 우리 동네의 봄

계절은 돌아 똑같은 제자리로 온다.

작년 봄에도 코로나 락다운이 시행되고 나홀로 마스크를 끼고 사람들을 만날까 봐 인적이 드문 곳으로만 가벼운 산책을 나왔었는데, 오늘 계절이 돌아온 자리에서 여전히 같은 상황과 모습으로 같은 꽃나무 아래에 서 있다.




한국과 같이 벚꽃이 피는 체코의 봄

괜스레 사람의 마음을 왈랑왈랑하게 만드는 봄꽃.

나의 산책로 코스는 벚꽃이 만개한 동네의 이 작은 공원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렇게 날이 좋은 오후 시간대엔 산책로에서 가까운 이 건물 저 건물에서 헤헤~ 신이 난 얼굴로 댕댕이들이 먼저 튀어나온다. 그리고 그 뒤로 법적으로 하루에 2~3번씩 정해진 개 산책의 의무를 다하기 위한 집사들의 다소 피로한 얼굴이 뒤따라 나온다.




무보정 컬러의 봄

봄은 무보정이다.

일주일 내내 비가 내려 산책로에 발길이 뜸했던 사이에 봄꽃들이 뽀얗게 피어 있었다.

멀찌감치 서서 새하얀 꽃들이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리며 떨어지는 겹벚꽃 군단을 바라보다가 이 봄날의 생생함을 느껴보고 싶어 살짝 손을 가져다 대어 보았다.

그 순간, 오랜만에 느껴보는 살아있는 꽃의 촉감이 손끝에 전해지며 길냥이가 저 혼자 기분이 좋아 꼬리 끝을 부르르~ 떠는 것처럼 몸의 말초 부분까지 봄의 쾌활한 기분이 전해져 온다.


산책로 곳곳에 만개해 있는 밝기와 색감 보정이 필요 없는 콘트라스트 쨍한 채도 100%의 봄꽃들을 손끝에 만져보려고 낑낑~ 손을 뻗으려다 발끝에 작은 데이지 꽃을 뭉개 버릴까 봐 깨금발의 이상한 스텝의 춤을 추기 일쑤이다.

이상한 춤을 추는 나의 몸도 나의 기분도, 지나가며 작은 동양인을 힐끗 쳐다보고 가는 사람의 기분에도 봄이 왔다.

'응, 그래 봄이니까.'




물싸리

산책로에 핀 내가 알 수 없는 이름을 가진 갖가지 꽃들이 아름답다.

꽃 이름을 알려주는 어플을 이용해 이미 통성명을 한 꽃들은 어딘지 모르게 알고 지내는 사이처럼 한층 더 정감 있게 느껴진다.

몰랐던 것을 알아갈수록, 더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더 사랑스러워진다는 이치를 작년 봄부터 잘 느껴가고 있다.


산책로 초입의 건물만 한 나무는 마로니에, 5월에 피기 시작하는 꽃은 꼭 우산 같은 원추형 형태를 띠고 가을에는 밤과 같은 열매를 맺는다.

사람들의 집에 면한 산책로를 따라 핀 귀여운 노란색 꽃의 이름은 물싸리, 초여름에 꽃이 피며 높은 지대에서 잘 자란다는 설명을 보니 다른 지역에 비해 높은 곳에 위치한 우리 동네에서 주로 볼 수 있는 꽃인 것 같아 홀로 감회 로워 진다.


비단 들꽃뿐만이 아니다. 작은 동네 산책로에서 산책 시간대가 겹쳐 여러 번 만난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겨울 내내 같은 옷만 입고 개를 산책시키던 옆 건물 총각의 옷이 밝고 얇은 재질의 옷으로 바뀐 것을 보아하니, 5월에 피기 시작한다는 꽃들처럼 사람들도 봄이 시작되면서 몸과 마음이 화사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로맨티스트 체코인들이 길가에 심어둔 꽃들

체코, 아니 유럽 사람들은 꽃을 좋아한다.

모든 상점이 셔터를 내려야 하는 강도 높은 락다운 기간에도 꽃집만은 예외이다.

모든 것이 불허된 코로나 락다운 시대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을 상징하는 장미 한 송이가 우리에겐 필요하다.

인간의 존엄이라는 다소 거창한 상징적인 의미를 떠올리기보다는 유럽 사람들의 일상에 가까운 꽃을 나도 자주 사려고 노력 중이다.


작고 소중한 것들을 바라볼 때 우리의 딱딱하고 악했던 마음이 작고 말랑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산책길의 동무, 커피 한 잔

느리게 걸으면 만나는 사람들과 풍경들.

오랜만에 만나는 맑은 날이라 다른 사람들도 산책로에 나와 비타민을 흡수하고 있다.


더워서 팔을 걷어올린 앙상한 팔을 보니 '세상에 이게 뭐지... 마른버짐인가?!' 하는 의심이 들만한 하얀 피부 부스러기들이 눈에 띄었다. 그렇구나 나는 곰팡이가 피고 있었구나.

겨우내 더욱 창백해진 피부를 소독 겸 노릇하게 익히는 시간을 가져보려 했지만 벤치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실제로 정수리에서 노릇하게 계란이 익는 냄새가 느껴져 급하게 나무가 우거진 숲길로 발길을 돌렸다.




봄바람은 살랑살랑 불지만 뙤약볕 아래를 오래 걸으니 겨드랑이와 목덜미에서 땀이 스멀스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쯤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코스로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걸어온 만큼 다시 되돌아 가야 하기 때문에 여기서 방향을 돌려야 했지만 오랜만의 좋은 날씨 탓인지 내 발길은 자꾸만 숲으로 숲으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갈 힘은 남겨둬야 하는데...




누군가의 뒷마당의 백마들

짧은 동선으로 돌아올 요량으로 슬리퍼를 신고 나왔는데, 봄햇살과 흔들리는 연둣빛 나뭇잎에 홀려 길고 긴 산책길 동선이 되어 버렸다.

'산책이라고 함은 정해진 목적 없이~ 밤낮도 잊은 채 지갑도 잊은 채 짝 안 맞는 양말로~'

자연스럽게 길어진 산책길에 자연스럽게 입으로 흥얼거리게 되는 노래를 부르다 보니 내가 속한 도시의 경계가 끝나는 표지판이 서 있는 큰숲길 산책로까지 들어와 버렸다.




숲길로 들어서는 입구

의도치 않게 길어진 오늘자 산책의 끝에 봄을 예찬하는 일기 한 페이지와 슬리퍼의 코르크 바닥에 학대당한 딱딱해진 발바닥이라는 결과물이 남겨졌다.

봄날의 산책처럼 한 줄의 글을 남기는 일도 이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끝이 어딘지도 모를만큼 술술 써지면 좋으련만, 오늘도 강아지 눈총에 부랴부랴 끌려 나오는 집사처럼 쥐어짜서 나온 기록은 아니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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