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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하태평 May 16. 2019

딸에게 쓰는 편지 39; 영화 <미성년>을 보고


사랑하는 딸!

네가 영화 <미성년>을 보라고 권한 게 오래전인데 어제서야 영화를 봤어. 이전에 네가 아빠한테 영화를 권한 적도 없고 영화에 대한 저널의 평도 좋았기 때문에 그때 바로 달려가서 봐야 정상이지만 아빠는 보지 않았지.


“아빠는 절대로 그런 영화 안 보지. 못 봐.”


농담처럼 이유를 말했지만 사실 진심이 담긴 농담이야. 아빠는 다른 분야에서 활약하다가 그 명성을 가지고 영화감독을 하는 사람들을 싫어한다, 그 사람들이 만든 영화도 보기 싫다, 자존심이 상한다... 뭐 그런 얘기였지.


모든 것을 걸고 인생을 바쳐서 감독 일에 몰두해 온, 그러나 결국 감독이 되기에 실패한 속 좁은 사람의 넋두리라고 해도 할 수 없어. 영화가 좋고 나쁘고에 상관없이 일단 배가 아프니까. 가슴이 쓰리니까. 자괴감에 빠져 허우적거리기 싫으니까.


그런 마음이 전혀 없었다면 거짓말이지만 농담이었던 건 사실이야.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찰리 채플린이 말했다고 하는데, 그 말에 대입하면 아빠는 아빠 인생을 멀리서 보게 되었다고 할 수 있지. 농담을 한다는 건 이젠 그렇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영화는 나쁘지 않았어. 지루하지 않게, 재미있게 봤어. 아빠가 영화에 대해서 이 정도 말하면 칭찬에 속한다는 건 알지? 아빠는 대부분의 영화를 지루해하니까. 아빠가 재미있게 봤다는 것은 꽤 솜씨 있게 이야기를 꾸몄다는 말이야. 시나리오도 좋았고, 배우들 연기 앙상블도 괜찮았어. 문제는 감독으로서의 김윤석이 어떠한가 하는 거야.


이다혜 ★★★☆ (7) 배우들의 앙상블을 보는 굉장한 재미, 연기자-연출가의 힘

김현수 ★★★☆ (7) 그가 연기했던 수많은 악한들이 잘못했다고 비는 것 같다

임수연 ★★★★ (8) 이야기의 야심을 줄이자, 더 돋보이는 연출력

김혜리 ★★★ (6) 남성 배우/감독의 기대를 넘어선 균형과 객관화

박평식 ★★★☆ (7) 앙상블, 디테일, 유머. 아마도 올해의 데뷔작

이용철 ★★★★ (8) 당신, 정말 얄밉다

이화정 ★★★☆ (7) ‘감독 김윤석’의 리듬, 호흡, 시선이 읽힌다. 차기작을 기다리게 만드는 감독

장영엽 ★★★☆ (7) 누구 한 명에게도 소홀하지 않는다. 배우를 잘 아는 사람이 만든 영화

이주현 ★★★☆ (7) 배우들에게 자리를 양보한 연출

허남웅 ★★★★ (8) 김윤석의 다른 면모‘들’

  --‘씨네 21'에서


전문가들이 이 정도로 일치된 찬사를 보내는 작품도 흔치 않아. 대중성은 몰라도 전문적 예술성은 객관적 인정을 받았다고 봐야지.


아빠가 굳이 위의 예를 든 것은 대체로 감독으로서의 김윤석을 칭찬하고 있기 때문이야. 아빠는 영화 <미성년>이 괜찮은 작품이라고 생각하지만, 감독의 연출력이 특별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미숙하다’고 생각해.


사실 이 부분은 오해의 여지가 있어. 왜냐하면 <미성년>이 전반적으로 특별히 중대한 결함을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위의 예시처럼 많은 전문가들의 찬사를 받기 때문에 내가 ‘감독이 미숙하다’고 말하면 욕먹거나 비웃음을 당하기 십상이지. 너만 해도 ‘질투하는 거 아냐?’라는 생각이 들지 않니?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성격.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말하듯이, 이렇게 너에게라도 말을 해야지.


전문적인 감각이 필요하고 증명하기도 쉽지 않은 부분이라 예를 들어 설명할게. TV에서 가수 오디션 프로그램 많이 하지? 모두 뛰어난 노래실력을 자랑하는데, 어떤 경우 미세하게 음정과 박자를 놓치는 사람이 있어. ‘미세하게’라고 말하지만, 사실 감각적으로 느끼는 거라 증명이 안되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맞다’고 느끼지만 예민한 사람의 귀에는 어색한 거야.


물론 정확한 박자와 음정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냐. 음정이 틀려도 멋진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많지. 일부러 음정과 박자를 자기 식으로 부르는 사람은 칭찬을 받아. 개성이 있다는 거지. 문제는 자기 개성으로 부르는 것도 아니면서, 정확한 음정과 박자로 노래를 하려는데 맞지 않는 경우야. 누구나 노래를 부를 수는 있지만, 막상 노래를 잘 부르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워. 훈련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예술가적 솔직함이 있어야 돼. 자기의 개성을 드러내야 한다는 말이지.


두 갈래의 길이 있어. 하나는 ‘작가’라는 이름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장인’이라는 이름의 길이야. 간단히 작가는 개성이 강한 작품을 만들고, 장인은 기술적 완성도가 높은 작품을 만든다고 정리를 하자. 작가이면서 장인이기도 한 사람을 ‘대가’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홍상수 감독은 작가, 봉준호 감독은 장인, 그리고 임권택 감독은 대가라고 할 수 있어.


내가 감독으로서의 김윤석을 문제 삼는 이유는 두 갈래의 길 앞에서 입장이 명확하지 않다는 거야.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는 걸까? 그건 불가능한 길이야. 둘 중 어느 한 길을 갈 때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지 처음부터 다 잡으려고 하면 실패할 게 뻔해. 사는 거 되게 빡세거든.


아빠의 바람을 말하자면, 나는 김윤석이 좀 더 확실하게 작가의 길을 선택했으면 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뚝심 있게 밀어붙이거나, 자기 개성을 확실히 드러내는 솔직함을 가지라고 말하고 싶어. 첫 작품에서 이 정도의 균형감각을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이면 좋은 출발이지. 여기에 자신의 개성을 가지고 자신의 박자로, 자신의 음색으로 노래를 부르기만 한다면 정말로 좋은 감독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기술을 익히는 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거든. 김윤석씨, 연세도 적지 않은 걸로 아는데.^^


사랑하는 딸!

사실은 이 이야기를 하려고 편지를 시작했는데 서론이 길어졌네? 아빠가 영화 <미성년>에서 제일 좋았던 장면, 바로 그 충격적인 마지막 장면이야. 근래에 본 영화 중에 <어벤저스: 인피니티 워> 이후 가장 당황스러운 라스트였어.


사이좋게 초코우유와 딸기우유에 가루를 타서 나눠먹는 이 마지막 장면을 예상한 사람은 없을 거야. 그런 점에서 일단 감독의 의도는 성공을 했다고 봐야지. 영화의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가 ‘관객의 예상을 벗어나기’이기도 하니까.


사실 관객과의 싸움은 모든 영화의 핵심적인 과제야. 문학이론에 ‘기대 지평의 파괴’라는 게 있는데, 쉽게 말하면 관객의 예상을 깬다는 거지. 예상대로 되거나 너무 예상에서 벗어나도 재미를 느끼지 못하지. 적절하게 관객의 예상을 어긋나게 이야기를 끌어가는 것이 흥미를 유발하는 중요 포인트야. <미성년>은 ‘서프라이즈’라고 할 만큼 훌쩍 관객의 예상을 벗어나는 결말을 보여줘. 어떻게 보면 엽기적이라고 할 수도 있으니 사람에 따라 기호가 갈릴 수 있을 것 같아.


아빠는 좋았어. 그리고 그 정서가 영화의 핵심이 되었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랬다면 단순한 서프라이즈가 아니라 감동을 주는 그런 라스트 씬이 될 수 있었을 거야.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마무리가 되니까. 그런데 전체적 정서가 통일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놀람 표과 정도밖에 주지 못하는 거지.


내용상으로 이보다 더 좋은 마무리가 있을까 싶어. ‘미성년’이란 ‘아직 성년이 아니다’라는 뜻이지. 영화를 보면 ‘미숙한 성년’이라는 말이 생각나지만, 시점이 고등학생인 두 친구에게 있으므로 지워버리자. 영화는 명백하게 미성년자인 두 친구에 관한 이야기니까.


어른들은 미숙해. 아니 미숙하다기보다는 모자라다고 해야 되겠지. 다시 말해 ‘지금 사회는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게 영화의 기본 생각이야. 그리고 잘못 태어난 아이는 그런 기성세대의 결과물이지. 고장 난 기성세대와 잘못 태어난 동생 틈바귀에 두 친구가 있어. 그들은 지금  고통받고 발버둥 치면서 성장하는 중이지. 영화 <미성년>은 그런 성장과정의 성장통을 보여주고 있어. 심각하지 않고 유머러스하게.


그리고 영화의 라스트 씬은 그들 미성년의 각오를 확실하게 보여줘. 우리는 하나라는 연대의식, 어른들의 실수와 실패를 잊지 않겠다는 다짐, 그 실패를 거울삼아 잘 살아내겠다는 각오, 다시는 자신들의 미래를 죽게 하지 않겠다는 선언... 이 장면보다 더 멋지게 마무리를 한 영화가 또 있었나 싶을 정도야. 이 장면이 낯설고 거부감이 들게 되는 것은, 이 장면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이 장면까지의 길이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어쨌든, 이런 마무리를 만들어낸 감독과 작가에게 감사를~~!

  --- 딸의 추천영화를 보고 숙제 끝낸 듯 개운해진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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