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한 지 20년이 넘어가니 여편과의 관계가 많이 편해지고 자연스러워졌다. 모든 것이 마음에 든다는 건 거짓말이지만, 좋건 나쁘건 별 상관없이 받아들이게 됐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하나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가 인생의 진행과정이라면, 이제 겨우 제가(齊家)의 단계를 지나고 있다고 할까?
생각이 같은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지만, 동반자적 관계인만큼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꾸려나가면 되니까. 이해와 절충의 과정도 하나 됨에 있어서 꼭 필요하고 중요한 대목이다. 하나된다는 것이 ‘서로 같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소통과 조화’가 오히려 하나됨의 핵심 요소이다.
그래서 웬만한 것은 별로 거리낌 없이 얘기를 하는 편이다. 좋아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아! 싫어하는구나.’ 하고 받아들인다. 내가 워낙 주책없이 아무 말이나 한다고 구박을 당하기도 하지만, 상대를 해치는 말이 아니면 굳이 안 할 이유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도저히 얘기를 거들 수 없는 게 홍상수 감독에 대한 것이다. 우리 여편은 홍상수 얘기만 나오면 알레르기적 거부감을 보인다. 원래 그의 작품들도 좋아하지 않았지만, 최근에 김민희와의 연애에서 비롯된 이혼소송 등의 과정에 대해 거의 혐오에 가까운 감정을 갖고 있다. 나는 개인적 연애사인만큼 별 문제없다고 생각하는데, 여편의 태도가 워낙 완강하여 말을 붙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작정하고 싸우자는 게 아니라면 입을 다물어야 한다.
그러나 그냥 입을 다물고 있자니 억울했다. 홍상수는, 적어도 내게 있어서 홍상수는 대단한 사람이다. 조금 과장하자면 그는 위대한 사람이다. 그 위대한 사람이 무시당하는 것이 나는 억울하다. 그를 싫어할 수는 있지만 무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래서 나는 여편 몰래 (알면 그따위 인물을 두둔한다고 짜증낼지도 모른다) 홍상수의 위대함을 변호하려고 한다.
알다시피 홍상수는 김기덕과 더불어 대한민국의 대표적 예술파 영화감독이다. 하지만 나는 홍상수가 예술영화 감독으로서 그렇게 대단한 성취를 했다고(혹은 하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홍상수는 예술영화 족보로 치자면 초급, 혹은 초단 정도의 위치에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물론 내가 초단을 우습게 보는 것은 아니다. 프로 바둑기사는 초단이라도 9단과 똑같은 대접을 받고 싸우며 때로는 이긴다. 입신이라 불리는 9단과 동격이라는 말이다. 초급 예술가이건 대가급 예술가이건 예술가는 예술가다. 애기 호랑이건 늙은 호랑이건 호랑이는 호랑이다.
그나마도 내가 인정하는 것은 <해변의 여인>(2006년)까지다. <해변의 여인>은 홍상수 영화의 절정이다.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생기와 진실이 느껴진다. 그 이후로는 뭔가 핵심이 빠져버린 느낌이다. 다소 지루한 자기 복제...?
영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므로 그만 하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홍상수의 시스템에 대한 것이다. 홍상수는 자신의 시스템을 완성한 사람이다. 이 험한 자본주의 세상 속에서 그는 오롯이 자기를 위한 세계를 만들어냈다. 영화 속의 세계, 작품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생활 속에 펼쳐지는 진짜 리얼 현피로 굳건한 자신만의 성을 완성시켰다. 지금 이 지구 상에, 아니 전체 영화 역사를 통틀어서 자신이 원하는 영화를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대로 만들어낸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는 거의 없다고 보는 쪽이다. 영화의 내용과 상관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홍상수는 위대한 사람이다. 세상의 흐름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세계를 지켜나간다는 것은 자신이 세상의 주인임을 자각하고 있다는 말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자존심을 잃지 않았다는 뜻이다.
물론 그 나름의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농부가 자연과 싸우며 농사를 짓듯이, 그도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며 영화를 만들고 삶을 살아나갈 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중요한 것은 홍상수는 자작농이라는 사실이다.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이 노력한 만큼 결과를 만들어낸다. 남의 간섭이 없고 임대료도 없다! 그는 자본주의라는 오염된 연못에 피어있는 아름다운 연꽃이다!
다소 과장되게 말한 것을 용서하시라.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자신의 세계를 완성하기 위해 열심히 살아감을 알고 있다. 이미 완전한 성취를 이룬 사람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작은 월급, 조그만 가게를 꾸려가면서 꽃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마치 홍상수가 유일한 영웅인 것처럼 떠벌인 것은, 단지 그를 부정하는 우리 여편에 대항하려는 나의 소심함 때문이다.
물론 홍상수의 성공은 절반의 성공이다. 나-가정-직업-세상의 연결고리가 끊어져 있다. 나-직업의 관계는 공고할지 모르나 가정과 세상은 상당 부분 그에게 적대적이다. 우리 여편이 홍상수를 반대한다는 것은 그만큼 홍상수의 세계가 불완전하다는 뜻이다. 그만큼 세상과 홍상수가 불화하고 있다는 뜻이고, 미완성이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홍상수의 세계를 옹호하는 이유는, 우리 여편에게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면서 편드는 이유는 홍상수의 경우가 앞에서 말한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 중에서 ‘치국(治國)에 성공한 예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나- 가정- 직업- 세상의 연결고리 중에서 ’직업‘의 단계를 완전히 독립적으로 통제할 능력을 갖추었다는 말이다. 나는 그러한 홍상수의 성취가 부럽고 대견하다. 그의 영화적 성취보다도, 나는 그의 영화 시스템적 성취가 더 훌륭하다고 본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자신만의 태양계를 완성했다. 태양이 자신을 중심으로 소우주를 완성했듯이, 홍상수 역시 자신을 중심으로 작은 세계를 완성해 냈다. 그는 외부의 도움 없이, 간섭 없이, 스스로 자전하고 공전한다.
나는 홍상수의 그러한 주인의식, 독립정신을 높이 평가한다. 영화 한 편에 수백억의 돈과 수백수천 명의 스태프 캐스트가 필요한 요즘, 그는 최소한의 경비와 인원으로 영화를 만들어내는 시스템을 찾아냈다.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정도의 객관적 상황 안에서 그는 살아간다.
반면 우리는 자주 그걸 잊는다. 우리가 우리 인생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이 세상은 내가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꾸 까먹는다. 아무리 밖에 펼쳐진 세상이 멋지고 대단해 보여도, 우리는 그게 ‘꿈이고, 환상이고, 물거품이고, 그림자같은(如夢幻泡影)’ 것임을 알아야 한다. 내가 허락하고 인정한 것만 내 세상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내가 지금 이 순간 전권을 가지고 있음을 자꾸 되새겨야 한다.
홍상수란 무엇인가? 그는 싸우는 사람이다. 전사다. 시간과 싸우고, 진짜처럼 우리를 현혹하는 이미지와 싸우고, 습관과 도덕에 붙잡히지 않으려고 싸운다. 자신이 주인공인 세계를 침범당하지 않기 위해 저항한다. 내가 비록 그의 삶의 형태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의 영화 세계를 좋아하지도 않지만, 나는 살아가는 그의 태도를 지지하고 응원한다. 지구 상의 모든 사람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그 날까지, 우리도 홍상수처럼 자신의 세계를 완성하기 위해 싸워나가야 한다. 우리를 소모되는 부속품으로 만드는 세상에 분노하고, 우리를 주인이 아닌 종속자로 세뇌하는 기존 질서에 저항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삶의 주인일 권리와 의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