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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아수 Jan 02. 2024

나는 치료자인가, 상담자인가

브런치를 꾸준히 적어보겠다고 마음먹었는데, 현실에 업에 쌓여 뒤로 미루다 보니 결국 이렇게 많은 시간이 흘러갔다. 내가 가진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으니, 작년 한 해는 그것들을 전부 상담센터에 쏟아부은 까닭이리라. 그래도 잘한 선택이었다. 그래, 당당하라 자영업자여. 


하루하루 경력과 업력이 쌓여가고 있다. 나름대로 눈문도 책도 열심히 읽고, 최신 이론에 뒤처지지 않겠다며 워크샵도 들으러 다니고, 진화하기 위해 노력하며 산다. 

그러나 누군가 나더러 그중 어디서 가장 많은 것을 배우세요, 라고 묻는다면 이제 내 답은 정해져 있다.

내담자로부터 가장 많이 배운다.

진실이다. 



상담이란 무엇일까, 종종 생각해 보게 된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막 심리학 뽕에 취해있던 시절에는 요상한 틀에 갇혀 있었다. 어떤 심리학적 기법, 연구로 증명된 그 기술들이 마치 내담자의 마음에 들어찬 병균체를 쏙쏙 끄집어내서 시원하게 처리해 낼 수 있는 약물과 같이 생각되었달까. 


이런 병에는 이런 치료가 좋아, 이 치료에는 이러이러한 기법이 있지, 그 방법을 그대로 적용하고 반복하게 하면 좋아질 거야. 정해진 레시피만이 불변의 진리인 것만 같던, 내가 만들어낸 환상에 갇혀 있었다고 해야 하나.


물론, 저명한 치료이론들을 빠짐없이 공부하는 건 기본적인 일이다. 기본도 없이 시작했다가는 위험해진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경험을 통해 그것에 대해 본질적으로 깊이 이해하고 발전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치료의 창시자들 또한 그랬듯이.


내가 해야 할 것은 지식을 탄탄히 쌓아두고, 나만의 경험을 얹어 그것을 끝없이 발전시키는 일이었다. 

만들어낸 질병의 틀에 갇히고, 정해진 답이 존재할 것이라 여기며 반복하는 것이 아니고.


결국 그 과정은, 나 자신을 유연하게 만드는 과정이기도 했다. 

수많은 치료 기술 또한 누군가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사유한 결과이니까, 나도 끝없이 사유하고 나의 세상을 말랑하게 넓혀가야만 하는 것이었다.


왜냐, 상담에는 정해진 답 같은 것은 없으니까.


우리는 병으로 사람을 분류하고, 또 성격의 유형으로 사람을 분류하고, 분류하기를 참 좋아하지만. 

(물론 공통적인 접근 요인을 찾기 위해 기본적으로 이 분류는 중요하다..)


그것만으로는 답을 찾을 수 없다. 100명의 우울증 내담자는 모두 다 다른 사람이다. 각자의 역사와, 각자의 이야기를 가진 완연히 다른 사람들이다. 


그러니 A에는 B를 적용하면 다 해결돼! 하는 답 같은 것은 없다. 우리는 그런 걸 MAGIC이라 부른다.. 호그와트에서나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그걸 온 마음을 다해 깨닫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아니 이건 마술인데..



대학원 시절에 한 교수님께서 '치료 기법은 지금 배울 필요가 없다, 이론을 탄탄히 알아두는 것이 더 중요하다'라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있다. 당시에는 그 말이 완벽하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심리치료를 하려면 그런 기술적인 요소들이 꼭 필요하지 않나? 우리는 그런 기술을 통해서 사람을 변화하고 성장하도록 돕는 직업인이 아닌가? 불안할 때는 이렇게 이렇게 하면 돼요! 그럼 해결되는 것이 아닌가?


그 말씀을 들은 지 10년이 지났다. 이제야 제대로 이해가 간다. 우리는 인간에 대해 그보다 더 깊이 이해해야만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래, 말 그대로 불안하면 A를 하면 된다고 하자. 그러면 인터넷과 책을 통해서 그 방법을 알아냈는데도 해결되지 않는 사람은 왜 그런 걸까? 누군가가 A를 시작조차 하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마음에서 A를 거부하는 사람은 왜 그럴까? 그 이유 또한 모든 사람이 같을까? 한 개인의 역사와 이야기에서 벗어난 채로, 그저 그렇게 모두 같다 이름 붙이고 끝내도 되나?


A라는 확실한 답이 있다는 환상은, 어쩌면 치료자의 불안과 함께 간다. 

이 문제를 내가 온전히 해결해주어야만 할 것 같은 데서 오는 압박감과 긴장감, 그래서 이 사람이 겪는 어려움에 확실한 해결책이 되어줄 답이 있기를 바라는 염원, 그 끝에 환상이 있다. 



이건 모든 게 싹 나아지는 문이야. 여길 지나가면 건강해지지.. (이런 사람 믿지 마세요)





얼마 전 애도상담 워크숍을 들으면서 강사님으로부터 들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애도상담의 기본은 내담자와 그 애도의 과정을 함께 견뎌주는 것이라고. 


이렇게 생각하면 심리치료라는 단어보다 심리상담이라는 말이 주는 느낌이 더 마음에 든다.

치료라는 단어는 어쩐지, 내담자와 치료자의 관계가 적당히 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준다. 본질적으로 관여하기보다, 거리를 넓히려 애쓰는 느낌을 받는다. 그가 빠져있는 늪에 함께 뛰어들어 흙탕물도 맞아가며 물을 건너가는 과정을 함께 한다기보다, 웅덩이 곁에 멀찌감치 서서 이렇게 저렇게 해보세요, 하고 코칭하는 느낌이 든다. 


나도 웅덩이 곁에 서서 코칭할 때는 상담에 에너지가 덜 들었다. 

지금은 심리학자로서 익히고 배워온 경력이라는 단단한 부츠를 신은 채로 진흙을 함께 밟는다. 이 방비 덕분에 나는 이 늪에 함께 빠지지 않으니, 염려하지 마시라고 당부하며. 내가 당신과 함께 이 늪을 건너가며 함께 방향을 찾아보겠다고. 


이 과정이 웅덩이 곁에 서있을 때보다 배로 힘들다. 그래서 내담자를 무리해서 많이 받지 않는다. 내가 함께 건너가고도 몸이 상하지 않을 만큼만 받는다. 그래야 내가 제대로 된 상담자로서 일할 수 있다. 


상담이란 무엇일까. 내가 아는 것이 진리도 아니다.


매일 배운다. 내담자로부터.

그 관계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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