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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별오름에 오르다

by 레알레드미
샛별이 잠든 푸른 능선을 춤추며 걸었다. 너와 정상에서 왈츠를 춘다면 행복할 거야. 우리가 정상에 이르자 사방이 탁 트인 정경속에 좀처럼 울지 않을 씩씩한 능선이 와락 안겨오는 것이었다.


새별오름은 둥근 능선을 따라 자란 풀들이 멀리서 보면 융단처럼 보여 정상에서 굴러내리면 폭신폭신하게 감싸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가까이 가자 웃자란 풀들이 사람을 파묻고 시치미 떼도 모를 높이였다.


오름은 가마니에 철심을 박아 계단을 만들었다. 양쪽에 기둥을 박아 로프를 연결하여 만든 난간도 있었다. 중간쯤 오르자 고소공포증이 느껴져 난간의 로프에 의존해 걸었다.


새별오름은 "새벽하늘에 샛별과 같이 외롭게 서 있다"는 뜻에서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나는 새별오름이 별이 잠들어 있는 푸른 능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푸른 이불을 덮고 오수를 즐기다 밤이면 초롱초롱 빛나는 별들의 잠자리가 도는 그런 곳 말이다. 그 위를 걷고 있으니 내 걸음이 왈츠의 음표가 된 듯했다. 사뿐사뿐 즐겁게 춤추듯 나아갔다.


한여름에 이 새별 오름을 오른다면 더위를 피할 나무 그늘이 없어 참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다. 구름이 알맞게 그늘을 만들어 준 참 좋은 때에 새별오름을 오르게 되어 너무나 기뻤다.


처음에 가려던 식당들은 휴무일이라 인터넷 지니에게 근처 맛집을 검색하게 했다. AI가 나의 생활에 편리함을 입증해 준 순간이었다. 평점이 높고 제주도에서 먹어본 적이 없는 옥돔구이라 주저 없이 녹색식당에 가기로 했다.


사장님이 이곳에 온 적이 있냐며 반갑게 말을 거셨다. 석은 "언젠가 우리도 모르게 다녀간 적이 있었을 수도 있다."라고 대답했다. 스스로의 선문답에 만족했는지 석이 씩 웃는다. 나는 '뭐야, 사기꾼처럼 말을 잘도 꾸며댄다.'고 생각했다.


사장님은 점심 장사만 하고 저녁에는 가족들과 맛집 투어를 다니는 게 취미라고 하셨다. 밤낮없이 장사하여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좋지만, 일하다 번아웃에 걸리거나 몸이 아픈 것보다는 행복하고 재미있게 일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인생 총량의 법칙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잦았다. 기계가 튼튼하고 단단하다고 계속 쉼 없이 돌리면서 일을 시키면 일찍 고장 나게 되어 있다. 사용하면서 기름칠도 하고 쉬엄쉬엄 일을 시켜야 더 오래 사용할 수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니 여행하면서 글을 쓰는 힐링하는 삶을 살고 싶다


식당을 나서는데 비가 왔다. 석이 비가 오니 카페를 가자고 했다. 제주까지 왔으니 카페에서 분위기를 잡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너무 힘들게 걷기만 했으니 시원하고 쾌적한 장소에서 말없이 앉아 있고 싶었다.


천주교 제주교구 용수성지 옆 해변이라는 카페에 갔다. 카페 2층의 넓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바다는 에메랄드를 품은 회색빛이었고, 하얀색 보트가 떠 있었다. 보트의 이름은 차기도였다. 이별의 사연을 바다에 벗어놓고 떠난 사람들을 생각했다. 보내지 못한 미련이 울컥울컥 파도에 사무치면 제주의 게으른 하늘은 수평선을 덮어쓰고 바닷속 잠자리에 든다.


비 오고 흐린 제주에서 사랑은 이별 때문에 몸져 앓아누웠다. 애증의 게거품이 수평선으로 달려갔다. 어떤 무위는 슬픔의 무한 반복이라 죽음보다 더 처절하다. 잊으려 애쓰는 고통은 두터운 바다를 덮어써도 울컥울컥 눈물을 쏟고 지평선은 위로의 말을 잊은 듯 희미해진다.


카페 안에 흐르는 외국 팝송은 가사를 알 수 없어 좋았다. 멜로디만 들리는 것이 이 분위기에 딱 안성맞춤이다. 때론 멜로디만으로 캔버스의 바탕이 되고 의도한 그림이 아닌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카페 창밖을 서성이는 빗방울은 가사를 알 수 없는 이 음악을 입었다. 멜랑꼴리아, 멜랑꼴리아, 비가 내린다.


밖에 우비를 입고 걷는 사람을 보고 내가 석군에게 아버님이 주신 우비에 대해 물었다. 그랬더니 석군은 아버님이 주신 우비는 값비싼 K2 브랜드지만 입어보니 두껍고 무거웠다고 했다.


예전엔 물건들이 무거워도 영구적으로 쓸 수 있는 장점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무겁고 견고한 제품들이 값비싼 고급품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요즘은 가볍고 실용적이며 내구성이 좋은 제품이 비싸게 팔린다. 석이 자기처럼 작고 아담한 사랑은 K2 우비보다 가볍고 실용적인 비닐우비가 더 낫다면서 이런 비는 맞아도 상관없을 것 같다고 했다. '하하하, 본인이 본인 입으로 작고 아담하다니. 석은 소크라테스의 후예가 맞다. 자신을 잘 알고 있으니...'


한국남부발전 국제풍력센터에 차를 세우고 해안 데크길을 걸었다. 바람이 분다고 풍차가 일제히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다. 바람구멍이 제각각 달라 자신에게 불어오는 바람에 움직이고 있어서 어떤 풍차는 쉬고, 어떤 풍차는 움직이고 있었다.


풍차를 보면서 저마다 다른 구멍으로 바람을 들이고 제각기 움직이는 석군과 나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았다. 서로 제각기 움직이는 것을 틀리다고 생각하면 다투겠지만, 다름을 인정하면 두 배의 효율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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