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툼은 항상 아주 사소한 일에서 시작된다. 양말을 뒤집어 놓거나 말꼬리에 느껴지는 비난이 한 끗 차이로 감정에 균열을 일으킨다. 있은 힘을 다해 싸워야 할 그런 문제가 아닌 하찮은 일로 핏대를 올린다. 내 마음속 지뢰를 용케도 찾아내어 폭발시키는 당신은 원수가 분명하다. 하지만 현생에서 이 지뢰를 다 제거해야 해탈할 수 있다면 당신은 마냥 미워할 존재는 아닐 것이다. 아! 나를 열반의 경지로 몰고 가는 번뇌의 시작. 당신은 나의 죽비가 분명하다.
맑음은 파란색 볼펜으로 폐기물 스티커를 쓰고 있었다. 식탁에서 물을 마시던 치열이 맑음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한 마디 했다.
"기본도 없이 누가 이런 스티커를 파란색 볼펜으로 쓰냐?"
그 말을 들은 맑음은 어이가 없었다.
"기본이 없다니 기본이 뭔데?"
"당연히 이런 건 검은색 볼펜으로 써야지." 치열이 빈정거리며 자신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자 맑음은 열이 받았다.
"검은색 볼펜으로 쓰라고 법으로 정해져 있어? 난 그런 말 들은 적이 없는데."
"누가 말하지 않아도 기본은 당연히 알고 있어야 되는 거지. 가르쳐 주어야 안다는 건 상식밖이야. 폐기물 스티커엔 검은색이 기본이야."
"필기할 때 검은색만 쓰진 않잖아. 파란색도 자주 쓰이는 색이야. 두 색은 서로 보완하며 번갈아 쓸 수 있는 색이라고."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야? 나는 검은색과 파란색을 보완하며 번갈아 쓴 적이 한 번도 없어. 모든 일반적인 상황에는 당연히 검은색을 썼지. 당신이 사리분별 못하고 파란색으로 쓴 걸 기본이라고 우기면 안 되지."
"무슨 색으로 썼건 수거하는 내용만 기재하면 가져가게 되어있는데 굳이 내 기본기를 따지는 저의가 뭐야?"
"나니까 당신한테 잘못을 지적하는 거지. 폐기물 수거 담당이 기본이 안된 집안에서 나온 쓰레기는 격식도 갖추지 못했구나 하면서 무식하다고 무시한다고."
그의 빈정거림을 맑음을 불쾌감과 수치심이 들었다. 맑음은 이사하는 과정에 짐을 싸고 버리는 잡다한 일에 손 끝 하나 까딱하지 않다가 이상한데 필이 꽂혀서 자신을 들볶고 무시하는 치열이 꼴도 보기 싫었다.
"당신은 내가 이삿짐 싸면서 전전긍긍할 때 도움을 줄 생각은 않다가 이런데 태클을 걸고 싶어? 파란색을 쓰던 검은색을 쓰던 내 맘이지. 이런 일이 무시당할 이유도 아니고 난 무식하지도 않아. 그런데 당신이야말로 얼마나 나를 무시하면 그런 말은 하는 거야?"
맑음의 눈동자가 흰자위가 커지고 목소리가 카랑카랑해졌다.
"내 참 어이가 없어서 내가 언제 당신을 무시했다고 그러냐?"
치열이 언성을 높였다.
"많이 쓰이지 않아서 파란색이 기본이 안된다는 게 말이 돼? 다수결이면 기본이라는 거야 뭐야? 다수가 검은색을 쓴다고 무조건 옳은 건 아니잖아. 다수가 써도 안 쓸 수 있는 거지. 그걸 안 썼다고 기본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기본을 오해한 아주 위험한 발상이라고 난 생각해. 그건 기본을 침해할 수 있는 아주 독단적인 생각이라고."
"파란색으로 써놓으면. 폐기물 담당자에게 그게 보이겠어?"
"파란색이 왜 안 보여? 검은색보다 훨씬 잘 보이는구먼. 무슨 색이든 그게 뭐가 중요해? 스티커 내용이 맞는지가 중요하지. 당신이 나를 무시하니까 그런 생각을 한 거라고"
"또, 또 저런다. 잘 되라고 충고하면 그걸 꼭 고깝게 받아들여서 화내고. 그러니 넌 일생에 발전이란 걸 할 수가 없는 거야."
"그래 나 그런 여자다. 그걸 모르고 여태 살았나 보지. 그럼 그렇게 잘난 당신께서 검은색으로 써서 내놓으시던가."
맑음은 치열 앞에서 분이 풀리지 않는 손길로 스티커를 찢었다.
"그리고 말이야. 난 기본도 상식도 없는 여자니까. 이제부터 이삿짐은 당신이 싸. 나는 손끝하나 까딱하지 않을 거니까. 부잣집 도련님처럼 뒷짐 지고 무식한 하녀 부리듯 나 시킬 생각은 꿈에라도 하지 말고."
맑음은 치열이 보는 앞에서 안방문을 쾅 닫았다.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인 줄 알아. 나도 할 일 많다고. 기분 나쁜 척 일거리 떠밀 생각 꿈에도 하지 마." 치열이 의자를 걷어찼다. 의자는 쿵 소리를 내며 거실 바닥에 나뒹굴었다.
치열은 맑음이 조목조목 따진 것이 도전으로 여겨졌다. 열이 뻗친 치열은 닫힌 문 밖에 서서 맑음에게 "기본도 모른다." "자격미달이다. "상식이 없다."는 말로 맑음을 계속 자극했다. 하지만 문 안은 기척이 없었다. 닫힌 것은 문만이 아니었다. 맑음은 귀를 닫고 치졸한 치열의 행태를 용서할 자신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다음 날 치열은 맑음이 찢어버린 폐기물 스티커에서 자신의 무너진 위상을 보았다. 식탁 앞을 어슬렁거려도 맑음의 얼굴은 냉기로 가득 찼고 그에게 눈길조차 건네지 않았다. 치열은 이런 식의 냉전이 자신이 없었다. 맑음은 침묵으로 그를 꾸짖으면 답답해서 견딜 수 없었다. 치열은 틀리다와 다르다의 한 끗을 알지 못했다. 무슨 색을 쓰던 상관없으며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를 뿐이라는 걸 인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기싸움이 지속되면 자신의 입지만 불리하다는 걸 치열은 알고 있었다. 그는 맑음의 침묵을 깨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건 무조건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무조건 굽히면 만사형통이었다. 그러면 선량한 맑음은 마지못해 자신에게 져 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무조건 잘못했어." 치열이 말했다.
"그래서 뭐를 잘못했는데?" 그녀가 물었다.
치열은 그녀의 해답을 알지 못했다. 그것은 그에게 너무나 어려운 문제였다.
그녀는 그가 원하는 답을 내놓지 못해도 용서했다. 어차피 온갖 힌트를 줘도 그는 정답 근처도 가지 못할 것이다. 화성에서 온 남자에게 금성인 여자가 조목조목 자신의 심정에 공감하도록 가르쳐도 결국 이해는 물 건너 불구경일 것이다. 차라리 남편에 대한 입씨름을 포기하는 것이 정신건강상 좋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맑음은 지금의 이 포기를 배추의 포기라 여기기로 했다. 온갖 젓갈을 넣고 김장을 담가 묵히고 묵히면 그녀의 몸에서 사리가 나와 묵은지가 되리라. 치열과 사소하게 다툰 날 묵은지 찌개를 끓여 먹으면 썩어가던 속이 얼큰한 국물로 데워지리라.
부부는 전생의 원수가 만나 전생에 풀지 못한 원한이나 갈등을 풀라고 현생에서 만났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사소한 다툼도 도를 닦는 중에 깜빡 조는 나를 깨우는 죽비의 소리일 것이다.
맑음은 사소한 다툼으로 미워진 치열이지만 감정의 응어리를 없애 깊이 상처받지 않기로 했다. 용서도 질질 끌만한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맑음은 부부싸움이 왜 칼로 물 베기 인지를 알 것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