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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봉 Oct 19. 2019

호프

-시시(詩詩)한 이야기

  이상한 일이었다. 특별한 대화도 없이 그저 웃기만 했는데 가게를 나올 무렵 우리는 친구가 되어있었다. 가게를 나와서 안 일이지만, 우리가 걸어온 방향의 반대편-즉 입간판의 또 다른 면엔 역시나 아크릴로 크게 <호프>가 적혀 있었고, 그 아래 적힌 작은 영문의 <HOPE>를 우리는 볼 수 있었다. 난데없는 희망이 그토록 우리의 가까이에 있던 시절이었다.

  -박민규 소설, <죽은왕녀를 위한 파반느> 중


  개천절을 하루 앞둔 10월 2일 밤, 대학 친구들과 을지로에서 만났다. 이 신발과 바지 밑자락이 축축하게 젖을 만큼 비가 왔는데도 술집들은 붐볐다. 원래 가려던, 최근 인기라는 술집은 대기 줄이 긴 탓에 못갔다. 대신 비를 피해 무작정 들어간 그 옆집은 노포였는데 ‘호프’를 팔았다. 앉아서 후라이드치킨을 한 마리 시키고 “뭐 마실까?” 말 꺼내기 무섭게 주문받으시던 아주머니는 선제적으로

-호프로 드릴까요?

하여 우리는

=호..호프요? 네 호프로 500 3잔...

을 먹게 된 것이었다.


  일 하다 만난 사람들중엔 “호프 한잔하자”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대부분 열 살 이상 선배들이었다. 그럴 때마다 잠시 ‘호프’란 단어가 생경하다고 생각하다가 이내 맥주를 마시곤 했는데, 생각해보면 내가 마신 ‘맥주’와 그 사람들의 ‘호프’가 다른 것일수도 있겠다.


  그날 우리한테도 ‘호프’는 조금 난데없는 것이었다. 그래도 ‘호프의 일격’은 마냥 반가웠다. 그 술집에서 HOF와 HOPE는 ‘호프’로 분별없이 통일 됐다. 그래서 호프를 찾는 척 호프를 찾는다거나 호프를 찾는 척 호프를 찾는 일들도 가능한 게 저 술집의 미학이었다.


  저 호프집에서는 모두들 대놓고 호프!를 얘기했으므로 홀에는 이상주의자들만 한 가득이었고 모두들 호프!에 절었으므로 주정뱅이들의 향연이었다.


  맥주와 희망이 뒤죽박죽이 되어서 뒹굴어도 좋은 시절이었다. 우리가 그날 두 잔씩 마신게 어떤 호프인지는 서로 모른다. 다만 예상치 않은 곳에서 난데없이, 가까이 나타나는 희망이 참 달고 반가운 때였고, 덕분에 신이난 우리는 새벽 4시까지 술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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