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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텔라 OH Sep 22. 2023

바람처럼 흐르게 해

당신에게 미움받는 이유


명상에 대한 책을 읽는다.

사람들이 불안과 걱정에 사로잡히는 이유는 여기, 지금에 집중하지 못하게 때문이라 했다.

"여기 지금"에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나 "미래"로 그 무게 중심이 가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과거의 갈등과 고통을 불러일으키고 미래의 걱정과 불안을 당겨오는 것이라고 한다.


벌어진 하나의 사건이 곧 내 전체 세계인 양 휘둘려서는 곤란하며 그것은 사건이든 사람이든 마찬가지 결론이 된다. 즉 "나"와"여기, 현재"는 없고 "사건"만 있거나 그 사건 안에 들어있는 근심의 대상, 미움의 대상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꼴이리라. 나의 자아는 우주만 한데 길모퉁이 한 편, 실개천 하나에 몸을 빠뜨리고 허우적거리는 모양쯤으로 설명하면 될까.

자기중심적인 생각에서 벗어나는 디센터링(decentering)을 위해 요즘 나는 내게 끊임없이 말을 건다.

감정과 부정 정서에 치우치는 기억자아나 경험자아를 곧장 나의 세계로 연결시키지 않으려 애를 다.(화나 분노 없이 깔끔한 구도자의 성향을 지니게 되었다는 말이 절대 아니다. 예전보다 조금 더 나아졌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명상을 하면서 한 가지 부작용이 생겼다.






우리말과 정서에 그런 것이 있다. 어떤 언어를 떠올리면 인간 본능상 가지는 언어에 색을 입히는 짓(?)들!  어휘로 선과 악을 가르는 행위, 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언어에 대해 부정적 뉘앙스 혹은 긍정적 뉘앙스를 덧입히는 습성, 그것이 굳어지면 그 언어에 대해 더 이상 다른 생각은 못하는 약점.


예전에 나는 공감능력이 꽤 있다고 스스로 평가했다. 그때는 어쩔 수 없이 그 사람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되거나 그의 걱정이 내 걱정이 되는 것 같아 몹시 예민하고 마음이 쉬이 피로해졌다. 그래도 내 속의 "선의" 같은 것이 꿈틀거리는 징조라 생각해서 난 착한 사람 내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말이다.


그러나 요즘은 예전의 그런 나에 대해 묘한 의심이 든다.

이제껏 장점으로 여긴 그 공감능력이 어쩌면 "공감 능력"이 아닐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런 생각이 지금은 퍽 다행스럽지만 일면 씁쓸한 부분도 없지 않다. 공감력으로 오인한 감정의 실체를 알고나니 허탈하기도 하다


언젠가 tv에서 그런 말을 들었다. 기아에 허덕이는 아이들을 보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은 공감능력이 탁월해서가 아니라 "공감코스프레일 수 있다"는 말. 전문가의 말이니 아예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고 더욱이 명상과 객관화 훈련을 해나가는 지금 시점에서 더욱 이해가 되는 말이기도 하다. 누구나 딱한 사정의 연약한 대상을 마주하면 눈시울이 붉어지고 가슴이 먹먹하. 그러나 그 감정이 그 대상을 돕기 위한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거나 사건의 해결을 위한 작은 움직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누구나 공감 코스프레 일 수 있다고 했다. 이 이론이나 말에 시시비비를 가릴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내 상황에 비추어보면 일리 있는 말이다.


공감력 높다고 스스로 판단했던 과거 오은아는 어쩌면...

팔이 안쪽으로 굽는 것 같이 "아는 사람"이니 덮어놓고 당신의 편을 드는 것이 정의롭다고 생각했던 착한 사람 코스프레일 수 있고 좋은 사람은 응당 당신의 모든 마음과 말을 지지해야 한다는 삐뚤어진 감정 동조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되짚어본다. 전체 세계를 보지 못한 채 사건이 발생시킨 당시의 감정에 쉬이 빠지는 허약한 나에 대한 아름다운 변명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부작용을 고백한다.

더 이상 동조를 갈망하는 그 눈에, 자신의 상황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를 갈구하는 당신에게 예전과 같은  맞장구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사건으로 쏙~ 들어오지 못하는 나에게 서운함을 토로하는 일들이 속속 생겨난다. 그런데 난 차라리 당신의 미움을 사는 한이 있어도 사건과 사람과 말에서 단단하게 걸어 나오고 싶다. 


목구멍까지 차다 혀를 타고 나오는 말들을 멈추느라 애를 먹고 있다.


'거기서 나와'

'징징 거리지 마'

'사건에 매몰되지 마'

'바람처럼 흐르게 해'

'그리고 지금, 여기, 나!로 좀 있자!

'네 이야기에 더 이상 크게 동요되지 않아'

'미안한데 나는 더 큰 것을 보게 되었다'


런류의 생각이나 말이 내 속에서 생성되기 시작했다. 그럴지라도 당신에게 건너가서는 안될 말이기에 나는 나로서 감당하는 당신과 나 사이 괴 기꺼이 아프기로 했다.


아프더라도 더 현명하게 살아야 된다.

이제는...... 그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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