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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리썸머 Jul 09. 2023

1194

매일 그림일기

어렸을 때 다양한 신상아이템들이 우리 집에 제일 먼저 생겨나곤 했다.


건전지를 넣으면 열차가 달리며 360도를 회전하던 88 열차 장난감, 작은 월세방에 살았을 때도 우리 집에만 전화, 자동차 심지어 냉장고가 있었다고 했다. 앞집 옆집 아주머니들이 음식 몇 가지를 들고 와서 우리 집 냉장고 칸칸 자리를 대여하고 사용했다고. 처음 모토로라 폴더폰이 생겼을 때 텔레비전 광고에서 보던 걸 아빠가 집에 들고 오셔서 신기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사업하던 아빠 덕분에 이사 다니기를 수십 번, 성실하게 월급 받아오길 바랐던 엄마에게 아빠의 행동은 달갑지 않은 것이었을지 몰라도 한 번씩 우리를 데리고 나가 그 당시 가장 유행하는 옷으로 쫙 빼입게 해 주고 기분내주던 아빠가 100% 싫지많은 안았던 것 같다. 철도 없이.


아빠를 닮은 구석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느새 닮아 있는 나를 만난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삶의 많은 부분에서 아빠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새로운 것을 보면 먼저 해보고 싶고, 가지고 싶고,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했던 마음들이 지금의 내 삶의 태도와 많이 닮아 있었다. ‘아빠 때문에’만 가득하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아빠 덕분에’도 있었던 것이다.


노트북도 있고 휴대전화로도 충분한데 꼭 사야겠냐고 되묻는 남편을 설득해서 구매했다. 아이패드



그리고 꼭 필요한 것이었다고 말해주고 싶어서 더 열심히 사용했다. 하루에 하나씩 아이패드 사용영상을 찾아보며 기능을 익히고 실행해 보았다. 아이패드만 붙잡으면 어떻게 시간이 가는 줄 모르게 훌쩍 지나가 버리곤 했다. 그렇게 나는 새로운 것을 보면 갖고 싶고 배우고 싶고 그래서 내 경험으로 만들고 싶은 욕구가 컸다.


아이도 그렇게 키우고 싶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아이들을 많이 만나며 살기 때문일까? 하고 싶은 것이 없는 것보단 많은 것이 훨씬 더 좋은 거라고 생각한다. 무언가 아이가 하고 싶은 것이 생기면 무턱대고 막는 사람은 아니길 바랐다. 시도해 볼 마음도 생기지 않게 막아버리는 것이 훨씬 안 좋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꼭 필요한 것만 하고, 꼭 필요한 것만 사라는 남편과 다르게 지금 아직 무언가 경험해보고 해 봐야 아는 것들을 위해 시간과 돈을 써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나는 종종 의견이 맞지 않아 부딪치고는 한다. 그래도 하고 싶은 것이 많으려면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한다는 나의 생각은 절대 꺾을 마음이 없다.


그래서 먼저 그렇게 행동하며 살았던 것 같다. 배우고 익히는 데 마음과 시간을 쓰고, 배운 것을 경험한 것을 또 반복하고 나눠서 진짜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이 좋았다. 그리고 아이가 나에게서 물려받을 게 많지 않겠지만 그 삶의 태도는 물려받아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매일 성실하게 일만 하고 자신을 위해서는 아주 작은 사치도 부릴 줄 모른 채 자신을 소모시켜 가며 재미없게 사는 남편보다는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즐겁게 꿈꾸며 사는 쪽이기를 말이다.


그렇게 단단한 마음으로 시작한 새로운 취미, 아이패드 드로잉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세상으로 가는 문을 열어주었다.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들을 디지털로 데려오기 시작했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Digital Transformation) 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다이어리 쓰기, 필사하기, 그림일기 쓰기, 그림 그리기



하나둘씩 내가 하던 일들을 이 도구를 활용해서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툴지만 매일 즐거운 마음으로 배우고 익히기를 지속했고 그때 시작했던 그림일기 쓰기는 오늘 현재 꼭 1194일이 되었다. 시대가 변하고 새로운 문물이 나타나도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다 보면 눈에 보이지 않고 영원히 필요해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새로운 것에 관심을 가지고 주의 깊게 보고 기회가 되면 경험해 보는 일, 그 작은 도전만으로도 우리는 삶의 큰 변화를 가지고 올 수 있다.


시작은 딱 한 장의 그림일기, 딱 한 페이지의 디지털 필사였다.


그렇게 시작했던 변화로의 작은 시도가 지금은 1194장의 그림일기 주인이 되고 많은 분들과 함께 읽고 쓰며 성장하는 고전학당의 운영자가 될 수 있는 발판이 되어주었다. 나 스스로를 믿을 수 있는 힘이 커지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고 싶어 진다.


하는 일을 열심히 하고 익숙해진 것들을 떠나지 않는 끈기와 집념도 정말 멋진 일이다. 물론 나도 다양한 방향에서는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 하지만 내 일이 아니다 생각하고 다른 분야에 관심의 버튼을 끄고 살기보다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변화에 관심을 가지고 새로운 걸 보면 해보고 먹어보고 써보고 경험해서 그 변화와 함께 성장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어떨까?



아이들과 읽으며 나눴던 책 중에서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가난한 명문가의 자손이지만 배우고 익히고 새로운 것을 보고 경험하는데 열의를 다했던 <열하일기> 박지원은 ‘언젠가 나도 꼭 청나라에 가고 말리라. 나도 직접 가서 청나라의 발달한 문물을 볼 수 있는 날이 꼭 올 거야.’ 마음에 품었던 꿈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직접 보고 듣고 배운 모든 것을 기록하여 조선의 개혁을 꿈꾸는 살아있는 글 <열하일기>를 썼다. 죽어있는 글이 아니라 살아 있는 글로 변화하고 있는 세상을 표현하고 배우고 익힌 것을 널리 알리고자 했던 연암 박지원 선생님의 마음을 보며 생각했다.


사업 실패로 긴 방황을 한 아빠를 오래 미워했다. 지독히도 가난하고 힘들게 사느라 내 꿈보다는 빨리 졸업해서 적금 부어 엄마를 돕는 딸로 살게 한 아빠가 원망스러웠다. 안 좋은 것만 물려줬다고, 아빠가 해 준 게 뭐가 있냐고 했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런 아빠 덕분에 난 세상을 보다 입체적이고 재미있게 사는 법을 가지고 살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도록 미워만 했던 아빠께 감사하는 마음이 피어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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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의 오늘이 언젠가 누군가의 삶에 개혁을 꿈꾸는 바람, 뿌리 깊은 단단한 성장나무의 씨앗이 되어줄지도 모른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전부인 줄 알았던 사람에게 눈앞에 문을 그리고 열고 들어가게 해주고 싶다. 변화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해주는 ‘도라에몽 어디로든 문’처럼 우리 함께 다른 세계로 탐험하는 멋진 여행가가 되자고 손을 내민다.


함께 그려요. 어디로든 문

함께 그려요. 디지털 그림일기

치열했던 오늘의 나를. 너를 그리고 우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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