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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르래 Jul 25. 2019

저질이라.

체력이 곧 정신력.



나는 좀처럼 물건을 잃어버리는 타입은 아닙니다.

뭔갈 잘 떨어뜨리기는 하지만 귀가 밝아 소리를 듣고 곧 잘 다시 줍곤 하지요. 제 평생 크게 잃어버린 물건을 고르라면 오락실에서 잃어버린 에어팟과 토익학원에서 집에 들고 가기 귀찮아 잃어버린 척하고 그냥 놔두고 온 분홍색 우산 정도가 생각나네요.


친구들은 항상 몸에 힘을 빼고 다니는 나에게 의외로 자기 것 잘 챙긴다는 칭찬을 하곤 합니다. 이것이 다 저의 집중력 덕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미없는 술자리가 파하고 누가 놔두고 간 핸드폰을 챙겨 주인을 찾아주는 것도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지만 나는 언제나 그 일을 해내고 맙니다.


하지만 서울-부산 학원 왕복을 하던 두 달 사이 나의 자존심에 커다란 금이가고 말았습니다. 머리에 구멍이 난 것처럼 기억 중간중간 끊기고 그 사이 물건을 잃어버리는 일이 잦았습니다. 새로 산 보조배터리와 핸드폰 충전기를 기차에 놓고 내려 그다음 날 깨닫기도 하고, 4시간 반 동안 타고 온 새벽 버스에서 헐레벌떡 일어나 기사님께 공손히 인사를 하는데 뒤에서 급하게 "학생! 학생!"을 부르는 소리에 나는 아니겠지 하고 내렸더니 어떤 아주머니가 제 폰을 들고 내려 주신 적도 있었습니다. 물건을 잃어버릴뻔한 자괴감 그리고 학생이라고 불렸다는 기쁨이 충돌했습니다. 하마터면 폰에 있는 모든 여행 사진과 죽은 내 강아지 사진을 다 날려버린 뻔하여 간담이 서늘해졌습니다. 역시 백업은 그때그때 해야겠습니다. 지금 하세요.


입안은 헐었고 혓바늘이 돋아 까끌거리고 눈은 건조하고 잠은 늘 모자랐습니다. 덤으로 물건은 계속해서 잃어버리고 잃어버린 물건의 할부 값은 계속 갚고 있죠. 이렇게 바쁘게 사는데 과연 나는 잘 살고 있는 걸까요?


드디어 수업이 없는 주말.  

오랜만에 꿈도 꾸지 않는 긴 잠을 자고 일어나 노을이 다 지기 전에 아빠가 에어 빵빵하게 넣어놓은 자전거를 타고 아무도 없는 길을 달리고 땀을 조금 흘려 집으로 돌아와 베스밤을 푼 욕조에서 반신욕을 했습니다. 몸은 따뜻하고 조금 열어놓은 창문으로는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고 여러 장소를 전전하며 틈틈이 검색했던 노래 중 제일 좋았던 노래 한곡을 틀고 잃어버릴 뻔한 핸드폰 사진첩을 들여다보며 그간 2달간의 일들을 되짚어 봤습니다.


친구들과 우연히 들어간 을지로 뮤직바에서 들었던 노래를 어플로 열심히 검색했던 거나, 을지로 카페에서 혼자 진저 하이볼을 먹던 일이나, 세운상가에서 남산과 노을을 보던 거나, 충무로에서 육전과 막걸리를 먹었던 거나, 친구 신혼집 가서 프로듀스 101을 보며 새벽 4시까지 수다 떨다 잠들 던 거나, 나에게 늘 집을 빌려주는 친구와 함께 아침에 일어나 그 동네에서 맛있다는 다쿠아즈를 사 먹었던 거나.. 이 행복한 일들을 바쁘다는 이유로 까맣게 잊어버렸다가 재충전 시간을 가지는 그때서야 그 기억은 다시 나에게 찾아왔습니다.


체력이 곧 정신력. 저질체력에 지배당한 정신은 내 행복한 기억까지 다 앗아갈 뻔했습니다. 이런 정신상태로는 어떤 것을 더 하려고 한다 해도 나는 즐길 수 없을 거 같아요. 당분간 좋아하는 글을 쓰고, 기록해 두었던 음악을 실컷 듣고, 십 년 전 봤던 영화를 또 꺼내어 보고, 내 강아지와 느린 산책의 시간을 가져보려 합니다. 바쁘기만 한 모든 분들에게 그에 맞는 보상이 주어지고, 모두의 체력이 안녕하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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