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 중간관리자와 막내, 그 어딘가에서
사랑니 뽑은 쪽 턱이 점점 부풀어 오른다.
분명 완전히 다 가라앉았었는데.
뒷골이 당기고 두통까지 랄랄라. 도저히 이건..
푸바오에게 양해를 구하고 치과에 다녀왔다.
신경치료를 해야 할지도 모른단다.
- 50만 원 정도 드실 거예요~
폭탄을 던지고 뒤돌아가는 안경 치위생사 선생님.
아ㅏㅏㅏㅏ 당최 돈 모을 새가 없다.
#함께하면 더 좋을 플레이리스트
https://www.youtube.com/watch?v=9xN4Dd-k8yQ
<각자의 타임머신 - 따뜻한 로파이/칠합 9곡 플레이리스트>
- 일단 밥부터 먹고 해.
물레 연습 전, 듣던 중 반가운 푸바오의 제안을 받아들여 차를 타고 식당으로 이동했다.
차 안은 고된 하루 일과에 지친 두 남자와 적막으로 가득했다.
머지않아 고요를 깨고 푸바오가 물었다.
- 앞으로 너는 사업을 하고 싶은 거야, 작품을 만들고 싶은 거야?
대답하기 3초 전. 뱉고 싶은 말들이 머리를 북적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병원 신세를 지면서 갖가지 고민과 스트레스와 고된 노동에 치어 사시는
사장님을 보고 있으면 돈 많이 벌고 싶다는 생각이 뚝 떨어져요. 어제도 수액 맞고 오셨슴서.'
'난 그냥 순간순간을 내가 좋아하는 기분으로 채워가며 살고 싶을 뿐이랍니다.'
그렇지만 마음속 진심을 모두 꺼내놓을 수는 없으니 나는 살포시 답했다.
- 기술을 배우고 싶은 거지요. 머릿속에 있는 걸 만들어 내고 싶어요.
- 그럼.. 물레 연습부터 열심히 해.
최근 푸바오가 가마 문제로 인해 (아니면 어떤 비극적인 요인들 때문에?) 높은 불량률에 힘들어할 때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없어서 마음이 편치 않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푸바오의 답은 이랬다.
- 그저 물레 연습부터 열심히 해.
그래, 나는 내 할 일 잘해나가면 되는 거다. (살짝 삐짐.)
추운지도 몰랐던 올해 1월.
이번 취업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불타는 마음으로
전라도에서 경기도로 한달음에 달려와 만난 푸바오.
그와의 면접 결과는 마침내! *취뽀였다. (*취업 뽀개기 / 취업 성공했다는 뜻.)
- 너무 좋은데..? 음. 일단 실장이라는 직급으로 시작하죠. 돌멩씨가 도와줄 게 많아요.
사실 실장이라는 직함이 그다지 기쁘게 와닿진 않았다. (수습기간 있는 실장이라니)
쥐 똥만 한 시절 회장도 해봤고, 전역하고 나서는 아파트 판다고 과장도 해봤는데.
그래도 막상 명함이 나오니까 웃음은 지어지더라.
그렇게 나는 실장이자 막내로 이제는 수습을 끝내고 하루하루 향상된 모습(?)으로 출근을 하고 있다.
돌멩이 실장님.
이 직함이라는 것이 주는 이미지가 있어선지, 최고령 어르신 두 분(맥가이버와 꽃분할모님)을
제외하고는 모두 나를 '실장님~'이라고 부르신다.
작업장 식구들은 그런 나에게 이런저런 난감한 질문을 하시는데 몇 가지 추려보면 이러하다.
- 이러저러해서 내일은 오전까지만 일 해야겠는데 될까요? (근태 관련)
- 이건 물을 이렇게 써야 되지 않나요? / 이건 B급으로 빼면 될까요? (생산 및 품질 관리)
- 저분 저렇게 하시는데 이건 아니지 않나요? (편 가르기 문제!! 아오 애나 어른이나)
이런 질문에 대해 내가 하는 답은 항상 못난이 같았다.
- 저는 잘 몰라서요.
- 아니 사장님 통화해보셔요. 그게 정확할 것 같은데요..?
- 들은 게 없어서요..
- 제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게..
이러니 질문자의 얼굴은 실망으로 덮일 수밖에.
그래, 나도 안다. (물론 사람들이 내게 큰 기대를 하진 않겠지만.)
푸바오에게 직접 하기 부담스러운 말들이 나를 통해 전달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
실장과 사장 사이니까 네가 좀 잘 말해줄 수 있지 않느냐는 마음.
본인의 판단에 약간의 확신을 쥐어달라는 마음.
그렇지만 내 사정도 들어달라.
솔직히 까놓고 말해 도예업에 대한 경험과 지식이 한참 부족하고
나이 차이도 많이 나는 (예상했 듯 나와 나이 차가 가장 적은 사람은 푸바오다.) 어르신들과
부드럽고 명확하게 답변하기에 내가 가당키나 한 인물인가라는 생각이 안들 수가 있겠냐고.
그렇게 몇 개월 동안 중간관리자와 막내 도공의 그 어딘가에서
머뭇거리며 찝찝한 기억들을 채워가던 어느 날.
스르륵- 내 속에서 물음표가 쏟아졌다.
나, 푸바오와의 약속을 지키고 있나?
'허허 나는 모르는 일이오.' 하며 주인의식 없이
그동안 당장 내가 편하자고 벌어진 상황들에서 회피해 온 게 아닐까?
잠깐, 막내면 어떤가?
우리 작업장이 더 잘 돌아가게 돕고
내가 살갑게 소통을 하고
더 배우면 되는 거 아닌가?
모르면 여쭤보고 사장의 말을 전달해 주면 되는 거 아닌가?
푸바오를 보좌하는 법은 그를 공감하고 지지해 주는 감정적인 방법도 분명 있지 않나?
사방에서 푸바오에게 쏟아지는 자극과 말들을 내가 좀 순화해서 전달해 줄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푸바오도 나에게 그런 역할을 기대하지 않았을까?
왜 기술적인 부분에서만 그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쏟아지는 질문에 대한 답은 내가 이미 모두 가지고 있었다.
어지럽고 찜찜한 마음이 녹아 없어지는 기분이었다.
물론 행동으로 실천하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다시 회의감이 찾아오면 다시 이 일기를 꺼내봐야겠다.
- 푹 빠져서 미쳐보려구요. 이제는 꼭.
그래, 나는 푸바오와 처음 만난 날 선언했던 그 말을 지키고 있나?
중간 사진 출처 - 짱구 극장판 5기 <암흑마왕 대추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