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도이 안녕!
여긴 간만에 비가 주루룩 내리고 있어.
어디 아픈덴 없니?
그래. 다행이야.
나는 오늘도 한 잔 했어.
으으... 모르겠어. 글을 쓰고자 펜션에 들어와 살고 있는데.
너의 이야기를 당최 시작을 못하겠어.
여기서 나가면 상황이 달라지긴 할까.. 걱정스럽네.
어제는 친동생의 생일이었어.
'뭐 필요한 거 있냐.' 하고 톡을 보냈는데, 다리 마사지기 사진을 보내더라고.
하루 뒤에야 답이 왔는데 '내돈내산 할 테니 쪼금만 보태라.'라고 하더라.
거의 30만 원 돈 하는 상품인데 어쩐 일인지 50% 할인해서 15만 원 정도 하더라고.
'제품이 뭔가 문제가 있으니까 이렇게 떨이로 파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휙 스쳤지만
뭐 어때. 내가 생일 축하해주고 싶다는데.
그러다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일하고 있을 어머니 생각도 나더라.
우리 엄마는 평생을 간호사로 살다가 지금은 요양 보호사 일을 하고 있어. 분명 하루 이동량이 적지 않을 거란 말이지.
그래서 20만 원을 보내면서 '엄마 것도 하나 더 사자.' 했어. 착한 동생은 뭐라고 했을 지야 뻔하지.
이 나이 먹고 여전히 돈 100만 원도 못 모은 놈인데 씀씀이는 아주 찰져. 하!
그래도 구르면서 벌어둔 돈이 있으니까 이렇게라도 오빠 노릇을 할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어.
엄마 생각을 하다 보니..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전업 주부였던 내 어머니는 몰랑한 기분을 전환하려는 듯 빡쎈 청소와 함께 집 안의 구조를 이리저리 바꾸시곤 했어.
계절의 변화에 따라 가구는 창가 쪽으로, TV는 방문 옆으로 옮기시곤 했지.
삶의 갑갑함이 느껴지면 이윽고 거주지와 일터를 바꾸는 나를 보면 '역시 핏줄은 핏줄이구나'라고 느껴지네.
내일모레는 광복절이야.
우리 한반도 민족이 이웃 섬나라의 야욕으로부터 독립을 하게 된 날이지.
고 사람들.. 네가 살고 있는 그 시간에서도 마찬가지로 참 가깝고도 먼 나라네. 2025년 지금 이 순간까지도.
너는 그 사람들하고도 잘 지내길 바라.
아무튼 그날 고등학교 동창의 결혼식이 있어.
소식을 처음 듣게 됐던 날, 펜션에서 일하는 난 극성수기 기간인 데다가 연휴가 짬뽕이라 당연히 못 갈거라 생각했지.
그 친구에게 안부 겸 참석 여부 전화가 왔던 날도 그저 멀리서 축복해 줄 밖에는 할 것이 없었어.
그런데 어쩌다 보니 광복절 날 휴식을 부여받았어. 잘됐지 뭐. 나도 결혼식 갈 수 있게 되었다고 그에게 연락했지.
결혼식도 결혼식이지만 오랜만에 친구들 얼굴을 보고 싶었나 봐.
다들 서울살이 하는데 혼자 떨어져 나온 기간이 길어지고 있어서 그런가.
그렇게 다 모일 수 있는 순간이 날이 갈수록 적어지고 있어서도 그렇고.
아니, 적어져야만 한다고 스스로 막아 세우는 걸지도 모르겠다.
젠장. 인생이 뭐라고.
오늘 또 배 터지게 폭식 겸 한 잔 하고 방금 집 밖으로 나가 빗소리를 들으며 담배를 태우는데
물음표가 머리 위로 튀어 오르더라.
나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누군 결혼하고, 누군 집을 사고, 누군 아이를 낳고
좋은 남자, 좋은 아빠, 좋은 아들이 되어가고 있는데.
난 당장 다음 달에 소액 대출을 알아봐야 되진 않을까 걱정하며
내일도 개처럼 쏘다니며 일하겠지.
아냐, 아냐.
잘 생각해 봐. 겉모습 보다 내가 가진 안의 때깔이 더 중요한 거야.
펜션 주인 어머니나 여기 동료들은 가지 말라고 붙잡기도 하고, 또 어딜 가도 잘할 거라고 칭찬 일색인데.
남하고 비교하는 건 하등 쓸모없는 짓이야. 나 잘 살아가고 있어!
음.. 그렇게 낙관적으로만 현실을 볼 게 아니라고.
얼마 전에 내 후임으로 들어오겠다고 찾아왔던 그 조선족 부부가 그랬잖아.
'펜션 일이라는 게 솔직히 말해서 제일 하 바닥인데 젊어서 왜 여기서 일 해요?'
하다 하다 '제일 하 바닥'이라는 여기서도 역시 못 견디고 도망치려고 눈치 보고 있고
밤에는 주종을 막론하고 부어대며 유튜브에나 빠져있는 이 상황에 아직도 그렇게 여유로울 수 있어...?
네가 먹고살겠다던 글은 어떤데? 창작의 고통이란 걸 느끼고나 있어?
벌어먹을 수 있을 때까지 어떻게 지속해야 할지도 모르면서.
글 쓰기 마저도 내가 그간 포기해 온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어느 날 죽음 앞에서 덧 없이 아쉬워하다가 그저 그렇게 눈 감을 거야?
...
어음. 미안 미안.
가끔 이렇게 스스로를 갉아먹는 순간이 있어.
참.. 네게 즐거운 소식들을 많이 많이 전해주고 싶은데 말야.
아, 이건 즐거운 소식인가 모르겠는데,,
나 여기 펜션에서 좀 더 일하기로 했어.
지금과 같은 근무 형태는 아니고 그냥 알바..? 고급 알바생 느낌으로 집에서 출퇴근하면서.
인력 관리나 고객 응대 등과 같이 압박을 줄 수 있는 것들은 전부 손 떼고
나보다 훨씬 경험 많으신 동료와 새로 올 상주 부부(아직 미정이야..)가 내가 하던 것들을 맡아서 하기로 했어.
그냥 난 객실 청소하고, 월 단위 프로젝트들을 완성하는 데에 힘을 거드는.. 그런 옅은 존재로..?
조금 더 여기서 일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질리도록 여기를 미워하지만 어느 정도는 애정을 가지게 되었달까..
나 스스로가 이 현장에 대한 아쉬움이 있어서야. 아직도 눈에 보이는 해결해야 할 것들이 많다고.
버는 돈도 지금에 비해 훨씬 줄겠지만, 하루 중 일에 쓰이는 에너지를 아껴서 내가 바라는 모습의 시간들을 확보해보려고 해.
출근 전에 활도 쏘러 가고, 산책도 자주 하고, 하늘도 자주 올려다보고..
확 몰입해서 너의 이야기도 써 내려가고 말야.
대표님과 솔직하게 까놓고 수차례 얘기를 나누니까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되더라.
참 낚시 바늘 제대로 끼우는 양반이야.
결국 내가 져준다! 남자가 의리가 있지! 사람 힘들 때 버리는 거 아니라고 그랬어!
(사실 어디 다른 일터 가기가 마땅치 않아서 그런 것도 굉장히 커...)
아무튼 이제 삶의 형태를 조금 바꿔서 살아가보려 해.
나 다시 새롭게 내디뎌 볼게.
재밌는 일 생기면 또 편지할게 도이야.
잘 지내!
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