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지 Feb 10. 2021

[28일] 영어 원서는 처음이라

영어 원서 앞에서 쿨해지기


영어 책 한 권을 끝까지 다 본건 고등학교 교과서가 마지막이다. 토익과 토플, 오픽 등 영어 시험을 위해 위해 수험서를 사모았던 기억은 많다. 하지만 책을 보기 위한 마음 하나로 영어 원서를 끝까지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었다.

십여 년 전, 미국의 한 서점에서 영어 원서를 처음으로 샀다. 전 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로 유명한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었다. 영어를 잘 배우고 싶은 욕심도 한 몫했지만 그보다 영어 책 한 권쯤 원서로 들고 다니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 책이 가벼워서 들고 다니는 것쯤은 그리 거추장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매일 읽어볼 요량으로 가방에 넣어 다니다 보니 손때가 제법 탔다. 귀퉁이들이 너덜너덜해졌다. 누가 보면 몇 번이나 읽었으리라 생각할 수 있지만, 정작 그 책을 본 건 채 다섯 페이지가 되지 않는다. 앞 페이지의 단어들에만 밑줄이 그어 있는 걸 보니 그렇다. 모르는 단어들에 질려서 읽다가 손을 놓아버렸음이 분명하다.

어느 날엔가는 원서를 혼자 읽어볼 엄두가 나지 않아  영어 원서 모임에 들렀던 적이 있다. 강사는 영어 원서보다는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의 영상을 보여주며 프리토킹을 시켰고, 나는 어쩐지 모르는 사람 앞에서 어색한 이야기만 나눴던 듯하다. 그날 이후로 스터디에 다시 가 본 적은 없었다.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그 원서 책은 문과생이 산 물리학 책처럼, 한 번쯤 읽어보고 싶은데 도저히 엄두가 안나는 책으로 분류되어 책장에서 외로이 시간을 보냈다.

얼마 전 책장 정리를 하다 다시 이 책을 발견하고 오랜만에 꺼내 들었다. 버리지 않은 걸 보니 언젠가는 한 번쯤 읽어보고자 했었나 싶다. 그 ‘언젠가’를 오늘로 잡았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어보자. 만일 내가 책의 마지막 장을 덮지 못한다면 문제는 두 가지였다. 이 책이 나에겐 흥미롭지 않거나 내가 이 책의 흥미로운 부분을 캐치하지 못할 만큼 이해하지 못하거나.

영어 원서를 택할 때 단지 난이도에 따라 선택하기보다 흥미 위주로 택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정도 공감한다. 아무리 난이도가 낮더라도 나에게 흥미를 크게 불러일으키지 않는 내용이라면 영어 공부를 위한 책이 될 테고 독서 자체의 즐거움을 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의 중심 주제는 알고 있던 터라 흥미가 문제 될 건 없다 싶었다. 그 주제는 꼭 한번 읽어보고 싶단 내용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내 이해능력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거였다.

문제는 완벽주의다. ‘문장을 읽는 순간 직감으로 줄거리를 이해해야 한다. 번역은 그다음이다’ 한 영어 원서 전문 유튜버는 이렇게 말했다. 책을 펼치고 다섯 페이지에서 결국 책을 덮게 만들었던 원인도 여기에 있겠다 싶다. 모르는 단어 하나하나 나올 때마다 완벽히 이해하고 넘어가려고 하다 보니 줄거리를 이해하기보단 단어에 집착하게 되고, 곧 내용 전반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에는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거였다.

좀 더 쿨 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말로 된 에세이나 소설을 읽을 때에도 가끔 모르는 단어들이 나온다. 하지만 바로 찾지 않고 문맥을 통해 느낌만 이해하고 넘어간다. 단어들에 체크만 해두고 나중에 찾아보면서 새로운 단어들을 알아간다. 그런데 이 흐름을 영어 원서에는 그간 제대로 적용을 못한 것이다. 영어 독해 시험 위주로 공부를 해온 습관 탓에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지레 정신이 혼미해졌다고 할까. 오늘은 영어 원서 독해 시험은 아니니 몰라도 느낌만 통하면 넘어가기로 했다.

책은 루게릭 병으로 점점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담담하게 때론 유머 있게 삶의 철학을 나누는 교수와 제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작가는 대학을 졸업하고 칼럼니스트로 바쁜 나날을 보내다 우연히 방송에서 다시 보게 된 교수를 찾아간다. 이미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는 병마와 싸우면서도 매주 화요일 한 가지 주제들로 제자와 이야기를 나누며 삶에서 중요한 것들은 무엇인지를 들려준다.

오늘은 교수와 제자의 만남 장면까지만 읽고 책장을 덮었다. 하루에 많이 읽지는 못했지만 그동안 다섯 페이지의 벽을 넘지 못했는데 25페이지까지 페이지를 넘길 수 있었다. 한 페이지에 모르는 몇몇 단어가 지나갔지만 단어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전체의 큰 틀을 이해하는 데에는 큰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다.

앞으로 모리 교수와 제자가 나눌 열네 번의 강의가 자못 궁금해진다. 그 이야기를 쿨 하게 엿들어야겠다. 영어 공부의 마음은 내려놓고 인생공부의 마음으로. 마지막 장을 덮을때 단어들이 기억에 남는 게 아니라 인생의 가르침들이 기억에 남도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