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신혼가전을 모두 팔고 독일에 온 이후 나와 아내가 새것으로 구입한 전자기기는 2021년 5월 현재 총 열 개다. 토스트기, 휴대용 원두 그라인더, 샌드위치 기계, 첫째 아이의 라디오와 전자시계, 재작년에 산 충전형 청소기, 곧 생명이 다할 것 같은 헤어드라이어, 이케아에서 산 LED 탁상 등, 무선공유기 그리고 석사논문 작업을 위해 급하게 산 잉크젯 프린터기다. 그 외에는 모두 선물 받았거나 중고로 구입했다. 중고기기를 사용하는 것은 불편하다. 예산에 맞춰서 사다 보면 대부분은 이미 성능이 현저하게 떨어져 있고 내가 기대했던 기능을 적어도 한 두 개는 포기해야 한다. 화장실 문을 닫지 않으면 너무 시끄러워 참을 수 없는 세탁기는 이주일에 한 번은 수평을 다시 맞춰줘야 한다. 작년에 이사를 하며 지인에게 받은 TV는 치렁치렁 전선 투성이고, 아는 형님에게서 산 꽤 괜찮았던 냉장고는 점점 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런 불편함에도 나와 아내가 중고기기를 고집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형편이 되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환경보호를 위해서다.
아프리카에서 NGO를 통해 일하시는 박 선생님은 2017년 브뤼셀에서 열리는 학회에 참여하러 가시는 길에 며칠 베를린에 묵으셨다. 그분이 초대받아 강연하시는 내용은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을 묻는 것이었다. 새로운 기술이 개발될 때마다 철 지난 기술은 경제력이 좋은 나라에서 아프리카와 같은 가난한 나라들로 밀려온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이 기술을 보수하고 처리할 수 있는 기술이 없다. 박 선생님이 과학자들에게 말씀하고자 하셨던 바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할 때 그 기기의 사용뿐만 아니라 재생, 보수, 처리까지 고려하여 연구하고 그 기술을 아프리카와 같이 최종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나라들에 보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차원에서 환경보호를 생각하다 보면 매일 생활하는 집 안의 가전제품과 각종 전자기기부터 시작하여, 자연스레 미술대학의 작업실까지 생각이 미친다. 각종 산업자재, 대량의 플라스틱 소재나 재생 불가능한 재료들을 미술재료로 사용하는 미대생들에게 그 재료가 환경 기준이나 산업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임을 알려주는 교수님은 적어도 내가 대학에 다닐 때는 없었다. 유일하게 도자 수업에서 한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니들 흙 만지고 물레 돌리고 도자기 굽는 게 고상해 보이지? 이거 누구한테 팔리지 않으면 결국 다 산업폐기물이야. 얘들은 천년 지나도 안 썩어."
미술가가 많아지면 그만큼 시각예술 생산품도 많아진다. 그러나 그들의 생산품을 수용할 수 있는 시장은 매우 작다. 이미 생산된 작품들은 작가의 작업실이나 집 한편에서 먼지가 쌓인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애물단지가 되거나, 그래도 운이 좋으면 지인에게 선물되어 집의 벽이나 한 구석을 차지할 수 있게 된다. 환경친화 제품이 eco라는 마케팅 딱지를 달고 소비자들의 결정을 망설이게 하는 이때에, 문화의 꽃이라 자부하는 예술 생산자들은 왜 '지속 가능한 개발', 즉 "미래 세대들이 그들의 필요를 채우는 것을 방해하지 않고 현재의 필요를 채우는"([Our Common Future], Oxford Univ. Press, 1987) 노력의 흐름에 합류하지 않고 있는가?
미술작품이 미술관과 갤러리를 넘어서서 공공장소와 개인의 주거공간까지 깊이 침투하고 있는 현대사회 안에서 슬슬 그 녀석들의 '지속 가능성'을 논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는 단순히 환경이나 자연을 예술의 소재와 주제로만 삼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제작에서부터 전시와 판매, 조금 더 나아가서 그 이후까지의 모든 과정을 생산자 자신이 어느 정도 염두하는 주의력을 필요로 한다. 좋은 예술작품이 홍수처럼 넘쳐나는 이 시대에 창작자들이 작품 생산방식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다음 세대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과제를 주게 될지도 모른다. 미술사에 이름을 남기는 것도 참 멋진 일이지만, 그 이름 때문에 우리 집 한 구석에 가득 쌓여 있는 저 그림들을 보고 있노라면 짐스럽고 미안한 마음을 감추기가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