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용성 May 05. 2021

두 개의 세계

나는 경비병이었다. 파병 6개월 동안 방문자통제센터와 주야간 초소를 일정 기간 돌아가면서 부대를 지켰다. 가장 선호되었던 임무는 방문자통제센터 근무 중, 부대를 방문하는 외부인을 에스코트하는 것이었다. 방문자는 모두 외국인들이라 한국에서 민간인을 만나는 것과는 차이가 있었지만, 가만히 초소에 앉아서 하루의 3분의 1을 보내는 것보다는 훨씬 생동감이 있었다. 내가 주로 에스코트했던 사람들은 부대 내 빵공장에서 일하던 네팔 노동자들이었다. 그중 가장 어렸던 친구는 영어를 했기에 쉬는 시간이 되면 둔덕에 앉아 햇볕 아래에서 짧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해 돈을 벌고 있다고 한다. 내가 정확히 이해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의 표정에서 별로 좋지 않은 내용임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언제 네팔로 돌아갈지 모르겠다는 그의 말에서 알 수 없는 외로움이 느껴졌다. 이제 이곳을 떠나게 되면 영영 보지 못할 수도 있는 사람이지만 이토록 정이 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언젠가 다시 만나보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그때에는 더 밝은 표정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2005.2.17. 일기장)


이름은 Nab Raj Singh. 그에게 받았던 여권사진은 찾을 수가 없고 다행히 일기장에 그려둔 얼굴이 있어 16년 전 기억을 되살려볼 수 있었다. 나브 라즈의 그늘진 얼굴을 회상하다 최근 아들과 본 영화 [교실 안의 야크]의 주인공이 떠올랐다. 행복지수 1위의 나라 부탄의 수도에서 선생님으로 일하는 유겐 도르지는 지루한 부탄을 벗어나 호주로의 이민을 꿈꾸고 있다. 선생님을 그만두기 전 마지막 한 계절 동안 그는 산간벽지 루나나 Lunana로 발령을 받아 아이들을 가르치게 되는데 그곳에서 행복과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돌아본다. 영화는 유겐이 호주의 한 술집에서 루나나에서 배운 목동의 노래를 부르는 장면으로 마친다.


내 안에서도 네팔과 부탄의 두 청년이 있었다. 내 안의 유겐은 파병에서 번 돈으로 어학연수를 계획했지만, 내 안의 나브 라즈는 어려웠던 가계를 도우라고 했다. 결국 복학하는 학기의 대학 등록금을 제한 나머지를 부모님께 드렸다. 1987년 환경과 개발에 대한 유엔 세계 위원회 공식 보고서인 [인류 공동의 미래 Our Common Future]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지구는 하나이지만 세계는 그렇지 않다." 숨을 쉬고 밥을 먹는다고 해서 모두 같은 세계에 사는 것은 아니다. 한 대륙 안에도, 한 나라와 도시와 마을과, 심지어 한 집 안에서도 저마다 다른 세계를 살아간다. 자신의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거나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싶은 젊은이들에게 영화 속 유겐의 세계는 실재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자신과 가족의 생명을 지키고 유지하고 싶었던 나브 라즈의 세계 역시 매일 눈앞에서 마주해야 하는 현실이다.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해 먼 나라까지 온 나브 라즈의 세계는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나의 경우 노년의 아버지는 내가 어학연수를 포기하고 돈을 드렸던 일을 뚜렷하게 기억하지 못하셨고, 그 자신은 가난 중에 세상을 떠나셨다. 잠시 가계에 도움은 되었겠지만 그 세계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결혼 후 유학을 나와 학업을 마치고 재외국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내가 간절히 바랬던 꿈은 그 세계 안에서 포기되었고, 잠시 미뤄둔 꿈은 이 세계 안에서 이뤄져 있다. 어쩌면 나브 라즈 안에도 유겐의 세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 세계 안에서 나브 라즈의 꿈이 이뤄지는 행복한 상상을 해본다.

이전 06화 한계를 마주하는 노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