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인권'이란 말이 곳곳에서 사용된다. 너무 자주 사용되는 탓에 그 말이 주는 진정한 의미가 희미해지지는 않을까 염려될 정도이다. 어떤 경우에는 그 글에서 인권이란 단어보다는 '책임/책무'라는 단어가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라는 의문이 들 때도 있다. "서구 문명이 펼쳐진 300년간, 의무는 일축되고 권리만 확장되어 왔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두 개의 폐가 있다. 한쪽 폐를 놔두고 다른 폐로만 숨을 쉴 수는 없다. 우리는 권리를 지니는 만큼 책임도 져야 한다." 솔제니친은 1989년 타임지와의 한 인터뷰에서 서구사회가 인간의 의무/책임/책무보다 권리 증진에만 너무 많은 주의를 기울여 왔음을 지적했다. 그의 말처럼 의무와 권리가 사람의 두 폐와 같다면, 누군가의 권리를 주장할 때 그의 책무에 대해서도 함께 생각해볼 때에만 해당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베를린에는 예술가들의 복지를 돕는 예술인 조합 사무소가 있다. 조합은 다양한 직업군의 예술가들이 사회적 권리를 누릴 수 있는 통로가 되어준다. 처음 이곳에 방문했을 때 대기실 책상에 놓인 빨간 스티커를 하나 집어왔다. 그 위에는 이런 슬로건이 쓰여 있었다. "예술도 일이다. 그리고 사람은 자기 일을 통해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예술도 노동이며 그 노동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예술가 입장에서는 정말 멋진 슬로건이었다. 그 말 자체는 반박할 수 없는 논리를 가졌지만, 개인적으로는 뭔가 부족한 느낌을 받았다. 만약 사회가 예술가들의 복지와 일할 권리를 보장해주어야 하는 것이 맞다면, 예술가는 자신이 속한 사회와 공동체를 위해 어떤 책임를 가지고 있는가? 예술로 번 수입에서 세금을 내면 할 일을 다 한 것인가?
대학교 3학년 때, 한 수업에서도 이와 유사한 질문이 오갔던 적이 있다. 당시 그 수업을 담당했던 강사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시대마다 미술이 사회 속에서 하는 역할은 달라지는데, 굳이 현대 미술이 가진 역할을 말하라면 나는 예술가가 가진 비판적 능력으로 어떤 현상에 대한 견해를 가지는 거라고 생각해." 그게 벌써 13년 전이었으니 그 사이 작가들의 생각도 많이 변했을 것이고 사회도 변하고 예술의 역할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러나 변하지 않아야 할 것은 분야와 장르의 구분 없이 여전히 모든 예술가들이 사회에 대한 책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 고민이 자신의 작품 속에서 직접적으로 다뤄지던 다뤄지지 않던 말이다. 그렇게 예술가들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인정하고 고민하게 될 때에 그 사회와 사회의 구성원들 역시 예술가들의 권리를 마땅하게 생각해주지 않을까.
그러나 이 일은 자연스럽게 되지 않는다. 내가 아는 지식의 범위 내에서는 교육만이 사회에 대한 책임을 길러주는 유일한 방법이다. 아마 그건 가정교육에서부터 시작되어 학교교육 안에서 이론화/체계화되고 성인이 되어 납세의무자로서 공식적인 사회적 책임을 지게 되었을 때에 실천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써놓고 보니 이건 예술인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과거에 비해 공동체와 가족보다는 개인의 삶을 더 중요시하는 나의 세대 전체에게 주어진 과제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