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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용성 May 16. 2021

드로잉이 시작되는 곳

고등학생 시절 소묘 실력이 눈에 띄게 늘었던 적이 있는데, 그 이유는 한 가지 깨달음 때문이었다. 어떻게 그 깨달음을 얻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중요한 개념은 이것이다: 선이란 것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면과 면이 만나는 경계이다. 그때부터 나는 그림을 그릴 때 선으로 표현하기보다는 다양한 면을 만드는 데에 집중했고 그림은 점차 내가 원했던 밀도와 깊이가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오랫동안 유화를 그렸다. 그러나 미대를 졸업한 후에는 작업실이 없었기 때문에 그림은 집에서 그릴 수 있는 크기로 작아졌고, 재료도 유해한 유화물감 대신 몸에 묻어도 괜찮은 수채화와 펜 등을 사용하는 드로잉 작업으로 바꾸었다. 작품 제작에 기동성이 좋아지니 이후부터 나는 집 안에서 일어나는 작은 사건들을 기록할 수 있었다. 그때 작업한 드로잉들이 "~하다가" 연작이다. 청소를 하다가, 밥을 먹다가, 옷을 갈아입다가 등 일상에서 벌어지는 어떤 순간이 나에게 영감을 줄 때 그 자리에 멈추어 드로잉을 했다. 그 순간들은 마치 하루를 이루는 여러 사건들의 경계선 같은 것이었다. 그 경계선들이 하나하나 모여 큰 선을 만들어갔다. 그렇게 나의 드로잉은 분명하고 가시적인 대상을 다루는 윤곽선이 아니라 불분명하지만 다양하게 겹쳐지는 경계선에 관한 이야기로 발전되었다.


2006년 서울 올림픽공원에 소마미술관이 개관했다. 무엇보다 국내의 드로잉에 대한 개념의 확장에 공헌한 소중한 곳이다. 소마미술관 내 드로잉센터에서 이야기하는 드로잉의 개념은 다음과 같다. '결과보다 과정', '개념보다 상상', '완성보다 실험'에 초점을 맞춘 창조 작업 / 모든 장르를 포함함과 동시에 장르의 구분이 없는 탈장르적 개념 / 미완성의 아이디어뿐 아니라 완성된 작품에 이르기까지의 육체적·정신적인 창조 활동의 모든 생산물. 사실 이는 드로잉에 국한된 개념이라기보다는 현대미술의 한 방법론 중 하나이기도 하다. 특히 공공 영역에서 이뤄지는 예술활동들, 관객 참여 기반의 공공예술, 작가가 기획자가 되어 진행하는 프로젝트 등에서 사용된다. 궁극적으로는 여기에서도 여러 사람과 삶들, 그리고 영역들이 만나는 경계가 다뤄진다. 


우리의 삶이 수많은 경계들로 이뤄져 있다면, 우리는 드로잉에 둘러싸여 있는 것과 같다. 매일 마주치는 사람, 방문하는 장소, 먹는 음식, 들리는 소리, 문뜩 떠오르는 감정, 갑자기 생각나는 단어 등 모든 것이 드로잉이 된다. 그것을 어떤 태도로 마주하느냐,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기록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작품으로 '재생산'되는 것이다. 그래서 드로잉은 내 것이 아니다. 내가 아닌 어떤 것 또는 누군가와의 경계이다. 경계는 혼자서 만들 수 없다. 내가 선을 긋는다고 해서 경계가 되는 것도 아니다. 어떤 대상이 내 삶에 다가와 나와 마주했을 때, 혹은 반대로 내가 어떤 대상에게 다가갔을 때 생겨나는 것이다. 거기서 드로잉이 시작된다. 


예술의 영원한 기원은 한 형태가 어떤 사람에게 다가와 그를 통하여 작품이 되기를 원한다는 데 있다. - 마르틴 부버 [나와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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