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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용성 May 02. 2021

불량문화 수출

태권도 유단자이셨던 아랍어 선생님은 텔레비전 보는 것을 좋아하셨다. 특히 한국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사랑이 있으셨기에 위성채널로 나오는 아리랑TV를 즐겨보셨는데, 나는 당시 집에 텔레비전도 없었을뿐더러 한국 소식에도 관심 가질 시간이 없었기에 아리랑TV에서 무엇이 나오는지 알리가 없었다. 하루는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너희 한국도 미국처럼 가족 안에서 문제가 참 많구나." 나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고 물었다. 선생님 말씀이, 한국 드라마에는 이혼, 불륜, 복잡한 가정사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두 가지 생각을 했다. 하나는, 여자를 물건처럼 여기고 딸의 결혼을 돈벌이처럼 여기는 것이 관습인 나라의 국민에게서 그래도 아직은 보수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우리나라 가족정서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들으니 기분이 나빴다. 둘은, 왜 아리랑 TV는 좋은 한국 드라마들을 두고 소위 막장 드라마들을 해외에 내보내는지 이해되지가 않았다. 


"(선전과 문화산업) 양자에게서 모두 통용되는 규범은 친숙하면서도 충격적이어야 한다는 것, 쉬우면서도 인상적이어야 한다는 것, 기교는 숙달되어 있지만 단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목적은 산만하지만 고분고분하지만은 않은 소비자를 지배하기 위한 것이다." - 테오도르 W. 아도르노; 막스 호르크하이머, [계몽의 변증법]


근현대 문화산업은 선전propaganda과 큰 차이가 없다. 좀 더 구체적이고 극단적인 예로 설명하자면, 나치 독일의 선전과 미국 대중문화산업이 사용하는 방법론과 전략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전체주의와 파시즘이 공포와 권력의 편재로 대중을 지배했다면, 대중문화산업은 자유로워 보이지만 대중을 길들임으로써, 대중과 친숙하고 가까운 것처럼 보이지만 그 어떤 것을 끊임없이 욕망하도록 자극함으로써, 극도의 정교함을 지닌 진부한 단순성으로 대중의 잠재의식을 지배한다. 차이가 있다면 선전은 대중이 정치적 선택의 주체인 것처럼 포장하고 선동하여 과격하고 극단적인 행동을 이끌어내지만, 대중문화는 대중을 소비의 주체인 것처럼 포장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막장) 드라마 속에서 타인의 삶을 소비한다. 타인의 부와 가난, 행복과 불행, 의로운 행동과 악한 행동. 자신이 속한 사회 안에서 통용되는 전형들이 한 극 안에서 상호작용하는 이야기는 소비자인 대중들에게 안정감을 제공한다. 나의 삶이 타인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고 내가 속한 시대와 사회가 보여주는 한 유형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한 동질감이다. 혹은 반대로 나는 저들과 다른 영역에 속해 있다는 구분에서 오는 안도감이다. 문화산업과 대중은 서로 공생하는 관계이다. 한쪽은 다른 한쪽에게 공동체와 사회에 비판의식과 거부감 없이 길들여질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고, 다른 한쪽은 이쪽에게 그런 환경을 끊임없이 생산해낼 수 있는 자원과 필요를 제공한다. 


자신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한국 드라마와 미국 영화를 계속 소비할 수밖에 없었던 선생님의 소비품목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의 나라가 비록 극도로 가난하지만 아직은 저 나라들처럼 가정 내 위계와 질서가 무너지지 않았고 종교/문화적 전통을 지켜내고 있다는 것에 대한 상대적 우월감? 혹은 그에게 내재되어 있는 질서에 반항하는 근원적 욕망을 대신 채워주는 이국 문화들에 대한 은밀한 동경? 철 지난 한국의 일부 드라마가 지식인층에 속했던 그 선생님을 텔레비전 앞에 붙잡아 두었다면, 뛰어난 영상기술과 화법으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가득 찬 메뉴로 준비된 한국 내 문화산업의 선전적 영향력은 측정불가이다.


선생님으로부터 한국 가정에 대한 비판적인 이야기를 들은 나의 두 번째 생각, '왜 아리랑TV는 좋은 드라마들을 두고 저런 막장 드라마를 외국에 내보낼까?'에 대한 조심스러운 추측. 국내에서는 유통기한이 지난 불량 드라마, 불량 문화를 다른 아시아 나라들의 소비자들에게 판매한 것이 아니었을까? 만약 그런 경제적 동기가 유일한 이유였다면 아리랑TV는 지금도 가족을 사랑하고 충실함으로 가정을 지켜내고 있는 많은 한국인들에게 정중히 사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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