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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용성 Sep 13. 2021

한계를 마주하는 노력

한국 건축 수업시간. 교수님께서 어느 건축과 수업 중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셨다. 학생들에게 과제가 주어졌다. 각자 생각하는 최소한의 요소로 집을 설계해 오라는 것이었다. 과제를 발표하는 날이 되었다. 학생들의 생각은 대체로 비슷했다. 그런데 한 학생의 발표에 다들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 학생도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표정의 이유를 알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화장실이 하나만 있는 집에서 살아본 적이 없었던 그(녀)의 도면엔 여러 개의 방, 두 개의 화장실이 그려져 있었다. 그 학생에게는 화장실이 한 개 있는 집이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사물의 정하여진 범위. 또는, 그 범위를 나타내는 선'을 한계라고 한다. 사람으로 치자면 그 사람에게 불가능을 느끼게 하는 어떤 지점이다. 보통 우리는 자신보다 뛰어난 어떤 부분에 대해 한계를 느낀다. 그래서 자신보다 능력이 뛰어나거나 형편이 좋은 사람을 보면 그 사람에 비해 내가 더 많은 한계를 가진 것처럼 느낀다. 하지만 마치 한계가 없어 보이는 그들 중 특별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에게는 최저 수준 혹은 보통 수준의 삶을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 대학교 1학년 때 수업 중 국립중앙 박물관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함께 갔던 친구의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 오늘 지하철 처음 타봤어."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 언제나 부모님이나 기사 아저씨의 차로만 어딘가를 갔던 친구의 말이었다. 그 친구는 성인이 되기 전까지 지하철이나 버스, 또는 걸어서 등하교와 출퇴근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의 삶이 어떨지 상상할 수 없었을 거다. 상상할 수 없는 영역의 삶, 그것이 그 친구의 한계였다. 


나도 나름 어려운 시간들을 많이 경험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고2 겨울, 11-12월 어느 즈음에 한 달 정도 단칸 옥탑방에서 산 적이 있었는데 온수가 나오지 않는 곳이라 가스버너로 물을 데워 머리를 감아야 했다. 한창 돈이 많이 들어갈 때 그런 상황에 처해지니 알아서 생존을 해야 했고, 기회가 될 때마다 미술학원이나 화실에서 인체 소묘 모델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을 벌었다. 참 다행인 것은 그 시간이 한 달 정도로 끝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조차도 어떤 사람들 앞에서는 좋은 환경이었음을 느낀다. 대학 졸업 후 아랍의 한 나라에서 2년 간 해외봉사단원으로 살았다. 나는 현지 여성들을 위해 운영되는 카페의 일을 도왔는데, 한 번은 카페 사장님께서 부엌 일과 청소를 돕던 직원 S의 집에 선물을 들고 방문한 적이 있다. 화장실도, 부엌도 없이 그저 벽과 지붕만으로 된 작은 공간 안에 직원과 그 남편, 그리고 당시 한 살 정도 되었던 딸이 함께 살고 있었다. 어릴 적 시골 할아버지 집의 광을 떠올리는 집이었다. 그곳에 다녀오며 사장님과 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뭔가 부끄러움이 내 안에 가득한 기분이 들었다. 당시의 나는 S의 삶 앞에서 한계를 느꼈다. 


"그 정의에서부터 이미 노력이나 도약은 한계의 소관이며, 한계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지속되는 노력이란 곧 한계의 지속적 이동을 뜻한다. 한계가 멈출 때 노력 또한 멈춘다. 노력과 도약은 한계를 제 안으로 옮겨오며, 그 한계에 의해 구조화된다." - 장-뤽 낭시 [숭고한 봉헌]


미학에서 말하는 '숭고'는 일종의 한계를 경험하는 것이다. 나의 경험과 인식을 뛰어넘(어야 하)는 어떤 순간, 그것이 무엇인지 가늠할 수는 없지만 나에게 다가와 경험되는 것, 그리고 그 앞에서 나의 정신이 한계를 느끼며 발생하는 내적 도전. 숭고함은 로스코 Mark Rothko나 뉴먼 Barnett Newman의 그림처럼 아름답고 극적인 순간에만 경험되는 것이 아니다. 흑백사진 속 노인의 깊은 주름살 속에서 경험될 수도 있고, 금방 태어난 아기가 내 엄지 손가락을 잡을 때 경험될 수도 있다. 그리고 상상이 되지 않는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항상 밝게 웃으며 성실하게 일하는 동료의 삶에서 숭고함을 경험할 수도 있다. 어떤 경우가 되었든 숭고의 경험을 위해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은 바라봄 또는 마주함이다. 곁눈질이나 스쳐 지나가는 시선으로는 불가능하다. 내 몸을 돌리고 시선을 고정하여 두려움 없이 한계를 마주하는 노력 속에서 우리의 정신은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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