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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용성 May 09. 2021

예술은 예술일 뿐

내 친구의 꿈은 학창 시절부터 만화가였다. 하지만 홀로 자기를 키우신 어머니께 자녀의 도리를 하고자 바로 만화가의 길로 들어서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하여 대기업 한 부서의 디자이너가 되었다. 그리고 쉬는 시간을 내어 만화를 그렸다. 본인이 일하는 부서는 그렇게 부담이 많은 곳은 아니었기에 회사에서 좋은 것만 취하며 투잡을 할 수도 있었지만 어느 정도 어머니의 복지를 챙겨드리고 난 후 그는 이직을 했다. 굳이 대기업을 박차고 나온 이유를 나중에 사석에서 말해주었는데. 자기 회사에서 가장 일이 많은 부서에 입사동기 형이 있었다. 그런데 그분이 가족을 뒤에 두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셨다. 결론적으로는 산재처리가 되지 않았지만 주변인들은 과로에도 분명 원인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에 일어났다. 회의석상에서 상사가 디자이너들에게 업무 압박을 가하며 고인의 이름을 들먹인 것이다. 내 친구는 회의 자리에 더 앉아있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회사를 더 이상 다닐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인간성이 사라져 가는 기업문화를 생각했다. 감성과 인간성은 그들의 광고 마케팅 속에나 있는 것이지 실제 제품이 만들어지는 과정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환상이었다. 그나마 남아 있는 동료애마저도 성과와 매출이라는 폭력에 의해 발붙일 곳을 잃어가고 있다. 이건 기업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다른 창작자들과의 대화 중에 인간으로서의 삶보다 예술계가 요구하는 예술적 담론과 성과를 우선에 두는 사람들을 만나면 나는 위험하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그들이 입으로 그렇게 말하지는 않지만 살아가는 방식과 어떤 일을 결정하는 패턴 속에서 그들은 이미 예술적 성과라는 환상에 함몰되어 인간성을 포기하고 있음이 감지된다. 그렇게 한 명의 인간으로서 균형 잡히지 않는 인격에서 나온 작품이 과연 다른 누군가에게 건강한 감성을 전달할 수 있을까, 그리고 좋은 예술, 좋은 작품이란 과연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마 그 의문 속에는 예술작품과 예술가의 인격을 동일화시키려는 도덕적인 본능이 발휘된 것일 수도 있다. 인간성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었던 친구 회사의 상사와 그 회사 제품을 동일시해 언젠가부터 그 회사 제품을 사고 싶어지지 않게 된 것처럼 말이다.


한 사회 안에서 기업이 차지하고 있는 정치, 경제, 사회적 의미가 달라짐에 따라 더 치밀하고 다각적인 기업윤리가 요구된다. 그래서 경영학과에는 명목상으로라도 기업윤리라는 수업이 있다. 그러나 미술대학이나 예술대학에서 윤리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수업은 본 적이 없다. 혹시 예술성이라는 명목 아래 예술문화 안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해야 하며, 그 때문에 윤리는 어울리는 개념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창작자 본인이 이에 동조하고 있으면서 가족과 같이 가까운 타인을 희생시킬 뿐만 아니라, 비인격적인 예술산업에게 스스로의 재능과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존엄성을 희생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염려가 된다.


자기 스스로의 인간됨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그 무리를 떠나는 것은 큰 모험과 도전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성이 사라져 가는 무리 안에서 자신만큼은 인간으로서의 면모를 업계의 동료와 후배들에게 베푸는 것도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 무리를 떠나는 자와 그 안에 남는 자 양쪽 모두에게 요구되는 공통의 태도가 있다. 일은 일이고 예술은 예술일 뿐 그것이 나의 인격과 존재를 증명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인식과, 어떤 것도 사람의 사람됨보다 우선되는 것은 없다는 믿음이다. 그 인식과 믿음 안에서만 본인과 타인의 인간됨을 지켜내는 태도를 견지할 수 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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