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주변에는 이름을 바꾼 친구들이 몇 있다. 이름을 바꾼 이유를 일일이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그들에게는 한 가지 뚜렷한 변화가 생겼다. 자신에게 주어진 이름 말고 내가 정한, 혹은 나의 결정권이 반영된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다. 사람의 생애가 그렇다. 내게 주어진 삶이 있고 내가 결정하고 만들어가야 하는 삶이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그 둘 사이에 조화 또는 화해를 이루기란 참 어렵다. 이름을 바꾸었던 친구들도 결국은 그 둘 사이에서 자신이 주도성을 가진 삶의 손을 들어준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개명까지는 아니지만 나도 글을 처음 쓰기 시작하며 필명을 써볼까 생각했다. 이미 미술가로 본명을 사용하고 있으니 글쓰기에서는 뭔가 다른 정체성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런데 글을 한 두 편 써갈 때마다 예명이 점점 어색해졌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의 확신이 아직 부족해서였을까?
정체성을 표현하는 영어단어 아이덴티티 identity와 한 사람의 성향이나 인격을 뜻하는 단어 퍼스널리티 personality. 이 두 단어는 모두 라틴어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아이덴티티는 어떤 대상을 다른 것과 동일시하는 동일화, 퍼스널리티는 연극에서 다른 인물을 연기할 때 쓰는 가면(페르소나)을 의미했다. 이처럼 한 사람이 타인에게 드러나는 방식은 이미 그가 속한 사회 안에 존재하는 여러 개인과 집단과의 동일시(identity)를 통해 이뤄진다. 사람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종합하여 타인을 분류한다. 한 번은 아내와 장을 보러 다녀오는 길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휘자를 본 적이 있다. 그 지휘자가 속한 오케스트라에 큰 관심이 없었던 나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는 아내를 보며 시큰둥하게 '시간 없으니 어서 가자'라고 말해버리고 말았다. 그 지휘자에 대한 정보가 많은 아내에게 그분의 정체성은 평생 한 두 번 마주칠까 말까 한 유명인이었지만 나에게는 외국인 할아버지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개인의 정체성은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며 움직이지 않는 확고한 것이 아니라 상당 부분 사회와 공동체 안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인격(personality)은 어떠한가? 거기에는 우리가 어떤 인물이 되고자 하는지에 대한 열망이 반영된다. 어릴 때는 부모님과 같이 자신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의 인격을 자신도 모르게 모방한다. 하지만 자아가 확립되는 시기가 찾아와 그동안 전형으로 삼아왔던 어른들의 실체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다름을 발견하게 되면 그는 그 어른(들)과 결별하고, 이때부터 자신만의 인격을 만들어가고자 모험을 떠난다. 하지만 결국 자신이 만들어낸 '가면' 역시 나만의 고유한 것이 아니라 나와 마주한 다른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만 참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거기서 그는 갈등하게 되고 중대한 결정 앞에 놓인다. 화해인가 투쟁인가. 나는 화해를 택했다. 그리고 내가 살아내고 싶었던 삶과 타인과 공동체가 나에게 기대했던 삶이 화해하는 그 지점에 다다랐을 때, 나는 '철이 들었다'는 말을 듣기 시작했다.
내가 필명/예명에 대한 환상을 가지게 된 것은 [자기 앞의 생]의 작가 에밀 아자르 때문이었다. 본명은 로맹 가리. 그는 리투아니아 출신의 프랑스인이었으며 1956년에 작품 [하늘의 뿌리]로 프랑스 내 최고 문학상인 공쿠르상을 받았다. 이 상은 한 사람에게 한 번만 주어지는 상이었기에 자신의 본명으로는 다시 상을 탈 수 없었다. 하지만 그 후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세 편의 글을 더 썼고 이 외에도 포스코 시니발디, 샤탕 보가트와 같은 예명으로 글을 썼다. 그중 에밀 아자르가 쓴 [자기 앞의 생]은 1975년 공쿠르상을 수상하게 된다. 이 두 작가가 동일인물이었다는 사실은 그가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후 그의 유서를 통해 밝혀졌다. 에밀 아자르든 로맹 가리든 나는 이 작가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다만 [자기 앞의 생]에서 그가 쓴 문장,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에서 추측해 보건대 그도 역시 자신에게 주어지고 스스로 지은 여러 이름 사이에서 부단한 갈등을 겪고 있었지 않았을까. 자신은 사랑하고 있는지 또는 아닌지, 그렇다면 자신은 살아 있는 것인지, 과연 자신이 진정 사랑하는 것이 누구/무엇인지, 그 대상을 사랑하고 있는 자신은 누구인지, 그리고 자신과 그 대상을 둘러싼 이 세상은 어떤 곳인지.
"저는 공쿠르 상을 수상한 기쁨과, 제가 제 책에서 옹호한 자유와 인간 존엄의 이상이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는 현실을 확인하는 슬픔 사이에서 몹시 고뇌하고 있습니다. 이 순간, 인권을 존중하게 하기 위해 세계 모든 작가들이 입을 모아 호소하는데 핵무기라는 대답밖에는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1936년부터 제가 손에 무기를 들고 지켰던 것, 저는 그것을 제 삶과 작품을 통해 계속 지켜나갈 것입니다." - 로맹 가리, 공쿠르상 수상 소감 중
한 번쯤은 철든 장용성 안에서 아직 철들기를 거부하는 그 이름을 사용해보고 싶다. 하지만 그 이름을 세상으로 끄집어내는 이유 역시도 결국은 화해가 목적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일단 싸움을 잘 못하고, 길들여지지 않고 화해하는 것이 진짜 내가 싸워야 할 싸움인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