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재미있게 들은 이야기도 내가 하면 사람들은 많이 안 웃는다. 게다가 말을 많이 하면 금방 피곤해지는 탓에 이야기꾼이 될 자질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런 내가 군대 이야기를 하면 얼마나 재미가 없겠냐만은 재미없는 사람이 재미없는 이야기를 한다고 세상이 망하는 건 아니니까.
내가 있었던 부대는 일 년 중 특정 시간에 해안경계지원이라는 작전을 나갔다.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해안을 통해 간첩이 가장 많이 들어오는 시기에 레이더 기지 주변 초소를 강화하는 일이다. 평상시 부대 초소는 2인 1조로 경계를 섰던 반면 해안경계는 3인 1조로 편성이 되었는데, 그중 한 명은 반드시 장교나 부사관 같은 간부가 포함되어야 했다. 아마 부대 밖에서 이뤄지는 훈련이 아닌 실제 작전이라 그랬던 것 같다. 나와 같은 조가 되었던 간부는 우리 부대에서 무섭기로 유명한 L중사였다. L중사는 그 부대에 병사로 왔다가 직업군인으로 전환한, 소위 군대에 말뚝을 박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병사들의 생리를 잘 알았고 부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속속들이 아는 그의 눈을 피할 수 없었기에 병사들은 그를 무서워했다. 태권도, 특공무술 등에 일가견이 있었던 그가 무술 시간에 조교로 나서는 날은 죽었다고 생각하면 되었다. 일병을 단지 얼마 안 되었던 나는 L중사와 같은 조가 되어서 많이 겁이 났다. 초소에서 얼마나 혹독하게 대할지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그는 의외로 자기 속 얘기를 들려주었다.
후덥지근한 여름밤. 해안의 초소에서 L중사는 말을 꺼냈다. "니들 내가 왜 말뚝 박았는지 아냐?" 그는 말을 이어갔다. 자기가 군생활을 어느 정도 하다가 세상이 돌아가는 모양을 가만히 보니 참 무서웠다는 것이다. 군대 밖 사회에서는 능력이 조금 모자라거나 떨어지는 사람들을 가차 없이 버리고 가버리더라. 그런데 적어도 군대에서는 실상이야 어떻든 이론상으로는 일단 자기 동료라면 끝까지 데리고 가는 것이 원칙인 것을 보고 오히려 군대가 더 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물론 군대에서 어려움을 겪은 사람이나 그런 가족을 둔 사람이 들으면 어불성설인 말이겠지만, 적어도 한국사회의 생리에 대한 그의 분석에는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 무서운 L중사도 머뭇거리게 만들었던 한국사회가 나에게도 낯설어지기 시작했다.
해외생활을 한 지 7년 차에 들어서면서부터 아내와 나는 한국에 가자는 말을 많이 한다. 처음부터 이곳에 뼈를 묻을 마음도 없었고 고국에서 네 식구가 먹고 살 방도만 마련되면 돌아가기로 했는데 여태 그 길이 열리지 않아 지지부진 이곳에서 버텨왔다. 그런데 최근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외국에 주재원으로 나와 살다가 다시 귀국한 친구 이야기가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 그 친구 말이 외국에서 살다 왔다는 이유로 아이 학교 부모님들로부터 소외를 당한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한국어로 이루어지는 수업을 힘겹게 따라가는 아이를 보는 것이 안타까웠던 판에 학부형들까지 텃세를 부리니 마음이 참 힘들다고 했다. 그 안에 복잡하게 얽힌 감정선이 무언지 짐작은 간다만, 고향을 마음 편히 돌아갈 수 없게 만드는 일부 지역사회의 현실은 씁쓸함을 남긴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고향'이나 '고국'과 같은 단어들이 주는 의미가 예전 같지 않다. 돌아가고 싶지만 다시 그 사회의 일원이 되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은 양가감정. 사람들은 이렇게 고향을 잃어가나 보다.
종교나 정치적 자유를 위해 독일로 망명하는 사람들이 있다. 학교에서 만난 쿠르드계 이란인 친구도 그랬다. 그는 이란 정부에 반대하는 예술가였고 자신과 가족들을 표적으로 한 정부의 박해가 노골적으로 시작되자 독일로 망명하여 난민이 되었다. 가족이 보고 싶지 않냐는 나의 어리석은 질문에, 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간단히 대답했다. 그런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 온 사람에게 난민 인정을 해주고 싶지 않았던 관청 직원은 이렇게 말했다. "그냥 다시 너희들 나라 가서 무슬림 한다고 해." 너무 자극적인 이야기인가? 하지만 21세기의 독일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다.
군대 이야기로 시작해서 난민 이야기로 끝내는 나는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 주변이 그런 이야기들 투성이인 걸 어떡하나. 나는 그런 이야기들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 중 하나일 뿐이고 애석하게도 나이가 들수록 재미있는 이야기보단 재미없는 이야기가 더 내 귀에 많이 들린다. 이제 40대 후반이 되었을 L중사도 지금쯤은 후회하고 있지 않을까? 군대도 크게 다르지 않구나, 사람은 말과 생각처럼 행동하고 살아지는 존재가 아니구나, 라고 느끼면서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노라니 그 해변 초소의 어둠과 습기가 어느 때보다 슬프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