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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엔 기억하게 하소서

우리의 기억은 의지입니다.

by 송형선 daniel

4월은 지천으로 꽃이 피는 달이다. 이미 봄이 와버렸다는 것을 온천지에 선언이라도 하듯 산과 들에 꽃이 가득하다. 3월부터 핀 산수유, 목련, 개나리에 진달래까지 산야에 꽃의 향연이 펼쳐진다. 멀리 제주에도 유채꽃이 만개하는 계절이 4월의 봄이다. 4월의 제주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선명하게 짙푸른 바다가 멀리 하얀 물보라가 이는 파도를 이고 펼쳐져있고, 들판에는 유채꽃과 온갖 봄꽃들이 지천이었을 것이다. 해방을 맞은 이들의 마음에도 새 나라에 대한 봄의 꽃들이 만개했을 것이다. 그 아름다운 산천에서 사람들이 꽃잎처럼 쓰러졌다. 눈부셔 눈을 제대로 뜰 수 조차 없던 그 들판에서 해방된 내 나라의 군인과 경찰들이 그 꽃 같은 이들에게 총을 쏘고, 죽창으로 찌르고, 불을 질렀다. 제주 인구 8만 명 중에 3만 명이 죄 없이 학살당했다. 77년 전의 일이다. 4.3을 저지른 자들은 미군정, 이승만정부 그리고 평안도에서 내려온 서북 청년단 들이었다. 국가 권력이 국민들을 무참히 학살하였다. 올해 4월 3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독립영화 '목소리들(지혜원 2024)'은 그 당시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참상을 고발한다.

영화 목소리들 포스터 지예원 2025

국가권력이 자행한 대규모 강간 살해 폭력을 고발하는 생존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그날의 끔찍한 기억은 70여 년이 흐른 지금에도 그들의 삶을 고통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부모 형제자매 일가친척들이 한꺼번에 잔인하게 살해당한 그 끔찍한 기억의 굴레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던 것이다. 국가는 이런 학살범죄를 은폐하였고, 희생자들의 목소리를 오히려 탄압하였다. 4.19가 되어 잠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와 그 뒤를 이어 반란을 일으킨 전두환 일당은 4.3을 은폐하고 유가족들을 억압하였다. 1987년 시민항쟁으로 군사정권이 시민들에게 굴복한 이후에야 4.3 진상 규명이 다시 시작될 수 있었고 2000년 1월 4.3 특별법이 발표됨으로써 최초로 국가 차원의 진상규명과 반성과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회복이 시작되게 되었다. 억눌렸던 진실이 세상에 드러나기까지는 너무나 긴 시간이 흘렀지만 그 아픈 역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진실을 규명하고자 하는 끊임없는 노력들이 있었기 때문에 결국 진실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작년 12월부터 서울의 광장 한편을 차지한 이들의 손에 들린 태극기와 성조기들은 77년 전 제주에서 미군정과 한국 정부가 저지른 끔찍한 국가폭력 범죄를 연상시켰다. 빼앗겼던 나라를 지키려 했던 양민들을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학살하고 이를 방조한 자들은 태극기와 성조기를 앞세우고 애국이라는 명분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그들의 무리 한편에는 4.3 학살을 저질렀던 서북청년단도 다시 등장하고 백골단이 다시 등장하였다. 77년 전의 참혹한 역사가 여전히 다시 반복되고 있었다. 기억이 또 하나의 투쟁이 되고 있는 현장이었다.

11년 전 인천을 떠나 제주로 향하던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하였다. 4월의 제주를 보기 위해 수학여행을 떠났던 단원고 학생들과 승객 304명이 4월의 차가운 바닷물속에 잠겨 가족의 품에서 영원히 떠나갔다. 국가는 구할 수 있었던 국민들의 생명을 구하지 않았고, 그 국가의 책임과 진상을 규명하고자 하는 유가족들의 처절한 목소리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는 4.3 때 그랬던 것처럼 유가족들을 핍박하고 진실을 은폐하려 했다. 4.3의 진실을 세상으로 끓어올렸던 것처럼 많은 시민들이 유가족의 손을 잡고 세월호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함께 싸우고 연대하였다. 여전히 온전한 진실규명과 책임자들에 대한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세월호 가족들과 시민들은 함께 손을 잡고 기억하고, 진상규명을 위해 힘을 모으고 있다. 지난 4월 12일 인천시청 로비에서 세월호 11주기 추모 문화제가 열렸다. 11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이지만 세월호를 잊지 않겠다는 시민들의 마음은 한결같았다. 우리는 기억함으로써 진실을 세울 수 있으며, 기억함으로써 치유할 수 있으며, 기억을 통해 잘못된 역사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게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기억이 사라지면 진실도 사라지고, 역사도 멈춤을 알기 때문이다.

11번째 세월호 추모문화제 중 세월호 추모 그림에 채색하는 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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