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반짝 빛나는 길, #5 Atacama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 때, 비로소 내가 아타카마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침부터 햇살은 강렬했고 어제 내린 비 때문인지 공기는 아주 신선했다. 체크아웃을 먼저 하고 A가 우리 호스탤로 오기로 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 여기서 중요한 일이 있었다. 체크아웃할 때 숙박비를 지불하려는데 호스텔 직원이 비자를 보여달라고 했다. 칠레 비자? 없는데? 하면서 여권만 내밀었다. 그랬더니 그 직원은 계속 무슨 종이를 보여 달랬다. 그게 없으면 결재를 할 수 없다고, 그리고 출국할 수도 없을 거라고 말했다. 그런데 난 도무지 무슨 종이인지 알 수 없었다. 직원은 내게 찬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요약하면, '어제 네가 출입국관리사무소를 통과하면서 받은 그 종이는 아주 중요한 거야. 그게 없으면 여기서 나갈 수 없어. 그리고 벌금을 내야 해'라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듣고 내 머리를 스치는 종이가 하나 있었는데, 조금 전 침대와 짐을 정리하면서 휴지통에 쿨하게 버린 무슨 마트 영수증처럼 생긴 그 종이였다. 바로 방으로 돌아가서 휴지통에서 그 종이를 찾아서 보여줬더니, 이게 맞단다! 헐... 무슨 비자가 마트 영수증이랑 똑같이 생겼냐고~ 그나마 바로 찾아서 다행이었지만 다음날 출국할 때 보니 나처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버리고 황당해하는 사람들이 몇몇 보였다. 칠레는 여권에 도장도 찍어주지만 간편 비자 확인증을 별도로 준다.(정말 마트 영수증과 같은 재질에 길쭉하게 생겼다.) 이것을 꼭 잘 보관해야 한다. 출국할 때 꼭 제시해야 하는 아주 중요한 종이쪽지였다.
그렇게 또 한 번 등에 땀을 쭉 빼고, A를 만나서 아침을 먹고 숙소를 찾으러 다녔다. A는 아타카마에 3일째 머물고 있지만(오늘이 4일째),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못했다고 했다. 날씨 때문에. 폭설과 폭우 등 기상 상황이 안 좋아서 모든 투어가 취소되었다는 거였다. 달의 계곡 투어는 가다가 돌아왔고, 어제 무슨 별보기 투어 같은 걸 신청했는데 비가 그렇게 퍼부었고... 당연히 신청했던 투어의 비용은 돌려받지 못했다고 했다. 숙소를 통해서 했는데, 숙소에서는 여행사에 이미 지불해서 다시 못 돌려받는다고, 그러니 돌려줄 수 없다고 했단다. 분명히 눈탱이 맞은 거 같은데, 이 착한 친구는 그냥 숙소 직원 팁 줬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을 거란다. 현명한 생각인 것 같다.
몇 군데 호스텔을 둘러봤는데, 방이 없거나 마음에 안 들거나 였다. 기상악화로 며칠째 발이 묶인 사람들이 꽤 있어서 인지 웬만한 호스텔은 거의 만실이었다. 그래도 두 셋집 건너 호스텔이니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약간의 발품을 더 팔고 그나마 깨끗하고 마음에 드는 호스텔을 찾아 짐을 옮겨놓고 동네 구경을 나갔다. 그리고 내일 출발하는 아타카마 - 우유니 지프 투어도 찾아봐야 했다. 동네가 작아서 정말 정겨웠다. 군데군데 어제의 비로 아직 진흙탕인 길이 있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돌아서 가면 되니까.
동네 한 바퀴 돌고 A가 추천할 장소가 있다며 나를 이끌고 간 곳은 공동묘지였다. 남미는 집과 묘지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바로 옆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다. A는 정말 예쁜 묘지가 많다며 서슴없이 공동묘지 안으로 들어갔다. 자기는 여행지에서 공동묘지를 자주 방문한다며, 얼떨떨해하는 나를 데리고 여기저기 손으로 가리켜가며 설명도 해준다. 그저께도 여기 왔었다며. 갑자기 그 착한 A양이 기이하게 느껴진 건 아마 장소때문이었으리라... 나는 빨리 나가고 싶은 마음 밖에 없었다. 예쁘다고 해봐야 묘지인데... 그래도 우리는 공동묘지 한 바퀴를 빙 돌고 관리인과도 몇 마디 나누고 감사하다고 깍듯이 인사하며 그곳을 빠져나왔다.
누군가는 아타카마를 되새기면 별빛이 흐르는 이미지가 생각날지도 모르겠지만 내 기억에 아타카마는 온통 황토색이다. 어제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맡은 흙먼지를 비롯해서 금세 흙탕물이 되어버리던 빗물과 이 작은 동네 곳곳에는 흙벽과 흙집들이 있었다. 성당마저도 흙으로 지어져 황토색이었다. 처음엔 신기하고 이색적이라 마음에 들었지만, 계속 여기에 살라고 하면, 으음... 좀 망설여질 것 같다.
이 단조로운 동네에서 정말 사막 투어를 하지 않고는 다른 것은 할 것이 없었다. 여행사가 밀집된 길에 가서 내일 떠날 투어 지프를 예약하고는 따로 할 일이 없었다.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숙소에서 맥주나 마시자며 맥주를 잔뜩 사들고 갔다. 아타카마의 물가는 다른 곳에 비해 좀 비싼 편이긴 하나 맥주는 싼 편이었다. 그리고 엄청 맛있었다.(그 맛있던 맥주의 상표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 마셔대느라 사진도 못 찍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마시는 낮술은 또 다른 매력이 있다. 맥주를 마시다가 네트워크가 활성화된 A양이 여기서 며칠 전에 알게 된 한국인 친구를 데리고 왔다. 그 친구가 같이 셀프 사막 투어를 가자고 했다. 달의 계곡 등 모든 투어가 중단이 되어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대로 있기는 아까우니까(그 친구도 내일 떠나야 한다고 한다.), 셀프로 선셋으로 유명한 장소를 찾아가자는 것이었다. 걸어서 가도 그리 멀지 않고 큰길에 있어 위험하지 않을 거니 가보자는 것이었다. 배낭여행하면서 위험한 곳에 가거나 표적이 될 만한 행동은 절대 하지 말자는 게 나의 가장 큰 다짐인데, 좀 망설여지고 걱정되는 제안이었다.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 셋이고 어둡기 전에 돌아올 수 있을 거니까 위험하지 않을 것이라는 두 사람의 묘하게 끌리는 제안에 설득당하고 말았다. 아니, 사실 셀프 사막 투어라는 말을 듣자마자 벌써 가고 싶었다. 아무리 맥주가 맛있지만, 여기서 하루밖에 남지 않은 시간을 그냥 맥주나 마시며 버리고 싶지 않았다. 마침 출발할 시간도 딱 맞았다.
동네를 벗어나 아스팔트로 포장된 도로를 따라 한 시간 넘게 걸었다. 걸으면서 불어오는 흙먼지 바람을 온통 뒤집어쓰며, 스카프로 가리긴 했지만 또 얼마나 많은 흙먼지를 마셨을까... 주위는 온통 흙을 트럭으로 갖다 부어놓은 것 같은 흙산들 뿐이었다. 나무 한그루 없이 황량한 황토색 흙산이었다. 이곳도 이곳 나름의 매력이 있지만, 우리나라의 산들이 정말 얼마나 아름다운지 새삼 그리워졌다. 여긴 황량함이 매력이었다.
비현실적일 만큼 거대하고 황량한 황토색 산들이 이어졌다. 우리는 죽음의 계곡으로 가는 길을 지나 MARTE라는 계곡도 지나 두 시간가량을 계속 걸었다. 중간중간 멋진 광경을 볼 수 있는 곳들도 있었고, 투어인지 렌트인지 차를 타고 와서 구경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돌아갈 일이 걱정이었지만, 멋있게 황폐한 사막의 매력에 빠져버렸다. 드디어 해가 지기 삼 십분 전쯤에 우리가 목표로 삼았던 해넘이 장소에 도착했다. 그 친구의 말대로 정말 유명한 곳이라 어디서 왔는지 점점 사람들이 늘어났다. 바람이 불어서 좀 추웠지만 해넘이를 볼 자리를 정하고 앉아서 우리는 하늘이 물들기만을 조용히 기다렸다.
사람들이 몰려들자 기다렸다는 듯이 구름 낀 하늘에서 해가 나와 산꼭대기에 걸리더니 세상이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황홀한 순간이었다. 내가 본 해넘이 중에 단연 최고였다. 보통 바다에서 해돋이나 해넘이를 봤는데 이렇게 황량한 산 뒤로 넘어가는 해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넘어가면서 최대한 붉고 아름답게 빛을 다 소진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멋있다, 예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하지만 더 이상의 단어는 생각나지 않아 우리는 계속 그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광경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누군가가 있어서 더 좋았다. 정말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된다.
해는 천천히 그러나 아주 단숨에 넘어가버렸다. 해가 넘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어두운 도로를 따라 두 시간이나 걸어가는 것은 위험했다. 그래서 같이 해넘이를 보던 어떤 미니 버스의 기사에게 빈자리가 있으면 차비를 줄 테니 아타카마 시내(동네)까지 좀 태워달라고 했다. 그는 다행히 자리가 비어있으니 흔쾌히 타라고 했다. 차비는 필요 없다면서. 오! 그라시아스! 우리는 머리까지 조아리며 감사의 인사를 하고 미니 버스의 승객들에게도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그 버스는 칼라마 공항에서 아타카마로 들어오는 버스였다. 정말 다행이었다. 버스 기사는 우리를 숙소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차비는 되었다고 했지만 우리는 소정의 금액을 억지로 들이밀고 감사인사를 하며 버스에서 내렸다. 어제도 느꼈지만 아타카마 사람들은 정말 친절하다. 물론 아닐 때도 있겠지만 대체로 친절하고 인심이 좋은 편인 것 같다.
우리는 해넘이의 감동을 간직하며 저녁을 먹으러 다시 모였다. 숙소에서 A가 고이 간직하고 있던 고추장으로 간단하게 비빔국수를(파스타면으로) 만들어 먹고 술판을 벌였다. 맥주를 다 마시고 크고 뚱뚱한 와인도 한병 다 마시고, 술 사러 나갔다가 술병을 하나씩 옆구리에 끼고 별 보러 가자며 발동이 걸려서 동네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얼마 걷지 않아 동네 입구에 도착했는데, 거기서 정말 별빛이 쏟아지는 광경을 목격했다. 굳이 멀리까지 나가지 않아도 하늘 가득 빼곡히 박힌 별들이 물결을 이루며 반짝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너무 아름다운 광경에 넋을 놓고 보기도 하고, 별들에게 '살룻'을 외쳐대며 맥주도 마시며, 웃다가 쓰러질 정도로 잊지 못할 아타카마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나는 혼자 하는 여행을 선호하는 편이지만, 이렇게 여행지에서 누군가를 만나서 아름다운 광경을 함께 보고 감동을 나누면 여행이 더 즐거워진다. 그리고 가끔은 친구나 가족에게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속이야기를 하게 되고, 그것은 오랫동안 좋은 기억으로 마음속에 저장이 된다. 아타카마에서 본 황금빛 노을과 물결을 이루며 반짝이던 별빛들이 생각나면 그 순간 함께 했던 이들도 같이 떠올라 더 좋은 추억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