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첫눈에 반해서 따라왔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조용한 중고서점이었습니다. 문학코너에서 시집 몇 권을 빼들었지만 나는 사실 내 손에 들린 시집에 대해 알지 못했습니다. 언젠가 방송에서 소개되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있는 박준의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 며칠은 먹었다’와 제목이 독특해서 고른 주하림의 ‘비버리힐스의 포르노 배우와 유령들’, 그나마 제목을 이해할 수 있어서 꺼낸 송승언의 ‘철과 오크’ 그리고 책꽂이에 뒤집혀 있어서 꺼낸 김행숙의 ‘이별의 능력’이었습니다. 시인에 대해서는 도통 알지 못했고, 시는 더 알 수 없는 분야였죠. 내가 그 시집들을 꺼내들은 것은 당신과 가까이에 있고 싶어서였습니다. 시집을 몇 권 들고 있는 내 모습이 어색했지만 당신의 곁에 있는 아주 적합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몇 권의 시집을 더 고를 것 같은 표정과 자세로 당신의 주변을 서성였습니다.
- 어? 그 시집.
책꽂이를 주르륵 훑던 당신이 기척을 느끼고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당신의 손에는 도서검색대에서 출력해온 인쇄물이 예닐곱 장 있었습니다.
제목 이별능력
재고 1부
도서 위치 E15[위에서부터 4번째 칸]
당신은 인쇄물과 내가 들고 있는 책을 번갈아 보더니 탄식을 내뱉었습니다. 그리고 어색한 듯 말했습니다.
- 이별의 능력을 조회한다는 게 이별능력을 조회해버렸네요. 작가 이름, 출판사도 다른데 왜 몰랐죠. 어쩐지 E서가에 없더라고요.
횡설수설하는 당신의 모습을 보니 어쩐지 귀여웠습니다. 사실 이 건물 5층의 병원에 가려고 했는데, 친구들과 지하로 내려가는 당신에게 첫눈에 반해서 따라왔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 김행숙 시인 좋아하나봐요?
짐짓 태연한 척하는 내 말에 나조차도 놀랐습니다. 처음 불러보는 이름을 이토록 자연스럽게 부르는 능력이 나에게 있다니요. 당신은 들고 있던 시집 몇 권을 추리며 말했습니다. 황인찬의 ‘구관조 씻기기’, 이이체의 ‘죽은 눈을 위한 송가’ 그리고 유희경의 ‘오늘 아침 단어’가 당신의 왼쪽 팔에 안겼습니다.
- 음, 그 시집을 아직 읽어보질 않아서 좋아질지 아닐지 모르겠어요.
당신의 말에 나는 무슨 용기가 난 건지 당신에게 말했습니다.
- 제가 읽고 빌려드릴까요?
의미를 알기 어려운 당신의 눈동자가 나와 마주치는 순간 긴장했습니다. 바빠지는 심장 소리가 내게 들릴 정도였습니다.
- 언제 빌려주실 수 있으신데요?
거짓말처럼 당신의 연락처를 받았고, 내 휴대폰에 당신의 휴대전화 번호 마지막 자리가 눌렀을 때 나직하게 누군가 당신을 불렀습니다.
- 서연아.
당신은 뒤를 돌아보았다가 다시 나를 보곤 옅은 미소를 띄었습니다. 그리고 입모양으로
- 윤. 서. 연.
이라고 한 뒤 그 소리가 난 곳으로 돌아서 갔습니다. 윤서연,이라는 이름을 천천히 입력하고 저장 버튼을 눌렀습니다. 나는 이별의 능력을 통해 사랑의 능력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 같았죠. 마음에 아주 가벼운 봄이 내려왔습니다.
사실 절판된 책도 아니고 사실 책꽂이에 한 권 더 꽂혀있는데 말이죠. 어쩌면 우리는 어떤 핑계가 필요했던 건 아닐까 혼자 짐짓 상상해봅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시집의 모든 페이지를 서두르지 않고 아주 천천히 넘겼습니다. 그리고 밑줄을 하나 그었습니다.
‘마침내 한 사람과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과 한 사람으로 우리 다음 주에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