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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희영 Mar 16. 2020

밥태기가 왔어요

소소한 근황


 밥태기가 왔다. 밥+권태기란 뜻으로 식욕은 여전하지만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을 때 내가 쓰는 단어다. 이 시기가 오면 어떤 음식이나 음료도 생각나지 않는다. 무료한 일상과 더불어 매일 먹는 밥에 대한 권태로움이다.


 나는 먹는 것을 무척 좋아하는 편이다. 적은 양을 먹더라도 음식의 맛을 즐긴다. 연어의 녹진함과 기름진 풍미가, 케이크의 부드러운 달콤함이, 달래 무침의 씁쓰름한 뒷맛이 그렇다. 쉽게 말해 맛있는 음식은 모두 좋아한다. 그런 나에게 먹는 기쁨이 하루아침에 똑! 하고 사라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지곤 하지만 먹는 낙으로 살아가는 인생, 당장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이다. 그렇다면 부엌에서 새로운 것을 도전할 때가 온 것이다.


 짭쪼롬한 무 조림? 커다란 무 하나를 다 쓸 자신은 없는데. 신선하고 아삭한 쌈밥? 아니야, 야채 값이 금값이던데. 고소한 치즈 계란말이?...... 술안주......?

 결국 새로운 요리는 다음으로 미루고 침대에서 일어나 냉장고를 서성거린다. 엄마가 간밤에 만들어둔 오렌지 주스를 권했지만 대충 생수로 목을 축인다. 유튜브로 요리나 먹는 방송을 보며 '지금 내 몸이 무얼 먹고 싶어 하는지' 생각하다 결국 첫끼부터 자극적인 음식(매운 볶음 라면, 마라탕, 쫄면)으로 입맛을 돋운다. 근 며칠 식습관으로 인해 몸 상태가 필히 엉망일 것이다. 아침의 그 오렌지 주스를 벌컥벌컥 마시며 매운 입을 달랜다. 차가운 과즙이 속을 찌르르 울리고 향긋한 오렌지 향이 물씬 올라온다.


 권태로움은 연인들 또한 으레 그러듯 익숙함에서부터 시작된다. 없어지기 전까지는 그 소중함을 알 수 없다. 일상에 깊게 스미어 든 무언가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건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람들은 곧잘 소중함을 잃어버리고 후회한다. 이를 겪어본 사람이 그다음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낄 수 있듯 지금 놓친 무언가를 계기로 후회 없이 살아갔으면 한다. 난 그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시원한 주스를 마음껏 먹는 그런 삶을 살고 싶은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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