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이 맛있는 음식으로 해소되는 건 참으로 다행인 일입니다
최근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작년 여름이 마지막 아르바이트였으니 근 반년만에 다시 일을 한 셈이다. 오랜만에 느끼는 갑-을 관계는 물론 기존 직원들까지 한 번에 너무 많은 사람들을 맞닥트렸다. MBTI* 검사에서도 꾸준히 I**를 유지하던 나에게 새로운 인간관계(특히 사회성을 필요로 하는 조직의 관계)는 아직 어렵기만 하다.
다행히 아주 사회 부적응자 같은 사람은 아니기에 조금 더 용기 내서 말을 하고 같이 웃다 보니 금세 적응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일을 수행하는 능력이다. 반년 동안 머리가 굳은 것인지, 아니면 영 소질이 없는 건지 잦은 실수가 이어졌고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지난 4일 동안 입에 달고 살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외엔 꺼낼 말이 없다. 차라리 저 사람이 진상이고 이 사람이 말도 안 되게 화를 내면 마음을 비우고 웃으며 넘길 수 있지만 스스로에겐 도무지 관대해질 수가 없다. 자책으로부터 나오는 스트레스를 굳이 밖으로 표출하진 않지만 몸속 어딘가에 쌓아둔다. 날을 잡아 한 번에 털어버리도록 하자. 지금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손님을 상대하는 게 우선이다.
일을 끝내고 집으로 오면 과제가 나를 반긴다. 안녕, 어서 와. 네가 일하러 간 사이에 교수님이 또 과제를 주셨어. 얼른 확인해보지 않으련?
사이버 강의가 몇 주째 이어졌고 나는 정신없이 제출되는 과제에 도통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무슨 일을 해야 하고 또 그 기간은 언제까지인지 반드시 적어두지 않으면 잊어버리기 일쑤이다.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깨달았다. 모 TV 프로그램에서 탤런트가 말한 "이 조명, 온도, 습도"는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한 공간에 있던 조명과 온도와 습도를 타고 메시지가 전달되는 게 분명하다.
저렇게 과제를 많이 내면 나중에 채점하기 힘들 텐데, 라는 말은 속으로 삼키고 눈물을 머금으며 노트북을 켠다. 이 스트레스 또한 나중에 털어버릴 수 있으리라.
결국 어느날에 참을 수 없을 만큼 맛있는 걸 먹으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싶어 진다. 핸드폰 사진첩을 뒤적이며 최근 가장 맛있게 먹은 음식이 무엇인지 꼼꼼히 찾아본다. 토너먼트처럼 한 그릇 한 그릇 제치고 1순위에 오른 건 연어장 덮밥이다. 음식 중에서 연어를 제일 좋아하는 편인데 짭조름하게 간장에 절여 노른자와 함께 먹는다니. 생각만으로도 흐뭇해진다. 그날의 기억을 더듬어 레시피를 읊는다.
간장, 물, 설탕, 미림의 비율을 취향대로 냄비에 넣고 (나는 2:1:1:1로 했는데 조금 짰다......) 양파와 대파를 큼직하게 썰어 함께 부르르 끓인다. 약불로 10여분 정도 더 끓이고 완전히 식혀준 뒤 미리 썰어둔 연어가 잠길 때까지 간장을 넉넉히 부어준다. 냉장고에서 반나절 정도 숙성시키면 되는데 나는 좋아하는 음식 앞에서 참을성이 없어져서 4시간 만에 냉장고에서 꺼내 들었다. 밥을 따뜻하게 데우고 양파도 얇게 채 썰어 준비한다. 간장을 머금어 까무잡잡해진 연어를 밥 위에 올리고 노른자를 가운데에 조심히 얹어준다. 튜브로 된 고추냉이도 찔끔 짜주고 나니 영롱하기 그지없다.
연어를 간장에 숙성시키자 부드러워진 식감이 생으로 먹었을 때와 사뭇 다르다. 고소한 노른자가 짠맛을 중화시켜주고 톡 쏘는 고추냉이와 알싸한 생양파의 향이 코 언저리에 찌르르 울린다. 먹을 때만큼은 행복해져서 참으로 다행인 사람이다.
즐거웠던 혀의 감각을 되살리고나니 이내 집에 연어가 한 점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한 순간에 허무함이 나를 밀쳐댔지만 먹고 싶은 걸 먹지 못 한다고 떼를 쓰는 나이는 한참 전에 지났다. 조용히 마음속으로 진행한 토너먼트의 2등으로 메뉴 계획을 옮긴다. 그날 무엇을 먹었는지 잘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아 연어장 덮밥만큼 만족스러운 식사는 아니었나 보다. 좌절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고 행복 또한 근처에 있으니, 당분간은 오락가락하는 나 자신을 잘 견디여야겠다고 다짐한다.
*MBTI- 성격유형검사
**I- 내향적 성향임을 나타내는 알파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