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는 정신과 의사 May 20. 2023

사소한 일은 절대 사소한 일이 아니다.

후회의 맥락을 이해한다는 것.


*모든 글에서 언급된 면담 내용은, 환자분 개인이 드러나지 않도록 각색되어 있습니다.



"다른 특별한 일이나 궁금하신 건 없으신가요?"


진료를 마칠 때 건네는 인삿말이다. 마음이 힘든 이들은 깊은 이야기를 선뜻 꺼내기 힘들어하는 경우도 있어, 정신과 면담 교과서에서도 한번 더 묻기를 권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음..있긴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너무 사소한 일이라서 말하기도 좀 그래요."


이럴 때는 귀가 쫑긋해진다. 이렇게 시작되는 일은 대부분 거의 벗어남 없이 중요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시군요. 그럼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세요. xx 씨는 오늘 점심 식사를 하시면서 이건 사소한 일이야, 라고 생각하셨나요?"


"그렇진 않죠."


"그렇죠. 그 일이 만약 정말로 사소한 일이었다면, xx씨께서 굳이 그 일은 사소한 일이라 이야기를 하셨을까요?"





이후 환자는 순살로 시켜달라 부탁했음에도 뼈있는 치킨을 주문한 연인에게 격하게 화를 낸 이야기를 했다. 차라리 거창한 일, 이를테면 성적인 트라우마나 갑질, 따돌림 등을 이유로 힘들다면 누구나 그럴만 하다고 이야기해 준다. 그러나 이런 조그만 일들은 예민하다, 성격이나 인성에 문제가 있다,와 같이 타인으로부터 비난을 받거나 혹은 나는 왜 이럴까, 자책하기에 딱 좋다.


그도 그렇게까지 화낼 필요는 없었음을 모르지 않는다. 가시돋친 말을 사랑하는 이에게 하면서, 그의 입에서 그러한 말이 나온다는 사실 자체를 슬프고 또 두려워했다. 그 정도로 감정이 격해질 일이 아님을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알기에 밀려드는 후회와 부끄러움에 몸서리쳤다.


그는 어린시절 늘 부모를 기다렸었다. 그들은 불화로, 또 경제적 어려움으로 자녀의 감정을 보살필 여유가 없었다. 생일엔 함께 보내고 싶다, 학교에서 힘든 일이 있었다는 그의 일상적인 이야기들은 묵살되기 일쑤였다.너 먹여 살리는게 얼마나 힘든데 배부른 소리를 하냐고 타박을 받거나, 부모가 서로 격하게 다투는 통해 말을 걸기조차 어려웠다. 그는 늘 외로웠다.


그런 그에게 연인은 처음으로, 그의 이야기도 누군가에게 소중할 수 있음을 알게 해 준 사람이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 특별함은 그 사람마저도 자신의 마음을 몰라줄 것이란 두려움으로 이어졌다. 지나갔다고 생각한 어린 시절의 외로움과 좌절은 고스란히 현재의 사랑하는 연인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졌고, 그로부터 버림 받을 공포를 낳았다.


그는 순살을 기대한 치킨이 뼈로 바뀌어서 분노했던 것이 아니었다. 이 사람 마저 내 마음을 몰라준다는 좌절, 이 사람마저 결국 자신의 마음을 외면해 버릴 것이란 두려움을 느꼈던 것이다. 그의 화는 배달앱 주문 실수에 대한 것으로는 과했을지 모르나, 또다시 누구도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될 것이란 두려움에 대한 것으로는 그리 과하지 않았다.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납득하기 힘들 정도로 감정이 자극될 때가 있다. 누군가는 운전대를 잡기만 하면 유달리 거칠어지고, 천사 같이 모든 것을 이해해 줄 것만 같던 사람이 사소한 꼬투리를 잡으며 까칠해지기도 하며, 어떤 이는 술만 마시면 눈물을 주룩주룩 흘린다.


누군가의 성품을 평가할 때 그가 보이는 감정이 얼마나 격한지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그 감정이 얼마나 납득할 만한지 이다. 누군가가 아무리 거친 말과 언행이더라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면 어느 정도 용인해 줄 수 있다. 반대로 그다지 거슬리지 않을 수준의 예민함이더라도 그럴 만한 이유가 동반되지 않으면 상당히 문제가 있어 보인다. 그런 민감한 순간이 나 자신에게 찾아올때 우리는 고민하고 슬퍼한다. 나는 근본적으로 비상식적이고 비정상적인 사람일까, 마음의 어딘가가 고장난 사람일까.





이런 순간들과 그 때의 감정은 대개 잊고 싶은 과거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대개 애써 그러한 상황에 '사소하다, 별 일 아니다' 라는 이름표를 붙인다. 애써 그 강렬한 무의식적 감정을 무시하고 지나치려 한다.


환자가 그 일을 진료실에서 이야기하려 하다가 이건 사소한 일이야, 애써 넘기려 했던 이유다. 그는 그것이 자신에게 큰 의미가 있고 또 힘들었던 일이기에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과거의 아픔과 연결된 일이라면 무엇이든 억누르고 싶은 양가적인 마음은 이를 애써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말로 억눌렀다. 외면하려 했다.


만약 이에 대해 돌아보는 대화 없이 그가 그대로 진료실을 나섰다면 그는 여전히 그의 연인을 '고작 순살 주문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으로 의심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는 현재에서, 그 누구보다 소중한 그 사람과의 관계를 어렵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미 지나갔다고 생각한 과거의 아픔이 현재에서 재생산되는 과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는 용기를 내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좀 더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이해를 바탕으로 그는 지금 곁에 있는 그가 그러한 두려움을 유발할 정도로, 얼마나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인지를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었다.





의외로 우리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다. 다만 그 이성과 합리성이 잘 발휘되지 않는 순간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한 순간은 대개 일반적이지 않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으로부터 기인한다. 모두의 삶과 경험이 다르므로 일반적인 마음이란 존재할 수 없다. 일견 사소해보이지만 후회되는 일, 비이성적인 불편감과 불안을 유발하는 순간이야 말로 좀 더 내밀한 스스로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실마리다.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후회들. 늘 애써, 아프게 눌러 왔던 그 순간의 생각과 감정들. 그러한 순간들은 아마도 당신이 살아오며 가장 아프고 힘들었던 그 때의 기억과 닿아있을 것이다.


이번 한 주, 오늘 하루를 보내며 혹 이건 별 일이야, 라 애써 무마한 후회의 경험이 있는지. 만약 그러하다면 그 때의 마음을 잘 짚어보면 좋겠다. 그로 부터 주어지는 이해와 통찰은 어째서 당신이 예민하고 문제가 있는 사람인지를 날카롭게 비난하는 대신, 그 아픔이 왜 그럴만한 것이었는 지를 조곤조곤 이야기해 줄 것이다.






https://blog.naver.com/dhmd0913/222849293976

https://blog.naver.com/dhmd0913/222007967305

https://blog.naver.com/dhmd0913/221955217030



https://4yourmind.modoo.at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