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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는 정신과 의사 Oct 27. 2023

느슨하게 붙잡기

잘 해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놓지 않는 것


[대구 수성구 범어동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가장 최근의 글을  블로그에 업로드한 시간이 목요일 새벽 5시다. 글을 꾸준히 읽어 주시는 한 환자분이 '선생님, 이번 글은 새벽 5시에 올리셨던데 도대체 잠은 언제 주무세요?'라고 물어왔다. 아마도 새벽 2-3시 경 부터 열심히 글을 써서 그 시간 업로드하는 장면을 상상하셨나 보다. 


요즘 글 한 꼭지를 하루만에 쓰는 일은 없다. 그 글의 90%는 주말에 이미 완성이 되어 있었다. 월요일 퇴근 이후에 마저 완성해서 블로그에 올려야지 마음을 먹었으나 진료 후 귀가하여 아이를 돌보고 재우기를 반복하다 보니 월, 화 요일이 훌쩍 가버렸다. 수요일 오전은 모처럼 진료가 비는 타임이지만 아내와 병원을 다녀오느라 가용할 시간이 또 줄었다. 이제는 정말 거의 다 썼는데, 아쉽게 출근 10분 전 되어 업로드는 하지 못한 채 집을 나섰다. 


퇴근 후에는 꼭 올리자 다짐 했지만 수요일은 오전이 비는 대신 야간 진료를 하는 날이다. 늦은 시간 까지 육아를 도와주신 장모님과 바톤 터치를 하느라 식사도 거르고 아이 곁에 누워 이내 같이 잠이 들어 버렸다. 허기와 피로에 일어난 시간이 새벽 4시 반 쯤. 10분 만 가만히 누워 폰을 보다보면 다시 잠이 들겠지만, 근 3일 동안 일과 가족만으로 가득했던,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상이 아쉬워 기신기신 일어났다. 


창을 열어서 해 뜨지 않은 새벽 공기를 마시고 은은한 가로등을 보며 전깃불멍을 하다 보니 기분이 어쩐지 개운해 졌다. 마저 글을 완성한 시간이 새벽 5시 였다. 업로드를 딱 마치자마자 둘째가 깨서 우유를 보챘다. 신의 타이밍이다. 비몽사몽한 아이에게 젖병을 꽂은 채 다시 잠을 청했다. 1시간 남짓 자다 일어나 첫째를 킥보드에 태워 등원을 시키며 또 평범한 하루가 시작되었다. 그래도 그 날에는 평소와는 달리 , 한 번 뿐인 삶의 기록의 일부이자 다음 책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글 한 꼭지를 추가한 날이라는 흐뭇함이 함께였다.




글을 쓰는 스타일은 사람들마다 다르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이 차곡차곡 한 줄 한 문단 씩 꾸준히 문장을 쌓아간다면, 어떤 이들은 영감이 퍼뜩 떠오르면 일필휘지로 10여 분 만에 한 꼭지의 글을 뚝딱 써 내려간다. 


나는 후자에 가까웠다. 이끌리는 주제에 몰입되면 글 두 세 꼭지를 앉은자리에서 한달음에 쓰기도 했었다. 한참 쓰는 재미에 빠졌을 때는1500원짜리 대용량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를 문 채 적당한 공원 벤치에 앉아서 정신없이 노트북 타자기를 두들기곤 했다. 자판에 빠져 있다 문득 고개를 들 때 마다 글이 쌓인 만큼 해가 저물어가는 낭만이 좋았다. 


그런데 요즘은 피치 못하게 글 쓰는 스타일이 바뀌었다. 진료와 육아로 반나절의 온전한 몰입 같은건 사치인 일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30분, 어느 날은 7분, 어느날은 정말로 1분, 그 만큼만의 글 들을 겨우 쓸 수 있다. 둘째를 겨우 재웠다 생각하고 고양이발로 나와 컴퓨터 전원을 켜고 첫 문장을 두들기는 순간, 아이가 자지러지게 울어 다시 재우러 갔다가 그대로 함께 잠들어버리는 나날들의 연속이다. 




개원과 육아를 시작하기 전에는 하루의 시간이 나의 것이었다. 조금 잠을 줄이고, 조금의 피로를 감수한다면 얼마든지 원하는 것을 추구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클래식 유튜브를 배경으로 틀어놓은 채 단어들 속으로 빠져드는 새벽의 호사도 졸림과 피로만 감수한다면 흔한 일상이었다.


그러나 육아를 위해서는 '노력하면 원하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자유' 를 내려놓아야 한다. 애써 시간을 확보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그 시간에 나를 놓아주느냐 이다.  끊임없이 할 일이 있고, 조금이라도 눈을 떼면 다치거나 사고를 저지를 수 있어 아이가 깨어 있는 동안에는 온전히 아이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사랑스러운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들은 그 자체로 선물과 같지만, 때로는 아무리 좋은 선물도 부귀영화도 필요 없이 그저 혼자만의 마음 속으로 침잠하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영화에 몰입할라 치면 뒷 관객이 의자를 발로 차거나, 앞자리에서 휴대전화로 내게 빛을 쏘는 일이 반복되듯 쓰는 몰입은 아이들의 칭얼거림으로 깨어지곤 했다.


그래서 비겁한 핑계지만 둘째가 태어나고 한 때 글테기가 오기도 했다. 진료와 생활 속에서 글감을 머릿속에 붙잡았다 하더라도 아이들 뒤치닥거리를 하다 보면 이내 아지랭이처럼 흩어져버리기 일쑤였다. 피로만 더 하고 특별히 남는 것도 하나도 없는 것 같은 연속. 이럴거면 그냥 쓰는 건 좀 접어두고 잠이라도 더 자자. 그렇게 몇 달을 쓰고 싶지만 쓸 수 없는 상태로 지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주말이었다. 아내는 조리원 동기들과 아이들 합동 생일파티가 있어 첫째를 데리고 외출을 하였다. 그날 따라 둘째도 고분고분 아침을 먹고 제 때 보다 조금 더 일찍 잠에 들어주었다. 


갑자기 그동안 만지작거리던 글감이 떠올랐다. 노트북을 켰는데, 한 편의 글로 묶기는 무리라 생각했던 이리 저리 휘갈겨 놓았던 문장들이 하나의 글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한 순간에 몰두하여 쭉 써내려가던 것과는 다른 쾌감이었다. 놓치기 아까워 겨우 메모하듯 남겨 놓은 영감은 시간이 지나며 숙성되어 있었다. 찰나의 통찰들이 모이고 모여 웅장한 변신 로봇 합체처럼 한 편의 글로 재탄생하는 느낌이었다.


즐거웠다. 혼자 쓰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다면 일기를 쓰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글을 올리고 댓글과 메시지로 글이 누군가에게 의미가 되고 영감을 주었다는 것을 돌려받는 과정이 더 좋았다.좀 더 솔직해지기로 했다. 역시 나는 쓰는 것과, 쓰기로로 이어진 일련의 과정들을 좋아한다. 


그 때 퍼뜩 떠올랐던 개념이 수용 전념을 공부하면서 참 울림을 주었던  '느슨하게 붙잡기.' 이다. 우리는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의미와 가치를 위해 그 순간의 최선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그것이 비록 우리가 바라는 대로 '완벽하게' 가 아니라 미흡하게, '느슨하게' 일 지라도.


예전 보다는 잘 해낼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것 도 받아들이기로 했다. 여건이 좋지 않다는 것, 그리고 원하는 만큼의 결과가 이루어지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과 '좋아한다는 것' 은 별개다. 하루를 온전히 내가 바라는대로만 구성할 수는 없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그에 맞추어 바라는 것을 추구할 자유는 내게 있다. 




현실적으로는 기존에 맺었던 출판 계약들은 하나를 남기고 중단하기로 했다. 유료 글쓰기 플랫폼의 계약도 취하하고, 강연 홈페이지의 유료 강연 제안도 고사하였다. 얼마에 한 번 글을 써 내야 한다는 강박도 내려놓았다 (늘 기다려주시는 출판사 편집자 선생님들께는 죄송하고 또 죄송한 마음 뿐이다.). 상호 호혜 계약의 원리로 이루어지는 세상에서 모든 이들이 나를 무조건적으로 믿고 기다려 줄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느슨하게 붙잡자 다짐한다. 예전 처럼 여유 있고 우아하게 쓸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럴 듯한 분량과 결 과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만족스럽진 못하더라도 쓰는 사람으로서의 소소한 의미와 기쁨을 느슨하게, 하지만 꼭 붙들어 보자 라는 다짐을 했다.


그래서 요즘은 디스크 조각 모음 처럼 글을 모은다. 미흡하고 짧은 파편들을 틈틈이 그러모아 이윽고 한 꼭지의 글로 엮는다. 번뜩이는 영감으로 한 번에 써 내려나가는 글들 보다 세련됨은 덜할 지 모르지만, 요즘 쓰여지는 글들은 찰나의 놓치고 싶지 않은 삶의 순간들이 모이고 고인 더욱 소중한 글들이다. 




한참 우울의 시기를 지나는 이에게는 '운동을 좀 해보면 좋아질거야. ' 라는 말 만큼 바보같이 느껴지는 것도 없다. 그 정도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알면서도 안되는 어려움을 이야기 하는데, 마치 너는 아직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투로 당연하고 뻔한 조언을 듣게 되면 허무할 수 밖에 없다.


유명 중독 교수님께서 학회 때 알콜 중독 치료의 가장 하수는 '술을 끊으셔야 합니다.' 라는 말을 하는 치료자라 했었다. 비슷한 맥락이다. 술을 끊는 것이 중요한 것을 모르는 환자는 없다. 알면서도 너무도 안되는 그 막막함을 다루는 것이 치료자다. 새로운 방법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그 방법, 너무도 버겁고 막막하게 느껴지는 그 길을 꾸준히 갈 수 있는 관점이 필요한 것이었다.


본디 살아가는 고민의 정답은 뻔하고 재미가 없나 보다. 먹기만 하면 빠지는 다이어트 약 보다는 솔깃하진 않지만 꾸준한 식이요법과 운동이 건강 관리에 더 좋은 것과 같다. 삶의 반전은 어떤 특별한 계기가가 아니라, 이미 잘 알고 있지만 실천은 어려운 작은 걸음들이 쌓여 이루어진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획기적인 변화가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지루한 정답을 묵묵히  쌓아갈 수 있는 인내와 시간이다.




그래서 '느슨하게 붙잡기' 이다. 바라는 삶을 향하며 살아가는 행복을 추구함에 있어 잘 해내는 것이 핵심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때로 느슨하더라도, 소중한 것들을 놓지 않는 것이었다. 때로 더디거나 어긋나더라도 원하는 삶으로 다가가는 그 길을 꾸준히 나아가는 것, 모든 것들이 생각대로만 이뤄질 수는 없는 삶을 살아가는 행복의 원리다. 지금 우리의 최선으로, 가능한 만큼으로.





P.S. 

한참 글에 몰입하려는 찰나 아이가 울어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면 짜증이 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곁에 누워야만 비로소 울음을 그치고 새근거리는 돌쟁이 딸의 콧김을 느끼노라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것 만으로 불경하게 느껴질 정도의 뭉클함이 밀려온다. 


아마도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아이가 자신의 삶을 향하느라 붙잡아도 붙잡을 수 없는 시기가 올 것이다. 이 감동도 지금 뿐이다. 그래서 지금은 아이다. 하지만 글도 열심히 계속 쓸 것이다, 느슨하게. 우리가 무언가 소중한 것을 느슨하게 붙잡기로 했다는 것은, 그보다 더 소중한 것들에 매진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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