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홀짝 Oct 03. 2020

Day 2-2. 겁쟁이 쫄보 아들과 그걸 간과했던 아빠

서른여덟, 아빠와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더 셰프(The chef)


카페에서 한 시간 여를 떠들다 보니 시간이 벌써 열두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때맞춰 조식 먹었던 배가 꺼지고 다시 출출해졌다. 근처에 생각해둔 식당이 있어 밖으로 나왔다.

 

사실상 치앙마이에서 보내는 첫날이라 호텔, 마사지샵, 카페, 식당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 않도록 동선을 짰다. 점심 먹을 식당도 카페에서 걸어서 3분이면 충분한 거리에 있다. '더 셰프'라는 이름의 식당으로, 지난번 치앙마이에 혼자 와서 지냈을 적에 열흘 동안 다섯 번이나 찾았던 곳이다.


노점을 제외하고, 방콕이나 치앙마이에서 밥값이 비교적 저렴한 식당은 대개 건물 샷다를 올리면 식당 안팎의 경계가 없어지면서 길과 맞닿아 있는 건물 면이 완전히 트여 있는 형태를 하고 있다. 비단 태국뿐 아니라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구조인데, 나의 일천한 경험에서 비롯된 편견일지 모르나 이런 식당들 가운데 현지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 많고, 앞서 말했다시피 음식값이 저렴하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 식당 안팎이 차단되어 있지 않아 에어컨이 제 기능을 할 수도 없을 뿐더러 아예 에어컨 없는 곳이 대부분이다. 일 년 내내 날이 더운 동남아시아에서 에어컨 없는 식당은 그 자체로 누군가에게는 기피 요인이 될 수 있다(주방의 조리열과 음식의 열기까지 더해지면 더욱). 음식점의 위생 상태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그 부분 또한 단점으로 보일 수 있겠다.

 

더 셰프는 단독 건물을 사용하는 레스토랑으로, 잘 꾸며 놓은 카페 수준으로 내부가 쾌적하고 테이블 사이의 간격도 넉넉한 편이어서 전체적인 인상이 깔끔하다. 건물 외부에도 나무 그늘 아래 테이블이 있어 바깥에서 식사를 하는 손님도 더러 있다. 
 


보통 이 정도 환경을 갖춘 식당이라면 예상되는 가격대가 있는 법. 그럼에도 이곳은 기본 메뉴의 가격이 공간과 환경 대비 무척 저렴하다. 타이식 볶음밥이나 팟타이와 같은 태국 음식의 가격이 69바트에서 79바트인데 에어컨 팡팡 나오는 쾌적한 분위기의 식당에서 이 정도면 매우 훌륭한 가성비다. 게다가 맛도 좋다. 


태국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 사람들은 메뉴에서 서양 음식을 고르면 된다. 버거, 샐러드, 스파게티, 스테이크까지 구색을 다양하게 갖추었다. 세 번째쯤 왔을 때 먹었던 까르보나라 스파게티는 69바트(대략 2800원)였다. 


아무리 혼자 열흘을 머물렀다 해도 어지간하면 여러 식당에서 최대한 다양한 음식을 먹어보고 싶은 게 여행자의 마음가짐이다. 그럼에도 이곳에 다섯 번이나 들렀던 것은 매일 오가는 길 중간에 식당이 위치한 이유도 있지만 분위기, 환경, 가격대, 맛에서 모두 만족도가 높았기 때문이었다. 갈 때마다 새로운 메뉴를 주문했는데 먹는 음식들이 모두 맛이 좋아서 '이 집은 요리하시는 분이 솜씨가 정말 좋은가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렇게 혼밥을 몇 번 했더니 지배인급으로 보이는 매니저 분이 식당 앞 길로 지나가는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할 정도가 되었다.


나보다 석 달 앞서 장모님을 모시고 치앙마이 여행을 떠나는 아내에게도 여길 추천해줬다. 아내가 장모님을 모시고 이 레스토랑에 와서 밥을 먹다가 매니저에게 휴대폰으로 내 사진을 보여주니 금세 알아보고 반가워하더란다. 


아빠와 함께 '더 셰프'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때 그 매니저가 여전히 홀을 지키고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활짝 웃어 보이는데 흡사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짧은 영어로 '오랜만이다', '아내가 몇 달 전에 와서 내 사진을 보여줬던 걸 기억하느냐', '나는 이번에 아빠를 모시고 왔다' 하면서 안부를 전했다. 카페에서 레스토랑까지 걸어오는 길에 자초지종을 들은 아빠는 그 광경을 보고 말없이 웃기만 했다. 아마 속으로 '저 놈이 뻔질나게 태국을 오가더니 별 일이 다 있구나' 했을 거다.


게살을 넣어 만든 태국식 카레 ‘푸 팟퐁 커리’와 파인애플 볶음밥, 코코넛 밀크 베이스의 국물 닭 요리(똠 카 까이)를 주문했다. 모두 태국 음식이지만 비교적 향신료 맛이 강하지 않아 아빠도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메뉴로 정했다. 가족여행 때 태국 음식에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았던 아빠를 기억하고는 있지만 여행을 떠나기 전 고추장과 김치를 챙겨 올까 고민하는 아빠를 타박하면서 음식 걱정은 하지 말라고 큰 소리를 쳤던 터라 아예 신경을 쓰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인지 여행 내내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마다 아빠 반응을 살피면서 '어때?', '괜찮아?', '맛있지?' 하며 마치 내가 직접 요리한 음식 맛을 궁금해하는 것처럼 묻고 또 물었다.
 


치앙마이 올드시티 산책


점심을 먹고 나와서 다시 걸었다. 쉬고, 차를 마시고, 밥을 먹고, 길을 걷고 하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딱히 뭘 한 게 없는' 시간일 수 있겠지만 그것이야말로 내가 아빠와 정말 오랫동안 하지 못했던 일, 어쩌면 제대로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아무 말 없이 걷다가 생각나는 대로 별로 중요하지 않은 말을 툭툭 주고받는 것. 주변에 희한하게 가지를 뻗은 나무가 있으면 '저 나무 참 특이하게 생겼다', '그렇네, 왜 쟤만 저렇게 생겨먹었지?' 하는 따위의 이야기가 아빠와 나 각자에게, 그리고 서로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일지 모른다.


나는 소지품을 넣은 크로스백을, 아빠는 카메라 가방을 메고 걸었다. 이번 여행에서 맡은 각자의 임무다. 길을 가다 틈나는 대로 카메라를 꺼내 주변을 찍었다. 그러다 아빠를 찍어주기도 했다. 가끔 아빠가 '쌍팔년대’ 포즈를 취할 때면 어김없이 핀잔을 주었다. 


아빠 : 여긴 꼭 옛날 강원도 읍내 길 같아.


길을 걷던 아빠가 불쑥 올드시티에 대한 인상을 말했다. 옛날 강원도에는 젊은, 혹은 어린 시절의 아빠가 살고 있었으니 왠지 낯이 익고 정겹다는 뜻이겠다. 북적북적한 방콕 시내보다는 여기가 훨씬 좋다는 말까지 듣고 나서야 마음이 한결 더 놓였다.  

 


치앙마이 도로변은 인도의 폭이 몹시 좁거나 그마저 없는 경우가 흔해서 아빠와 나는 나란히 걷지 못하고 줄곧 내가 앞장서서 걷고 아빠가 뒤따라 걷는 모양새가 되었다. 나중에는 그게 버릇이 되어서 차가 잘 다니지 않는 골목을 걸을 때에도 항상 내가 앞장서서 걸었다. 처음엔 그런 줄로만 알았다.


처음에는 내가 앞에서 걷는 게 자연스러워져 그런 줄 알다가, 다음에는 내가 길을 아는 사람이니 따라갈 수밖에 없는 아빠가 뒤에 서는 거라고 생각하다가, 나중에는 아빠가 이곳저곳 둘러보느라 느리게 걷나 보다 했는데, 그 모든 것들이 아주 틀린 생각은 아니었지만 며칠이 지난 후에는 무엇보다도 아빠의 평소 걸음이 나보다 훨씬 느려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빠는 여전히 건강하지만 예전만큼 젊지 않다. 오래전에는 아빠와 엄마, 누나까지 네 식구가 함께 어디론가 길을 걸어가면 늘 저 앞에서 아빠 혼자 걸음을 앞서 나갔다. 누나와 내 곁에서 함께 걷던 엄마가 그런 아빠를 타박했었다. 요즘은 내가 가끔 아내에게 뭐가 그리 급해서 혼자서만 빨리 걸어 나가냐는 소릴 듣는다. 
 

올드시티 북문 근처에서 걷기 시작해 동쪽 문인 타페 게이트(Taphe gate) 앞에 왔을 때는 시간이 40여 분 가량 흘러있었다. 빠른 길로 곧장 걸어왔으면 20분이면 족했을 거리인데 여기저기를 구경하며 구불구불한 길을 돌아오면서 시간이 거의 두 배나 걸렸다. 치앙마이 시내에서도 유명한 포토 스팟이라 아빠 사진을 꽤 여러 장 찍었다. 사진 찍히는 걸 썩 좋아하지 않는 나와는 달리, 아빠는 전혀 거부감이 없어 보인다. 


여행 첫날이었던 어제에 이어 둘째 날 오후까지, 아빠는  "아들하고 둘이서 이런 데를 다 오고 참, 고맙다"는 말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혼잣말처럼 몇 번이고 반복했다. 아직은 초반이라 서로 간에 모든 게 더없이 따뜻하고 좋을 때라 그랬지 싶다. 


그런 중에도 앞날은 너무나 뻔히 예측 가능하다. 서로 좋은 얘기만 하고 좋은 표정만 보여주기에 8박 9일은 너무 긴 시간이니까. 언제 어떤 모습으로 분위기가 돌변할지 알 수 없지만 지금은 그저 만끽하는 게 좋다. 고마운 마음, 함께 있는 시간의 소중함을 느끼고 있는 건 거짓이 아니니까. 그저 가끔, 아주 잠시 그걸 잊을 때가 있을 뿐이다.

 


아카 아마 커피(AKHA AMA COFFEE)


타페 게이트에서는 다시 올드시티 안쪽으로 방향을 틀어 골목을 누볐다. 오늘의 산책은 마치 올드시티 리뷰 같은 것이어서 아빠와 함께 이곳저곳을 다니며 앞으로 묵게 될 숙소나 방문할 식당 앞을 지나게 되면 아빠에게 미리 소개(?)시켜 주기도 했다. 
 

점심을 먹고 나와 걸은 지 두 시간 가까이 흘렀다. 아무리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걸었다 하더라도 이 정도면 한 번 쉬어갈 타이밍이다. 목이 마르기 전에 축이고, 힘들다는 느낌이 들기 전에 미리 쉬어야 아빠처럼 연세가 있는 분들도 무리 없이 여행을 즐길 수 있다. 근처에 '아카 아마 커피'라는 괜찮은 카페가 있어서 정처 없는 걸음을 멈추고 목적지를 향해 가장 빠른 길로 이동했다.
 

아카 아마 커피는 치앙마이 보다도 북쪽에 있는 치앙라이 지역 고산 지대에 사는 아카족이 재배한 커피를 파는 곳으로 유명하다. 올드시티 중심부에 있는 아카 아마 커피는 내부가 좁고 테이블이 많지 않아 늘 북적이는데 테이블과 의자도 간이식에 가까워서 오래 앉아있기 좋은 편은 아니다. 


커피맛을 유창하게 설명할 정도로 전문가는 아니지만 내가 느낀 이곳 커피는 산미가 강하고 맛이 독특하다. 아빠는 목이 말랐는지 커피 맛이 어떻고, 이곳의 커피 원두를 어떤 사람들이 재배하는지 미처 설명할 틈도 주지 않고 시럽을 두어 번 짜서 넣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순식간에 다 마시고 입맛을 다셨다. 


 


여행의 취향


주위를 둘러보며 아빠와 카페 분위기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우리 테이블 곁을 지나가던 여성 한 분이 아빠에게 "아드님 하고 오셨나 봐요" 하고 말을 붙이셨다. 아빠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한국분이 다가와서 말씀을 건네는 그 과정이 지극히 자연스러워서 순간 여기가 태국이라는 것도 잊고 '아빠가 아는 분인가'하고 생각할 뻔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분이 치앙마이에 패키지여행을 오신 걸 알게 됐다. 어제까지 빡빡한 스케줄로 긴 시간 차량 이동을 해 오다 너무 힘들어서 오늘은 따로 빠져서 쉬고 있다는 말씀에 아빠는 강하게 공감을 표했다. 아빠는 정년퇴직하기 전 회사에서 두 번, 엄마와 한 번 중국으로 단체 관광을 갔던 경험이 있다. 
 

마지막에 '아들하고 아빠가 여행 다니는 건 처음 본다'는 그분 말에 아빠 얼굴 표정이 순간적으로 한껏 '으쓱'해 보인 건 내 착각이었을까. 서로의 안녕을 빌며 짧은 대화를 마치고 난 뒤 아빠가 내게 말했다.
 

아빠 : 아빠도 이런 여행은 처음이야. 그래서 이걸 여행이라고 할 수가 있나 싶고 그래.
 

부모님 세대의 어른들이 가는 보통의 해외여행은 가이드가 안내하는 패키지 관광인 경우가 많다. 정해진 짧은 시간에 유명 관광지를 최대한 많이 방문하고 사진을 찍으면서 여행을 기념하는 걸 좋아들 하시니 대개 일정이 빡빡한 편이다. 이렇게 한가하게 빈둥대는 여행을 굳이 나라 밖까지 나와서 하는 게 아빠에게는 그저 어색한 모양이다.
 

나 : 나는 어디 어디 '가 본' 사람이 되는 여행보다는 '있어 본' 사람이 되는 여행이 좋아
 

각자 좋아하는 여행 스타일이 어떤지 아빠와 말을 주고받다가 내 취향을 이렇게 정리했다. 어쩌면 그건 취향 차라기보다는 살아온 환경의 차이일 수 있겠다. 취향이 만들어지려면 경험이 쌓여야 하고 경험을 쌓으려면 여유가 있어야 하는데 아빠의 삶에는 그게 없었다. 우리 세대의 부모님들 상당수가 그러하시듯 가이드 없이 해외여행을 하기 위해 필수적인 최소한의 영어 의사소통을 아빠는 할 수 없다. 아빠에게는 교육을 경험할 여유조차 없었으니까.


이제 막 치앙마이에서 온전하게 하루를 보내는 첫날이라 일부러 헐겁게 일정을 짜서 아빠가 더욱 그런 생각을 했을 수 있다. 당장 다음날부터는 두 시간 가까이 버스를 타고 이동해서 하룻밤을 보내고 돌아와야 하고, 며칠 후에는 새벽부터 일어나 두어 시간 차를 타고 태국에서 가장 높은 산에 가서 일출도 봐야 한다. 관광보다는 대화에 비중이 있는 이번 여행의 정체성은 휴양과 여행 그 사이 어딘가쯤에 있다.


나 : 그리고 아빠, 이제 우리도 차 타고 한 30~40분 어디 가야 돼.


잘 됐다. 그렇잖아도 그랩 택시를 불러 어딜 갈 참이었는데 아빠가 '이동'이 많이 고픈가 보다.



그랩(Grab)


방콕은 가히 택시의 천국이라 할 정도로 거리에 택시가 넘쳐나는데 치앙마이는 도시 규모가 비교도 안될 만큼 작아서 그런지 도로를 오가는 택시가 드물다. 그래서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서 탈 생각은 애초에 접고 휴대폰으로 그랩(grab) 어플을 이용하는 여행객이 많다. 그랩 어플은 우리나라 '카카오 택시' 같은 것이라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다(아빠에게도 이렇게 설명했다). 탑승 지점과 목적지를 입력하고 호출하면 근처를 지나가는 그랩 카, 그랩 택시가 호출을 받고 입력한 탑승 위치에 찾아온다. 결제도 카카오 택시와 마찬가지로 현금으로 기사님께 직접 결제하거나 어플에 입력한 카드 정보로 자동 결제하는 방식이 둘 다 가능하다. 
 

우리나라 택시 어플과 다른 점이 있다면, 택시로 등록되지 않은 일반 차량의 운전자도 그랩 기사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랩 '택시'를 호출하면 택시로 등록된 차량을 이용할 수 있고 그랩 '카'를 호출하면 그랩에 등록된 일반 차량을 이용할 수 있다. 태국 또한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허가된 택시 이외의 일반 차량 운전자가 택시 영업을 하는 것이 불법이어서 그랩 카 운전자는 현장에서 단속될 경우 벌금을 물어야 한다. 


그럼에도 그랩 카를 이용하는 것이 어렵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해외 관광객 유입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태국의 산업 특성 때문일 것이다. 길에서 직접 택시를 잡아 타는 것과는 다르게 목적지를 직접 말로 설명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고 요금 바가지를 걱정할 필요도 없으니 나 같은 외국인 여행객으로서는 그랩 어플에 대한 선호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수요가 많은 만큼 공급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 단속과 벌금의 위험을 무릅쓰고 본인의 차량을 그랩 카로 등록해놓고 부업으로 운전대를 잡거나 아예 전업으로 그랩 운전을 하는 사람이 많아 치앙마이에서도 어플을 켜면 시내를 중심으로 꽤 많은 수의 그랩 카가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태국 정부가 우리나라처럼 어플 자체를 막지 않고 비교적 느슨하게 단속하고 있는 것 또한 그랩 카를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이유다.
 


푸핀 테라스(Phufinn Terrace)


아카 아마 카페에서 다음 목적지인 푸핀 테라스에 가기 위해 그랩을 호출했다. 푸핀 테라스까지의 거리는 대략 20킬로 이상, 차로 30여 분을 가야 한다. 푸핀 테라스는 치앙마이 시가지에 비해 지대가 높은 산중에 위치한 카페 겸 레스토랑이다. 조식 때 마신 커피부터 시작해서 오늘만 이미 두 곳의 카페를 거친 아빠와 내가 굳이 커피를 한 잔 더 마시겠다고 차를 타고 반 시간이나 이동할 리는 당연히 없다. 
 

벽이 없고 사방이 틔여 있는 푸핀 테라스는  나무로 만든 크고 넓은 정자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산자락에 세운 나무 기둥 위에 카페 공간이 얹어져 있어 계단을 올라야 한다. 계단 위에는 테이블과 매트리스 자리가 마련되어 있는데, 이름 그대로 두꺼운 매트리스가 놓여 있는 매트리스 자리는 가운데에 작은 탁자를 고정시켜 놔서 손님들이 주문한 음료나 음식을 올려놓고 매트리스에 앉거나 편히 누울 수 있게 했다. 테이블이든 매트리스든 거의 모든 자리는 앉았을 때 바깥 풍경을 바라볼 수 있도록 방향이 잡혀 있다. 
 

매트리스 자리에 편하게 반쯤 누워 있고 싶었는데 저무는 해가 그쪽 면을 정면으로 쨍하게 비추고 있어서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아빠와 나는 눈 앞에 숲부터 멀리 치앙마이 시내까지 훤히 보이는 쪽의 테이블 자리에 앉았다. 시원한 산바람까지 맞으니 시야는 물론 가슴까지 뻥 뚫린 기분이었다. 이러한 푸핀 테라스의 매력은 이미 우리나라 여행객들에게도 많이 알려져 있어서 우리가 도착했을 때에도 먼저 오신 한국분들이 서너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20대로 보이는 젊은 커플이 두 팀, 아이를 데리고 온 가족이 함께 온 것으로 보이는 팀, 남자 둘이서 온 손님은, 역시나 우리뿐이다.

 

자리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


나 : 차암 신기하지, 택시까지 타고서는 이렇게 찾아오는 손님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는 게.


택시까지 타고 꾸역꾸역 찾아온 내가 한 말에 아빠는 동의한다는 듯 웃었다.
 

내 손으로 책상을 부순 날


나 : 아빠 그거 기억나? 나 중학교 때, 친구 집에서 놀다가 나도 모르게 완전 늦게 집에 들어온 적 있었잖아,  밤 열 한 시에. 내가 책상 부순 날.


아빠 : 응? 몰라.


나 : 왜 아빠가, 너 공부 그렇게 안 할 거면 책상 부수라고 야구 방망이 주고 잠깐 나갔는데 내가 진짜 부숴놨잖아.


아빠 : (웃으며) 기억 안 나.


나 : 안 나? 어떻게 그게 기억이 안 나지. 내가 그 책상 가루가 되도록 부숴놔 가지고 아빠가 엄청 황당해했는데? 그다음 날 바로 새 책상 들어왔는데. 그게 기억이 안 난단 말이야?


아빠 : 아빠가 너한테 공부 안 한다고 공부하라고 다그친 적이 없는데.


나 : 그날 내가 늦게 들어왔거든. 말도 없이. 친구 집에서 게임하다가 시간 가는 줄 몰라 가지고 밤에 열 시 반인가 열한 시에 들어왔단 말이야. 아빠 그때 엄청 화냈어. 그래서 내가 엄청 성실하게 부쉈거든 책상을. 제대로 안 부수면 혼날까 봐.


아빠 : 기억이 없네.


이럴 수가. 아빠가 그때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니. 중학교 때 수업을 마치고 새 게임기를 산 친구 집에 놀러 갔던 나는 마침 친구 집에도 부모님이 계시지 않아 맘 놓고 게임을 할 생각에 부풀어 있었다. 그리고 정말 한 시간쯤 게임을 했다고 생각한 나는 저녁 먹을 시간이 된 것 같아 잠깐 게임을 끄고 밥을 먹자고 친구에게 말하고는 TV 채널을 틀었다. 그런데.


TV 미니시리즈 드라마가 끝나면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고 있는 게 아닌가. 시간이 열한 시가 다 되어 있었다. 아마도 그때 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체험했던 것 같다. 무려 다섯 시간을 한 시간처럼 흘려보냈으니 말이다.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저녁 열 시가 넘어 집에 들어간 적이 없었던 나는 덜컥 겁이 났다. 게다가 연락조차 한 통 하지 않아서 부모님이 걱정하실 것은 물론이고, 집에 들어온 나를 본 부모님의 걱정이 안도가 되고 난 다음 내게 닥칠 화가 뻔히 그려졌다.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딱 봐도 화가 잔뜩 난 아빠가 눈에 한가득 들어왔다.


아빠는 평소에 나랑 가지고 놀던 야구 방망이를 들고 내 방으로 들어와 화를 삭여가며 그렇게 나가서 노는 게 좋으면 공부하지 말고 야구 방망이로 책상을 부수라고 했다. 아빠는 ‘지금 너무 화가 나서 잠깐 바깥바람을 쐬야 할 것 같으니 돌아오기 전까지 책상을 부숴놓지 않으면 그땐 진짜 크게 혼날 줄 알라’고 엄포를 놓고 진짜로 나가버렸다.
 

아빠가 나가고 난 뒤. 나는 울면서 책상에 꽂혀 있는 책을 몽땅 바닥에 내려놓고 서랍을 비워냈다. 그리고는 젖 먹던 힘을 다해 책상을 부쉈다. 제대로 부수지 않으면 혼이 날 것 같아서 서랍은 따로 빼서 부술 정도로 치밀하게 부쉈다. 아빠는 내가 책상을 부수지 못하고 있다가 울면서 잘못했다고 매달릴 줄 알았겠지만 아빠가 간과한 사실이 있다. 나는 아빠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겁쟁이 쫄보다.


바람을 쐬고 돌아와서 내 방에 들어와 가루가 된 책상을 본 아빠의 표정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다음날 내 방에는 반짝반짝하는 새 책상이 들어왔고, 졸지에 늦게까지 놀다 들어온 아들에게 새 책상을 사주는 인자함을 발휘한 아빠는 ‘야구 방망이로 널 잘못 가르친 아빠를 때리라고 했으면 큰일이 날 뻔했다’며 어이없어했다.


그런 황당한 사건을 아빠가 기억하지 못하다니. 아빠와 나 사이에도 서로 중하게 여기는 기억이 이렇게나 다를 수가 있구나 새삼 깨닫는다. 그래도 기억력 좋은 거로는 어디 가도 뒤지지 않는 아빠가 얘기를 듣고도 아예 떠올리지 못하는 것은 뜻밖이다.


오히려 아빠는 내 얘기에 이어서 자신이 중학교 때 학교 안 가고 농땡이 피우다 큰아빠에게 혼난 이야기를 무척이나 디테일하게 해 주었다. 아빠는 당시 통학 열차 한 달 요금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열차표 끊을 돈이 없어서 고생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에 수긍이 됐다. 자신에게 닥친 위협에 대한 기억은 확실히 오래가기 마련이다.




내가 태어났던 그날, 그 시절


나 : 아빤 나 태어날 때 뭐 하고 있었어?


아빠 : 예비군 훈련 갔다 왔지.


나 : 아, 그래?


아빠 : 그날, 아침에 엄마가 배 아프다 그러는데 예비군 훈련을 나간 거야.


나 : 그러면, 내가 점심때 태어났다며, 아빠는 끝나고 온 거야?


아빠 : 그럼, 끝나고 오니까.


나 : 이미 낳았어?


아빠 : 그래, OOO 산부인과 동인천에. 지금 없어졌잖아. 너희 큰 이모가 거기 와서 봐줬지.


나 : 아빠가 언제 인천에 왔지?


아빤 내가 태어나기 한 해 전인 1982년에 강원도를 떠나 인천에 왔다. 믿을 구석이라고는 당시 인천에 살고 있던 아빠의 처형, 그러니까 나에게는 큰 이모와 이모부 밖에 없었다. 이모부 지인의 소개로 화학 회사에 임시직으로 들어가 4, 5년을 일했다. 화학약품 때문에 몸도 상하고 중간에 한 번은 불이 나서 화약약품이 얼굴에 튀는 아찔한 사고까지 있었다. 
 

몇 년을 일해도 정규직을 시켜줄 것 같지도 않은 상황에서 아빠는 회사를 나와 우유배달을 시작했다. 우유배달을 하는 아빠 모습은 나도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연세우유를 배달하는 아빠를 보면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대학은 당연히(?) 연세대학교가 되었다. 그 이후로 아무 이유 없이 농구대잔치를 보면서도 연세대학교만 응원했다. 아빠는 2년 간 우유 배달을 하면서 우유 넣는 집을 제법 여러 군데 뚫었지만 그러다 오토바이 사고를 당했다. 비가 많이 오는 날 우유대금을 주지 않고 먼 동네로 이사를 가버린 집에 찾아가서 우윳값을 받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빠는 두 달 가까이 병원신세를 졌고 그 사이 우유 넣던 집들은 다들 다른 배달원에게 우유를 받아먹게 되어 퇴원 후에는 다른 일을 찾아야 했다. 내게는 그저 아빠가 입원했던 병원 이름과 병실 분위기에 대한 기억만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아빠 : 지금은 이런 생각도 해. 그때 인천 안 오고 시골에, 강원도에 친구들도 있었으니까. 강원도에 만약에 계속 있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살긴 살았겠지. 근데 너희들 공부시키고 그러는 건 진짜 힘들었을 거야.


오전에 갔던 카페에서부터 아빠는 자꾸 '만약'을 이야기한다. 후회라기보다는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막연한 궁금함이랄까. '살긴 살았겠지'라는 아빠 말이 그때 대화의 녹음 파일을 듣고 있는 내 귀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온다. 뭘 하든 살긴 살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푸핀 테라스의 매트리스 자리를 눈부시게 때리던 해가 저 산 너머로 기울어 가는 동안 의식의 흐름대로 아무렇게나 이어지는 아빠와의 대화도 흘러가고 있었다. '우리 집안이 그렇게 머리가 좋은 집안은 아닌 것 같다'라는 내 말에 대한 '함 씨가 원래 무신 집안이었다'는 아빠의 대답에는 실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너무 졸렬한 변명'이라고 타박하는 내게 아빠는 갑자기 집안의 시조부터 시작하는 내력을 줄줄 늘어놓았다. 그러다 헤어 나올 수 없는 군대 이야기까지.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하늘에 본격적으로 노란 물이 들어갈 무렵 자리를 뜨려고 하는데 누나에게서 영상통화가 걸려왔다. 누나는 통화가 연결되자 옆에서 놀고 있던 조카를 불러와 앉혔다. 이제 막 열 살이 된 조카를 보며 통화하는 아빠의 얼굴이 마냥 밝아졌다. 화학약품 공장에 다니고 우유 배달을 했던 30대의 아빠가 할아버지가 된 현재로 다시 돌아왔다.



이전 04화 Day 2-1. 아빠의 진로상담과 졸혼 이야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