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여덟, 아빠와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아빠와 나 0
이 글은 내가 아빠에게 주는 선물이다.
아빠는 40대를 지나면서, 그러니까 내가 중학교에 다니고 있을 무렵부터 혈압약을 먹기 시작했다. 술, 담배를 하지 않고 등산을 좋아하는 아빠가 고혈압을 갖게 된 것은 할머니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아빠는 그때부터 최소한 20년 이상 매일 아침마다 혈압약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 올해 서른여덟인 나는, 아직 파릇파릇한 혈압약 3년 차다. 아빠의 유전자 덕분인지 고약한 내 생활습관 때문인지는 몰라도 굳이 그런 걸 앞서 나갈 필요는 없는데 아빠보다 혈압약을 시작한 나이가 훨씬 빠르다. 그런 이유로 여행지에서 맞이하는 첫 아침, 부자는 나란히 혈압약을 먹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치앙마이의 1월 날씨는 우리나라의 늦여름, 초가을과 비슷하다. 아침, 저녁으로는 자못 선선한 기운이 돌지만 낮 기온은 30도까지 올라간다. 다행히 이즈음의 치앙마이는 건기이기 때문에 대낮의 햇볕은 강렬하지만 후텁지근하지 않아 그늘에 있으면 견딜 만하다.
일어나자마자 호텔방 창문을 열고 발코니에서 맞이한 아침 공기는 약간 서늘한 기운이 있어서 더 맑게 느껴졌다(사실 이맘때는 주변 산지에서 화전을 하는 시기와도 겹치기 때문에 공기 자체는 맑지 않는 날이 더 많다).
적당히 편한 옷으로 갈아 입고 아빠와 함께 1층 식당으로 내려갔다.
여행을 오기 전, 숙소를 고를 때 할 수 있는 한 꼼꼼하게 호텔에 대한 상세 정보를 찾아보는 편이어서 호텔에 대한 온갖 후기와 사진을 뒤져보았지만 조식 메뉴에 대한 사진은 찾지 못했었다. 그저 '조식은 그럭저럭 괜찮았어요'라던가, '먹을 만했어요' 정도의 도저히 실상(?)을 파악할 수 없는 후기 만을 몇 개 확인했을 뿐이었다.
비용 부담이 확 늘어나는 수준이 아니라면 호텔 예약을 할 때는 가급적 조식을 포함시키는 게 여러모로 좋은 점이 많다. 아침에 일어나서 별다른 준비 없이 그대로 밥상으로 직행할 수 있다는 점이 그렇다. 아침 시간에 문을 여는 식당을 애써 찾아내서 채비를 한 상태로 호텔 밖으로 나서는 귀찮음을 감수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 호텔 조식의 장점은 충분하다.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할 때는 더욱 그러한데, 30대 후반 나이인 내 경우엔 아침 정도는 그냥 건너뛰었다가 점심을 첫끼니로 시작해도 되고 정 배가 고프면 10시나 11시처럼 어설픈 시간에 적당히 어설프게나마 간편하게 '아점'으로 때워도 좋지만 아빠처럼 연세가 있는 분들은 어지간해서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뭐라도 챙겨 드시는 게 몸에 배어있어서 될 수 있으면 제대로 된 아침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해두는 것이 좋다.
아빠 : 근데 아침 아예 안 먹고 나오면 일 못해. 열 시 반쯤 넘어가면…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날, 브런치 식당에서 아침을 먹다가 아빠가 했던 말이다. 지난해 공공근로를 할 때 이야기였는데, 뭐라도 간단하게 챙겨 먹고 나가지 않으면 기운이 없어 일을 못한다고.
부모님을 모시고 간 여행에서 호텔 조식이 주는 미덕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오랜 세월 한식 입맛에 길들여진 부모님 세대의 대부분은 외국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진수성찬을 앞에 놓고도 고생 아닌 고생을 하신다. 특히나 동남아 국가 음식이나 중국 음식은 향신료가 강해서 더욱 그렇다. 그나마 호텔 조식은 빵, 볶음밥, 면 등 태국식과 서양식 음식을 다양하게 갖추어 놓고 있는 경우가 많아 선택의 폭이 넓고, 같은 태국 음식이더라도 해외 여행객 입맛에 맞추어 조리했기 때문에 비교적 향이 덜하다. 이렇듯 호텔 조식은 기호에 따라 토스트에 계란 후라이, 소시지를 먹거나 간이 세지 않은 볶음밥을 먹을 수 있어서 어지간해서는 실패할 일이 없다.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다녀온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나는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음식 걱정을 그렇게 크게 하지는 않았다. 2년 전 양가 부모님을 모시고 아내와 함께 방콕에 갔을 때 아빠가 별 말없이 웬만한 태국 음식을 고루 잘 드셨기에 부담이 덜했다. 그게 바로 이번 여행지를 태국으로 정한 이유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1층 식당은 한산했다. 우리 말고 세 팀이 테이블에 앉아 각자의 취향대로 아침을 먹고 있었다. 후기만으로는 알 길이 없었던 호텔 조식에 대한 아빠와 나의 소감은 '그럭저럭 괜찮았'고 '먹을 만했'다. 다른 사람이 하는 말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아주 화려하지도 종류가 엄청 다양하지도 않지만 그럭저럭 골라 먹을 수 있는 가짓수의 음식이 있었고 그 음식들이 대부분 먹을 만했다.
아빠 : 오늘은 계획이 어떻게 돼?
나 : 오늘은 거창하게 계획이랄 것도 없어. 어제 오느라 고생했으니까 오늘은 발마사지 받고 슬슬 걸어 다니다가 힘들면 카페에서 쉬고, 또 걷다가 목마르면 뭣좀 마시고 끼니때 되면 밥 먹고 그게 다야
"태국 가서 하면 할수록 돈 버는 느낌이 드는 게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열대 과일 사 먹는 거고 다른 하나는 타이마사지받는 거야"
몇 년 전, 태국에 처음 가게 된 나에게 지인이 해준 말이다.
태국에 다녀와서 생각해보니 허튼 구석이 없는 소리였다. 전반적으로 태국 물가가 한국보다 싸긴 하지만 이 두 가지는 그중에서도 유난히 가격 차이가 많이 나는 축에 속한다. 게다가 우리나라에 비해 훨씬 흔하다. 열대 과일은 마트와 시장, 길거리 노점에 말 그대로 지천에 널려 있고, 방콕이나 치앙마이의 번화가에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서너 건물마다 하나씩 마사지샵이 있어서 편의점을 찾는 것보다 마사지샵을 찾는 편이 수월할 때가 있을 정도였다.
치앙마이에 오기 전 일정을 짜면서 날짜마다 방문할 식당과 카페는 내가 이미 가본 곳과 아빠와 가보면 좋을 곳을 섞어 미리 후보군을 정해두었으나 마사지샵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가본 곳 중 만족스러웠던 데가 없지는 않았지만 같은 마사지샵이라 하더라도 배정받는 마사지사에 따라, 방문하는 사람의 마사지 취향에 따라 소감이 제각각이라 그랬다. 비용이 상대적으로 더 드는 고급 스파라면 시설이나 전반적인 서비스에 대한 후기를 체크하고 여러 곳을 비교해봤겠지만 일반적인 마사지샵에서 받는 발마사지를 그렇게까지 꼼꼼하게 알아볼 필요는 없었다. 무엇보다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 간단한 마사지는 그날 컨디션에 따라 '땡길 때', '멀지 않은 곳'에서 받는 게 최고다. 무엇이든 만족도를 높이려면 가장 필요한 순간에 찾아야 한다.
전날 이동의 피로감도 있고 해서 조식을 먹은 뒤 방에서 푸지게 쉬다가 오전 11시가 되어서야 호텔에서 나와 근처에 있는 마사지샵을 지도 앱으로 검색했다. 걸어서 5분 거리 이내에 있는 곳만 대여섯 곳이 넘어서 평점과 후기를 대충 훑은 뒤 가장 무난해 보이는 곳을 골랐다. 그런데 직접 가서 간판을 보니 가장 무난한 줄 알았던 이곳의 가장 무난하지 않은 점이 바로 눈에 띄었다.
Women's massage center by ex-prisoners
우먼 마사지센터 바이 엑스-프리즈너. 단어 순으로 직역하면 '여성 마사지센터, 전 재소자들의', 그러니까 여성 출소자들의 마사지센터다.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출소한 여성들이 마사지사로 일하는가 보다. 처음에는 그저 이색적이라는 느낌만 들었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태국에서 재소자 직업 교육을 하기에 마사지만큼 적당한 것도 없겠다 싶었다.
외관으로 보나 내부로 보나 간판의 내용만 빼놓고 보면 치앙마이의 여느 마사지샵과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어떤 사람이 후기에 '다 좋은데 마시지 하시는 분들이 너무 잡담을 한다'라고 남겼던 것이 생각났다. 그 또한 일하는 분들의 개인 차겠거니 했는데 아무래도 그 후기를 남긴 사람에게 마사지를 하셨던 분이 내 앞에 계신 것 같다. 한 시간 내내 아빠를 마사지하고 계신 옆의 분과 쉴 새 없이 이야기를 하신다. 개의치는 않았다. 나한테나 지금 한 시간이 순식간이지 일하는 사람에게는 지루한 근무 시간일 텐데 수다라도 떠는 편이 훨씬 나을 게다. 내가 유별나게 관대한 손님이라서가 아니라 ‘시원하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마사지 제일주의’를 가졌기 때문이다.
나 : 아빠, 여기 마사지하시는 분들이 교도소에서 출소하신 분들인가 봐. 여기 간판에 쓰여 있었어.
마사지하시는 분들이 한국어를 알아들을 가능성은 몹시 낮지만 혹시 몰라 옆에 누운 아빠에게 속삭였다.
아빠 : 그래? ... 나는 잘 모르겠는데...
아빠도 참, 그걸 미리 알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휴대폰 장기에 빠진 아빠는 별 반응이 없다. 아빠는 여행 내내 틈날 때마다 (아마도 저 멀리 한국땅에서 휴대폰을 들고 같은 장기 게임을 켠 얼굴 모를 이들과) 모바일 장기 대국을 벌였다. 나는 나대로 발마사지를 받으며 휴대폰으로 포털 뉴스 게시판을 훑었다. 남녀노소와 국적을 막론하고 태국에서 발마사지를 받는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모습은 둘 중 하나다. 휴대폰을 보거나, 잠을 자고 있거나.
발마사지를 받는 편안함과 시원함, 여행지에서 누리는 호사와 안락함에 슬며시 취해갈 때쯤 지금까지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려 아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빠가 어느새 잠들어 낮은 소리로 코를 고는 소리였다. 아빠의 코 고는 소리가 한 번씩 높아질 때마다 발마사지를 해주시는 분들이 따라서 키득거렸다.
발마사지를 받으며 한숨 거하게 주무신 아빠는 기지개를 켜며 마사지샵을 나왔다.
나 : 시원했어?
아빠 : 그렇지 뭐, 나는 어디 비싼 데 가서 찜질하고 오일 바르고 하는 것보다 이게 좋아.
재작년에 양가 부모님을 모시고 방콕에 갔을 때에도 부모님들은 웬일인지 십만 원(2500 바트)이 넘는 두 시간짜리 스파 마사지보다 길거리 마사지샵에서 한 시간에 만 원(250바트)을 주고받는 발마사지를 더 만족스러워하셨더랬다. 자식들 부담주기 싫어서 하시는 말씀이라고만 생각하기에는 표정에 나타나는 만족도의 차이가 확 눈에 띄었던 기억이 있는데, 다녀온 후에도 부모님들은 방콕에서 받았던 마시지 얘기가 나오면 카오산로드에서 받았던 발마사지 이야기를 먼저 하신다.
마사지샵에서 100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팩트 카페가 있다. 작년에 혼자 치앙마이에 왔을 때에도 작업하던 공유 오피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 가끔 들렀던 카페다. 높은 층고에 세련된 인테리어가 쾌적한 느낌을 주는데, 갤러리 카페에 걸맞게 사무실에서 쓰는 모니터 크기의 작은 그림에서부터 높이가 사람 키를 훌쩍 넘는 대형 그림까지 많은 수의 작품이 각기 제멋대로인 듯 어우러지는 듯하며 멋들어진 분위기가 난다. 이곳에는 여느 카페에서 주문할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커피, 음료 외에도 팩트 넘버 원(Fact No.1), 팩트 넘버 투(Fact No.2)라는 시그니처 커피 메뉴가 있다. 단 걸 좋아하는 아빠에게는 팩트 넘버 원을 추천했다. 타이 밀크티가 섞여 있어 달달한 스타일의 커피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이번에 여행을 오면서 아빠의 커피 취향을 처음으로 확실히 알게 됐다. 아메리카노에 시럽을 두어 번 짜서 넣는 단맛 아메리카노. 그래서 타이 밀크티가 들어간 이곳의 시그니처 커피를 추천했던 것인데 그게 아빠 입맛에는 별로였나 보다. 카페에서 아빠가 빨대로 커피를 한 모금 마실 때마다 '나랑 안 맞아' 소리를 들어야 했다.
아빠는 자리에 앉고서도 두리번거리며 빽빽하게 걸려 있는 그림들을 구경했다.
아빠 : 우리나라 요즘 카페들처럼 여기 카페도 천장을 그대로 드러내 놓고 있네, 그런데 그림이 한두 점 있는 게 아니라 너무 많이 걸려 있어서 어지럽다.
아빠 : 가끔 시간 나면 송도 인천대학교 쪽에 해변, 바닷가 보이는 카페가 있어서 주차해놓고 커피 한 잔 시켜 놓고 책도 보고하는데, 작년에도 1, 2월 달에 취직하기 전에 머리 식히고... 올 해도 거기 한 두어 번 갔다 왔는데.
나 : 아빤 카페 가면, 혼자가?
아빠 : 거기 갈 땐 혼자 조용하게 책 한 권 가져가서 그냥.
나 : 가면 얼마씩 있다 와?
아빠 : 한 시간, 한 시간 반?
나 : 근데 거기까지가?(집에서 차로 20분 정도 가야 하는 거리) 카페를 찾아서 거기까지가?(웃음)
아빠 : 동네에 있는 카페들은 시끄럽고 북적거리고, 거기 가면 젊은 사람들 나와 있고 직장인들도 나와서 시간 보내고 하니까.
나 : 무슨 책 봐?
아빠 : 교회 쪽에서 나온 책들(기독교 서적)이지 뭐
아빠는 요즘 혼자서 카페에 가기도 하는구나. 책을 좋아하고 커피도 좋아하는 아빠가 혼자서 책 들고 카페 가는 일이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건만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취직을 하고, 부모님이 살고 있는 집에서 나와 살고, 결혼을 하면서 점점 흐려진 것들 가운데 하나는 엄마, 아빠의 일상이다. 같이 살던 시절에는 그래도 아빠가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고 왔는지, 평소에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런 일상은 소소하지만 한 사람의 현재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지난 5, 6년 동안 자각하지 못한 사이에 내게서 아빠의 일상은 흐려지고만 있었다.
카페에서 혼자 책을 읽고 있는 아빠를 떠올리는 것이 어색했던 건, 내가 한 번도 그런 아빠의 모습을 그려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빠의 일상을 궁금해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누군가의 일상을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관심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쓰리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친구처럼 편한 아빠와 아들 사이, 종종 안부 전화를 하고 건강을 염려하고 집안 대소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의견을 나누기도 했지만 내가 가진 관심의 총량에서 아빠의 지분은 크지 않았다.
아빠는 젊어서부터 손재주가 좋았다. 나무로 이것저것 뚝딱뚝딱 만들기를 좋아하고 아는 사람 집에 보일러나 수도를 손봐주러 다니기도 많이 했다. 정년퇴직 후에는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교육 프로그램에 지원해서 목공을 몇 달 배우러 다녔는데 그때 만든 책상과 서랍장, 선반을 아빠는 지금도 집에서 쓰고 있다.
교회 지하실 수리한 얘기, 요즘 공공근로 쉬는 동안 인테리어 공사하는 곳에 갔던 얘기를 하던 아빠가 불쑥 다른 말을 꺼냈다.
아빠 : 아빠도 어떻게 생각하면 직장 생활 20, 30년 잘했지만 그러지 않고 그냥 인테리어나 뭐 하나를 확실한 주특기를 해 가지고 자격증을 좀 따던지 뭘 배워놨더라면...(흐흐 웃음) 그게 후회스러워. 그다음에 강원도 인제 시골에 있을 때 친구들, 친구들은 (농사 끝난) 겨울에 서울로 도망가서 기술 배운다 뭐 한다... 아빠는 그때만 해도 교회 다니면서 착하게 할아버지, 할머니 말 잘 듣고 살면 될 줄 알고. 지금 친구 아무개는 기술 장인이 되고 또 누구는 뭐가 되고. 그럴 때 기술을 배우려고 막 튀어나가지 못한 게(후회가 된다), 마음이 약해서.
아빠는 가끔 '그랬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나보다. 공부를 곧잘 했지만 먹고살 길을 찾아 가족이 강원도 산골로 이주하는 바람에 중학교를 중도에 그만두었고, 결혼하고 나서도 농사지으면서 계속 살고 싶었지만 딸(누나)을 낳은 뒤 먹고살 길을 찾아 인천으로 이주했다. 인천에 와서는 당장 일자리가 주어지는 게 중요하지 무슨 일을 할까 고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으므로, 되는 대로 일을 하다가 괜찮은 일자리를 얻어서 30년 가까이 한 곳에서 일한 끝에 정년이 되어 퇴직했다. 그러니까 아빠는 딱히 자신의 진로를 정한 기억이 없다. 뿌옇고 막막한 안갯속에서 먹고살 길을 더듬거리며 찾아 걸었을 뿐이다.
나 : 그렇게 따지면 지금 틈틈이 배워도 늦지가 않은 게, 물론 아빠가 이미... 이미 충분히 늙었지만(웃음) 그래도 아빠도 최소한 20년은 넘게 남았다고 생각해야 돼. 건강관리 잘하고...
그렇게 나는 생각지도 못하게 치앙마이의 한 카페에서 내일모레면 칠십이 되는 아빠의 진로 상담을 한다.
나 : 인테리어가 아니더라도 나무로 뚝딱뚝딱 만드는 거도 교육받아가지고 열심히 하다가(지금은 잘 안하잖아)... 아빠가 취미 수준까지는 금방 배워서 잘하는데 이걸 남들한테 돈 받고 내놓기에는 당연히 모자란 거지.
아빠 : 지금 모자라지
나 : 그건 당연한 건데, 거기서 더 해야 하는데 아빠가 그 수준에서 다른 걸 해(웃음).
아빠 : 그런 걸 하고 싶은데 못하는 거지.
나 : 아니, 못할 이유가 어딨어.
아빠 : 퇴직하고 시골 같은 데 가서 취미 생활을 하면서 살고 싶었은데.
나 : 요즘 젊은 사람들도 처음부터 프로페셔널하게 뭘 해서 이걸로 돈을 벌어야겠다 하고 시작하는 게 아니라 좋아해서 취미로 하다가 더 깊이 좋아하면 그걸로 나중에 돈을 벌기도 하고 그러는 거지. 생각해봐, 아빠랑 같이 시설 관리하는 어르신들 70대 중반도 계시다고는 하지만 아빠가 나중에 일흔 두세 살만 넘어가도 몸에 힘이 부칠 텐데... 지금부터 취미 생활 부지런히 하면 혹시 알아? 나중에 아빠가 좋아하는 목공이 직업이 될지.
아빠 : 그래서 조용하게 시골 가서, 그런 거 하면서 있으면...
나 : 아빠는 시골 가면 무조건 별거해야 돼. 졸혼해야 돼 졸혼. (웃음) 엄마가 참도 따라가겠다.
아빠 : 안 간다 그랬어 엄마가. 혼자 가래.
나 : 요새 트렌드라고 하잖아. 졸혼.
아빠 : 졸혼하고 싶어. 아빠가 <나는 자연인이다>, <극한 직업> 그런 거 보면 집 짓고 사는 거 많이 나오잖아. 쭉 보는데, 보면서도 저거 내가 할 수 있는데 그런 생각이 들어.
나 : 아빠는 졸혼하는 거에, 요새 추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아빠 : 그거 좋아. (엄마랑)시골 가서 같이 못하니까.
나 : 나는 그게 서로에게 진짜 좋은 것 같기도 해.
아빠 : 그런데 걱정되는 건, 아빠는 내려가면 혼자 거기서 지루하다는 생각도 안 들고 뭘 해도 하니깐, 엄마가 여기 있으면 엄마 지금 시력이 아예 안 좋거든, 한쪽 시력이 아예. 그래서 엄마가 걱정이 돼. 그래서 엄마한테 간다 소리도 못해.
아빠는 십수 년 전부터 툭하면 ‘은퇴하면 시골 가서 살고 싶다’는 얘길 했었다. 가끔은 꼭 하고 싶은 장래 희망처럼 그 말을 꺼낼 때도 있고 엄마랑 다투기라도 한 날에는 속이 상해서 '자꾸 그러면 다 놓고 그냥 혼자 시골 갈 거다'라며 마치 선언이라도 하듯이 엄포를 놨다. 의도야 어찌 됐든 노년의 아빠가 꾸는 꿈의 무대가 시골인 것만은 분명하다. 절대로 시골에는 못 내려간다는 엄마를 두고 혼자서라도 가고 싶다고는 하지만 당분간 그렇게 될 일은 없을 것 같다. 아빠는 혼자 남을 엄마에 대한 걱정과 함께 현실적인, 그러니까 돈 걱정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서 했다. 아빠가 시골에 터를 잡고 목공일을 하면서 사는 그날이 과연 올까.
그건 그렇고, 아빠와 졸혼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될 줄이야. 내가 중학생일 때 아빠는 돈 문제로 사고를 치고(이상한 곳에 돈을 넣었다가 홀라당 날려 드셨다. 아빠는 투자를 한다고 생각했지만 결과는 사기였다) 그걸 거짓말로 덮으려다 엄마와 사이가 아주 안 좋아졌다. 이혼의 문턱까지 갔던 그 상황에서 엄마, 아빠가 이혼하면 무슨 하늘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겁이 났던 나는 울면서 제발 우리 엄마, 아빠 이혼하지 않게 해달라고 주문을 외듯이 기도를 했는데 지금은 ‘졸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라는 말을 잘도 하고 있다. 졸혼이 무슨 법적 절차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저 '살만큼 살았으니 이제 자기 하고 싶은 거 하면서 각자 살자'는 것이지만 그 사이 세상도, 나도 참 많이 변했구나 싶다.
아빠는 어쩔 수 없이 중학교를 그만두고 가족과 함께 강원도 인제 산골에 들어간 후로 20대 중반까지 그곳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다. 아빠가 학교를 그만두어야만 했던 이유, 산골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게 된 것, 그리고 처자식을 데리고 인천에 나와 살게 된 것은 굳이 이유를 찾자면 모두 할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빠 : 우리 집안 얘기를 내가 해보면, 너희 할아버지가 지금 사람으로 말하면 거의 무능했지. 너희 증조할아버지가 딸만 넷, 마지막에 할아버지 낳았는데 할아버지 두 살 때 증조할아버지가 마흔두 살에 돌아가셨어. 나이는 두 살이지만 막 돌 지날 때니까 할머니가 마지막에 아들 하나 있는데 돌 지나고 홍역을 앓아가지고... 그러니까 이 아들을 살리려고 정신없이 할아버지 안고 고개 넘어서 몇 리 길을 걸어서 왔다 갔다 하니까 나중에는 아예 정신도 없고 그러다가 병원 가 있고 하면서 증조할아버지 죽은 줄도 몰랐다는 거야. 그러고 나서도 아들 하나 살리려고 감쌌던 거지. 그러니까 약하게 컸지 뭐. 그리고 고모들하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 할아버지가. 옛날에 집안에 재산 있던 거 고모부들이 땅 다 팔아도 아무도 몰랐으니까. 약하게 컸지, 할 줄 아는 것도 별로 없지. 전쟁 나면서 바로 위에 고모가 강릉서 비단장사하는 거 좀 도와주고... 할아버지는 평생에 직장을 가져본 일이 없이 살았던 거야.
할아버지는 내가 열 살 되던 해 1월에 돌아가셨다. 내가 기억하는 할아버지는 천식으로 늘 기침을 하는 모습이다. 돌 지나고 앓았던 홍역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몸이 약해서 몸 쓰는 일은 오래 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
아빠 : 전쟁 때 1.4 후퇴하면서 함흥에서 미군 수송선 타고 거제도 피난 가서 몇 달 살고, 아빠가 경주에서 태어났단 말이야. 경주에서 몇 달 살고, 대구. 아빠 다섯 살 때 아무것도 모르는 묵호로 다시 왔지. 할아버지가 손재주는 있어서 판금이라 그러나 그거밖에 할 게 없으니까... 동해에서 오징어잡이 배도 탔다가, 할아버지 몸이 약해서 오래 못 타잖아. 진짜 배곯을 때 3일 굶어봤다. 인제에 가서 농사지으면 자식들 배는 안 곯겠지 하고 이사 와서, 거기 화전민이 일구어 놓은 밭을 할아버지가 무지해서 묵호에 있는 집을 판 돈으로 산 거야. 사기당한 거지, 땅 주인도 아닌 화전민한테 돈을 주고 샀으니까. 그래서 몇 킬로 더 들어가는 산골에 들어가서 땅 빌려서 소작하고, 남의 소 대신 키워서 돈 받고, 그걸로 소도 사고, 소 팔아서 땅 샀는데 군대 간 사이에 할아버지가 땅을 또 팔고...
할아버지가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지 못하셨더라면(할아버지는 전쟁 때 인민군에 잡혀 북으로 끌려가다가 맨발로 도망쳐 나와 며칠이고 걷고 걸어 남쪽으로 내려온 적도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 이 시간에 살아있는 내 모습이 너무 당연하다고 느껴지다가도 그런 생각을 하면 묘한 기분이 든다. 아빠가, 할아버지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 중 누군가가 단 한 분, 단 한순간이라도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다른 결과를 맞이했을 수 있었다. 그건 엄마와 할머니, 할머니의 할머니들도 마찬가지다.
홍역을 크게 앓고 나서 평생 약한 몸을 이끌고 살아야 했던, 늦둥이로 귀하게만 자라 무능했던 할아버지 덕에 아빠는 어려서부터 배고픔과 고생을 한 몸으로 알고 살았지만 그래도 할아버지가 할아버지로 존재해주었기에 지금 아빠와 내가 치앙마이 카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다. 철저히 원망스러운 부모라도 존재를 부정하는 순간 나의 존재도 없어지는 아이러니다. (아빠가 할아버지를 그토록 원망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빠의 어린 시절 이야기,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예전부터 종종 들어왔지만 이렇게 상세하게 오랜 시간 전체 이야기를 듣는 것은 거의 처음이었다. 아빠는 치앙마이에서 나와 다니는 동안 할아버지와의 추억에 대한 이야기를 불쑥, 자주 꺼냈다. 아직 아이는 없지만 먼 훗날 내가 자식에게 '너희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나는 어떤 기억을 꺼낼까. 아빠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해주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