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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홀짝 Sep 30. 2020

Day 1 - 아들의 불효 마일리지로 떠나는 여행

서른 여덟, 아빠와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나는 불효를 많이 했잖아"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주인공의 엄마는 아들에게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다’고 말하는데, 무엇을 잡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약간 다른 식으로 여행을 초콜릿 상자에 비유하자면 여행은 마치 낱개 포장이 되어 있는 초콜릿 상자를 열어 여행일 수만큼의 초콜릿을 한 개, 한 개 까서 먹는 일인 것 같다. 공항으로 향하는 인천대교를 건널 때의 기분은 초콜릿 상자의 포장지를 채 뜯기도 전의 설렘과 여유로움이 있다. 여행지에 도착하는 그 순간부터 여행의 즐거움과는 별개로 점점 줄어드는 남은 시간을 헤아리는 아쉬움이 쌓여갈 테니 출발 직전의 이 시간이 오히려 여행의 정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여행의 시작, 인천공항 가는 길은 몇 번을 겪어도 새롭다.

 

아빠 : 이게 무슨 일인가 싶지 뭐. 아빠는 상상도 못 했어.
 

장가까지 보낸 다 큰 아들과 둘이서 해외여행을, 그것도 8박 9일 씩이나 가게 된 아빠는 출발하는 기분이 어떠냐는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  
 

나 : 교회 분들한테 엄청 자랑했겠네?


아빠 : 그럼 다 얘기했지. 다들 아들 대단하다고 그러지. 그런 생각을 다 할 수가 있냐고.


나 : 너무 자랑하지는 마 아빠, 단둘이 가기 어색하니까 보통은 가족들이 다 같이 가는 거지 요즘은 자식이 부모 모시고 많이들 갔다 오잖아.


교회 장로님인 아빠는 이번 주 주일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게 된 것을 교회 분들에게 미리 알려야 했을 텐데 그 이유를 이야기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자연스러운 자랑이었을 터, 예상 못했던 바도 아니고 말린다고 말릴 수도 없는 일이지만 갑자기 교회에서 내가 '굉장한 효자'가 되는 게 영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나 : 그리고 나는... 불효를 많이 했잖아.


멋쩍어 한 말이지만 사실이 그랬다. 어쩌면 아빠의 이번 여행은 그간 적립한 '속상 마일리지'덕일지 모른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부지런히 체크인을 하고 미리 모바일 앱으로 환전해둔 태국 바트화를 찾았다. 일찌감치 면세 구역에 들어가서 이른 저녁을 먹고 탑승 시간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아빠의 화장품


크고 작은 돌발상황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여행은 없지 싶다. 이번 여행의 첫 번째 돌발상황은 비교적 사소했지만 돌발이라는 말에 어울리게 뜻밖이었다.


보안 직원 : 아버님, 캐리어를 좀 열어주셔야겠는데요.


출국 심사 직전, 짐 검사를 하던 중 공항 보안 직원이 아빠를 잡아세웠다.


보안 직원 : 캐리어 안에 100ml가 넘는 액체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빠가 짐을 잘 쌌는지, 빠뜨린 물건은 없는지 집에서도 한 번 더 체크해보고 꼼꼼히 잘 챙겼다고 생각했는데 짐을 빠뜨리는 문제가 아니라 넣지 말아야 할 것을 넣어서 문제가 생길 거라고는 정말 생각하지 못했다. 당황한 아빠가 허겁지겁 캐리어를 열고 짐을 뒤졌다. 범인은 스킨과 로션. 아빠가 110ml짜리 스킨과 로션을 챙겼을 줄이야.


아빠 : 이거 니 엄마가 비싼 거 준 건데...


버리고 가거나 다시 밖으로 나가서 100ml 용기에 덜어서 들어와야 한다는 말을 들은 아빠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냥 버리고 가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비싼 거'라는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할 수 없이 먼저 면세 구역에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나갔다 오시라 말씀드렸다. 못된 아들이 여행 중 숱하게 부렸던 짜증의 시작이었다. 옆에 있던 공항 보안 직원이 내 표정을 봤다면 '세상에 뭐 저런 놈이 있나' 했을 것이다. 아빠를 모시고 여행을 떠나는 교회의 소문난 효자는 이렇게 쉽게 민낯을 드러냈다.
 

나라가 인정한 노인이 된 아빠


출국 심사를 마치고 나와 우두커니 서서 아빠를 기다렸다. 금세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아빠하고 같이 살았던 시절에는 익숙한 일이었다. 짜증을 내고, 금세 미안해지고, 내가 참 못됐다 생각하고. 뭐, 가끔은 아빠가 내게 괜한 성을 낼 때도 있었지만.


아빠는 30분이 지나서야 면세 구역에 들어왔다. 면세점 쇼핑에는 별 관심이 없는 아빠와 아들은 곧장 푸드코트로 향했다. 저비용 항공사 노선은 기내식이 기본 제공 옵션에 포함되어 있지 않으니 미리 저녁을 먹어둬야 했다. 아빠의 화장품 덕분에 시간을 까먹긴 했지만 탑승 마감 시각까지는 한참이었다.
 

푸드코트 카운터에서 주문과 계산을 하고 적당한 위치의 빈 테이블을 골라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가 주문한 음식이 먼저 나왔다.


나 : 나는 밥 빨리 먹으니까 아빠 먼저 먹고 있어.


자랑은 아니지만 유난히 음식을 빨리 먹는 편이라 차라리 본인 음식이 나중에 나오는 게 편할 때가 많은 아들은 그렇게 얘기해놓고 여유를 부렸다.


내가 주문한 음식은 10분이 더 지나서야 나왔다. 내가 음식 쟁반을 가지고 테이블에 돌아오는 사이 아빠는 빈그릇을 반납하고 돌아왔다. 나는 밥을 빨리 먹는 사람이다. 내가 간과한 것은 내가 밥을 무지 빨리 먹는 사람의 아들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때까진 미처 알지 못했다. 아빠와 붙어 다니게 될 남은 8일 동안 아빠에게서 발견하게 될 내 모습이 그렇게나 많을 줄은.


배를 채웠으니 느긋하게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여행 경비 일체를 아들이 부담하니 공항에서 먹고 마시는 것은 아빠가 쏴야 하지 않겠냐는 나의 도발에 아빠는 별 이의를 달지 않았다. 탑승 게이트 앞 카페에서 커피를 산 아빠는 지갑을 테이블 위에 툭 올려놓았다. 무심코 아빠 지갑을 집어 들어 구경하던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경로 우대 교통카드였다.


65년을 살아내야만 얻을 수 있다는 노인의 증표


아빠가 만 65세를 넘은 기념(?)으로 획득한 지하철 자유이용권을 나는 이때 처음 보았다. 우리 아빠가 어느새 국가가 인정한 노인이 되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아빠의 나이 듦을 모르고 살았던 바는 아니지만 이렇게 경로 우대 카드를 눈으로 보니 또 다른 기분이었다. 말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썩 유쾌한 감정이 아니었다는 건 확실하다.

 

치앙마이 도착


우리가 탄 비행기는 오후 6시에 이륙할 예정이었지만 공항 사정으로 20분가량 늦게 하늘에 올랐다. 비행시간 내내 나는 태블릿에 저장한 영화를 봤고 아빠는 '치매 예방에 좋다는' 스도쿠를 열심히 풀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스도쿠는 아빠의 주된 취미 중 하나가 되어있었다. 가는 동안 아빠와 내 휴대폰의 유심칩을 빼고 한국에서 미리 사둔 태국 유심칩으로 갈아 끼웠다. 몇 천 원이면 여행 내내 태국에서 휴대폰으로 인터넷도 하고 통화도 할 수 있는 세상이다. 아빠에게 유심칩이 바뀌면 휴대폰 번호도 태국 번호로 바뀌기 때문에 전화와 문자 연락은 그 사이 확인할 수 없다고 설명해드렸다. 그때 아빠가 카톡 기능을 거의 모른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자식새끼 키워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이 내 머릿속에서 셀프 재생됐다. 어떨 때는 내가 봐도 세상 참 무심한 아들'놈'이다.
 

예정보다 늦게 출발한 비행기는 역시나 예정 시각 보다 늦게 치앙마이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우리 보다 앞서 착륙한 항공편이 많았는지 입국 심사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공항이 꽉 차 있었다. 비행기가 제때 출발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40분이나 곱씹으며 입국 심사를 기다렸다. 빠르면 밤 열 한 시쯤에는 호텔에 체크인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택시를 타고 호텔에 도착하니 이미 자정을 갓 넘긴 시각이 되어 있었다.


호텔방에 들어와 서둘러 짐을 풀고 씻었는데도 이미 새벽 한 시가 다 되어 있었다. 아빠는 곧장 잠을 청했지만  나는 그냥 잠들기가 아쉬워 호텔 근처를 휘이 돌아다녔다. 혼자 여행 왔을 때도 열흘 가까이 구석구석 돌아다녔던 길이라 다시 걸으니 반가운 사람과 오랜만에 만나는 기분이었다. 근처 골목 길가에 작은 테이블 몇 개 펼친 작은 바에 앉아 병맥주를 홀짝였다. 선 잠을 깬 아빠가 얼른 들어와 자라는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내왔다. 늦었으니 집에 들어오라는 아빠 연락을 받고서 자리를 뜨는 게 얼마만인지 어림이 잡히지도 않았다.


호텔에 돌아와 침대에 누워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빠와 같은 방에서 자는 건 또 얼마만인가 싶다. 여행이라 그런가, 별 거에 다 생각이 많았다.



치앙마이 올드시티와 로지트 호텔


치앙마이 로지트 호텔


치앙마이 시가지는 크게 ‘님만해민’과 ‘올드시티’로 나뉜다. 신 시가지인 님만해민은 구 시가지인 올드시티에 비해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큼직한 건물이 많고, 도로가 널찍하며, 세련된 도시 느낌을 준다. 어디까지나 올드시티에 '비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올드시티는 무너져 내린 성벽과 해자(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밖을 둘러 파서 못으로 만든 곳)가 정사각형 형태로 둘러싸고 있는 치앙마이의 구 시가지다. 수백 년 전 번성했던 란나(lanna) 왕국의 수도였던 이곳은 좁은 도로, 얼기설기 얽혀있는 골목, 낮고 오래된 건물(건물 신축 공사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지만)과 자연환경이 자아내는 아늑하고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특색이다.


올드시티는 옛 왕국의 수도답게 해자를 건너 성 안팎을 오갈 수 있도록 동, 서, 남, 북으로 문이 나 있는데, 이번 여행의 첫 번째 숙소인 로지트 호텔은 올드시티의 북문(北門)인 '창푸악 게이트(Chang phuak Gate)' 근처에 자리 잡고 있다.


8박 9일 동안 아빠와 나는 네 곳의 숙소에 묵을 예정이다. 보통 7~8박이면 숙소는 두 군데 정도로만 잡아서 숙소 간 이동 횟수를 되도록이면 줄이는 것을 선호하지만 치앙마이 외곽으로 나가서 1박을 하는 계획이 끼어 있다 보니 동선에 따라 숙소 이동이 잦아졌다. 그래서 첫 2박은 로지트 호텔에서, 다음 1박은 치앙마이에서 버스로 2시간 거리에 있는 치앙다오에서, 그리고 돌아와 2박은 신 시가지인 님만해민의 호텔, 마지막 3박은 다시 올드시티로 돌아와 마무리하는 것으로 예약해두었다.
 

로지트 호텔은 예약한 호텔 중 1박 당 숙박비가 가장 저렴하다. 여행 첫날 자정이 다 되어서야 체크인할 수 있는 곳이다 보니 비교적 저렴한 숙소를 찾은 이유도 있고, 여행 기간 중 호텔은 뒤로 갈수록 더 비싼 곳을 예약하는 내 취향을 반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2박의 숙박 비용은 세금과 봉사료 포함 7만 5천 원 정도. 1박 당 37,500원의 숙박비에는 2인 조식도 포함되어 있다.
 

저렴한 숙박비가 전부는 아니다. 이 호텔은 규모가 작지 않은 편인 데다 객실도 널찍해서 아빠와 함께 지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2013년에 지어진 곳이라 아무래도 연식이 조금 느껴지긴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이 호텔의 숙박비가 싼 것이니 문제는 아니었다. 조식도 화려하진 않지만 있어야 할 건 다 갖추어서 지내는 동안 '이 돈으로 이런 퀄리티면 나무랄 데가 없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이 호텔이 나에게 제공한 가성비가 뒤에 머물게 될 호텔을 예약하는 데 있어 금전적 선택의 폭을 넓혀주었다.


다만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밤에 실내등을 켰는데도 실내조명이 놀라울 정도로 몹시 어두웠다. 아빠와 나에게는 그조차도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숙박하는 사람에 따라서는 굵직한 불만 사유가 될 수도 있겠다.
 

덧붙여, 이 호텔의 장점이라 할 수 있는 저렴한 숙박비, 그러면서도 괜찮은 규모와 객실 크기, 있을 건 다 있는 조식과 같은 점은 '단체 관광객 숙소'에 가장 어울리는 미덕이기도 한데,  아빠와 내가 머무는 동안 근처 객실에 단체 관광객이 투숙하는 일은 없었다. 덕분에 혹시 모를 소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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