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여덟, 아빠와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Day 2(3) - 예순여덟 어린이와 피자를 먹다 아름다운 오해가 풀렸다
다른 손님을 태우고 푸핀 테라스에 올라온 그랩 기사를 운 좋게 만나 기다리는 시간 없이 바로 차에 탔다. 치앙마이 시내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푸핀 테라스 주변은 지나가는 그랩 카가 거의 없어서 자칫 30분 이상을 기다리는 수도 있다. 정 안되면 여기서 일하는 스탭에게 따로 차량을 불러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는데 마침 손님을 태우고 이제 막 도착한 차량을 발견했으니 반갑지 않을 수가!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고 나서 도착한 우리는 호텔방에 들어와 잠시 동안 각자 쉬는 시간을 가졌다. 하루 종일 둘이 붙어 있어야 하는 여행 중에 이렇게 틈틈이 혼자 시간을 갖는 것은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아무리 아빠와 아들 관계라 할지라도 나 하나만 신경 쓰는 것만큼 편하지는 않다. 지금처럼 잠시 숙소에 들러 쉴 때, 그날 일정을 마치고 들어와 잠들기까지의 시간이 여행 중 누리는 각자의 시간이다. 이때에 나는 주로 그날 찍은 사진과 녹음 파일을 노트북에 옮기고,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메모하고 정리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30분 후 호텔에서 나와 곧장 창푸악 게이트로 향했다. 치앙마이 북문인 창푸악 게이트 길 건너편에는 밤마다 먹거리 노점들이 도로변을 따라 들어서는데 숙소에서 도보 1~2분 거리여서 부담이 없다. 이미 환하게 밤거리를 밝히고 있는 창푸악 야시장에는 과일 주스를 파는 가게, 국숫집, 해산물 구이를 파는 곳, 꼬치구이집 등 저마다 팔고 있는 메뉴도 다양했다. 점포마다 펼쳐 놓은 접이식 플라스틱 테이블에는 먼저 온 손님들이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중에서 태국식 족발 밥 '카오 카 무'를 파는 가게를 찾았다. 방콕에 갔을 때 유명 맛집으로 우리나라 방송에도 소개된 곳에서 처음 먹었던 카오 카 무는 달짝지근한 간장 소스에 푹 삶아낸 족발을 흰밥과 함께 먹는 음식이다. 고기가 족발 부위라는 점만 빼면 달달한 돼지 장조림을 연상시키는 이 음식은 족발의 쫀득한 껍질 부위와 푹 삶아 한껏 부드러워진 고기 부분이 소스와 무척 잘 어울려서 족발 싫어하는 사람을 제외하면 한국 사람 대부분의 입맛에도 잘 맞는다. 그래서 '당연히' 아빠도 무난하게 좋아할 거라 생각하고 선택한 메뉴였다.
아빠 : 별로다.
딱 한 입을 먹고 나서 아빠가 말했다.
나 : 맛이 없어? 아니, 이게 왜?
아빠 : 뭘 왜는 왜야, 맛이 별로니까 별로라고 하지.
의외의 반응에 당황한 마음 반, 제대로 먹어보지도 않고 퇴짜를 놓는 아빠에게 서운한 마음 반으로 따지듯 물었지만 아빠는 한 번 내린 평가를 바꿀 생각이 없어 보인다. 방콕 가족여행의 기억을 근거로 다른 건 몰라도 아빠와 치앙마이에서 지내면서 음식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내가 너무 대충 넘겨짚었던 게 아닌가 싶다.
방콕에 갔을 때 아빠는 아내와 아들, 딸 하고만 있었던 게 아니라 사돈 내외와 며느리, 사위, 손자까지 함께였다. 아빠는 성격상 그런 자리에서 음식이 조금 입에 맞지 않는다고 티를 내는 사람이 아니다. 아빠에게 태국 음식은 그냥저냥 먹지 못할 것은 아닌 정도였을 뿐인데 나는 그런 아빠를 보고 '아빠는 태국 음식이 입에 맞는구나' 착각을 했던 거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아들하고만 있을 때의 아빠가 그때와 같은 모습일 수는 없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작은 사이즈를 주문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플랜 B를 준비해놓았던 건 더욱 다행이다. 피크 타임에는 거의 만석이 될 정도로 평이 좋은 화덕피자집이 근처에 있다. 피자는 아빠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다.
창푸악 게이트에서 멀지 않은 올드시티 안쪽, 차선 하나 반쯤 되는 너비의 골목이 교차하는 한적한 길가에 ‘바이 핸드 피자 카페’가 있다. 골목과 맞닿은 식당의 한 면을 터놓아서 테이블에 앉아 피자를 먹는 손님들이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왔다. 입구에 다다르자 한편에 서 있는 화덕의 구멍으로 일렁이는 장작불이 보였다.
도착한 때가 한창 저녁 시간이라 자리가 가득 차서 하마터면 대기를 할 뻔했다. 앉아 있는 손님의 대부분은 유럽인지 미국인지 호주인지 남미인지 알 수 없으나 얼굴이 희고 머리가 노랗거나 붉거나 새었거나 해서 우리가 보통 뭉뚱그려 '서양 사람'이라고 부르는 생김을 하고 있는 사람들뿐이었다. 쟤들은 치앙마이에 와서도 이렇게 피자를 맛있게 먹고 있는데 정작 나는 볶음 고추장 튜브를 만지작 거리는 아빠에게 ‘태국 여행까지 가서 뭘 그런 걸 찾을 생각을 하느냐’며 핀잔을 준 것이 생각 나 문득 부끄러워졌다. 아들이 아빠 모시고 여행 좀 간다고 갑질을 해도 너무 했다.
가까스로 차지한 빈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펼쳐 보이며 종류도 다양한 피자 메뉴를 하나씩 아빠에게 설명했다. 언제부터였는지 아빠는 어느샌가 비슷한 연배의 어르신들에 비해 유난히 피자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한국에서도 뭘 먹을지 고민하다 피자를 권하면 아빠는 언제나 '오케이'였다.
고기와 소시지가 푸짐하게 들어가 있다고 소개된, 메뉴 이름부터 '미트 러버(meat lover)'인 피자를 주문했다. 피자를 좋아하고 고기도 좋아하는 아빠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다. 태국 맥주 두 병까지 함께 주문해놓고 화장실에 다녀왔다.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면서 멀찍이 앉아 있던 테이블 쪽을 보니 고개를 푹 숙이고 휴대폰 화면에 집중하는 아빠가 눈에 띄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아빠는 그 사이 장기 게임을 켜고 아마도 한국에 있을 이름 모를 어떤 사람과 대국을 시작하고 있었다. 오늘 하루, 카페와 식당에 갈 때마다 아들을 앞에 두고 틈나는 대로 휴대폰으로 뉴스를 보고 장기와 고스톱 게임을 켜는 아빠에게 적잖이 서운한 표현을 했는데도 한 판을 시작하면 15분, 20분은 족히 걸리는 장기를 두고 있는 아빠를 보고 순간 나도 모르게 쌓아두었던 짜증이 터져 나왔다.
나 : 아이고 그거 좀 끄고...아이 참...
아빠 : 응?
나 : 그거 한 15분 더해야 할 텐데? 피자 나올 때까지 계속 그거만 하고 있을 거야?
아빠는 나에게 대답을 하면서도 시선은 휴대폰 화면에서 떨어뜨리지 않고 있었다.
아빠 : 아이 뭐 나와야지 먹든가 하지.
나 : 아니 어쨌든 간에... 말이 안 되는 거지. 아빠는 나 앞에 두고 20분 동안 혼자 장기 둘 생각이었다는 거잖아. 여기까지 와가지고... 호텔에서 쉬면서 그러면 몰라도. 이동 중에 하던가.
아빠는 결국 '제발 좀 끄시라'는 내 말에 '뭐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그럼 뭘 하고 있냐'라고 투덜대면서도 결국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엎어두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미 한 번 터뜨린 잔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아빠 : 이 맥주는 여기 맥주인가?
나 : 응, 태국 맥주. 맛있어.
아빠 : 아이 싫어.
나 : 왜?
아빠 : 술 중에 맥주 제일 싫어하는데
원체 한국에서도 술은 거의 마시지 않는 아빠지만 기껏 주문해서 나온 맥주를 입에 대지도 않고 또 타박을 놓으니 나는 덩달아 기분이 더 언짢아져서 '그래도 맛이라도 한 번 보시라'고 쏘아붙였다.
나 : 아우... 진짜 비협조적이시네.
아빠는 드디어 못 이긴 척 맥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아빠 : 부드럽다, 맥주가.
하며 잔을 내려놓았다.
나 : 아, 그러니까 드시라고요. 부드러우니까...
냉랭했던 분위기가 다시 말랑말랑하게 변해갈 무렵 나는 다시 뒤끝을 부렸다.
나 : 이제 여행 이틀째지만 자꾸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연휴 때 가족들 앞에서 만행을 고발할 거야.
아빠 : 뭐얼 또.
나 : 장기를 두는 게 말이 되냐고. 20분은 해야 되는 게임을 맥주도 나와 있는데 그걸 못 참아가지고.
아빠 : 맥주 나온 게 무슨...
나 : 아빠, 그건 진짜 아홉 살짜리 조카 하준이 또래 애들이 휴대폰 게임 중독되가지고 빈 시간 못 참고 하는 거랑 똑같은 거야. 내가 예순여덞 살 어린이랑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아빠한테 틈날 때마다 휴대폰 게임하지 말라고 얘기해야 되겠어?
아빠 : 야, 뭐 지금 할 것도 없는데.
나 : 아니, 아빠 잘 생각해봐. 스마트폰 없을 땐 할 거 없을 때 뭐했냐구.
아빠 : 그땐 책을 좀 많이 읽긴 했지.
한국에서도 틈만 나면 휴대폰을 붙들고 있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는데. 아빠에게 뭐라 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찔렸지만 나에게는 '여기까지 와서 그래야겠냐'는 무기가 있었다. 아빠는 이 자리에서 졸지에 '68세 어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후에도 여행을 하는 동안 나는 (아빠에게는 미안하지만) 새로 지은 별명을 필요할 때마다 잘도 써먹었다. 아빠가 자꾸 휴대폰을 들여다볼 때마다. 음식 투정을 할 때마다.
화제를 이리저리 옮기면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언제 그랬냐는 듯 분위기가 완전히 풀어졌다. 그런데 대화를 할수록 아빠가 낮에 갔던 곳에서와는 다르게 유독 목소리도 작고 말 수도 적어진 것이 느껴졌다. 조용한 카페에서는 옆 테이블 눈치를 보게 할 정도로 목소리가 컸던 분이 정작 시끌벅적한 이곳에서는 목소리가 들릴 듯 말 듯 하니 이상했다.
나 : 아빠 피곤해? 갑자기 말이 줄었어?
아빠는 대답이 없다.
나 : 사람이 너무 많아? 주눅 든 거 아니야?(웃음)
농담으로 주눅 든 거 아니냐고 말했는데, 평소 같으면 버럭 '주눅은 무슨~'했을 아빠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나 : 주눅 들 게 뭐 있어. 이렇게 같이 시끄럽게 떠드는 분위기에서는 같이 시끄러워줘도 되잖아. 아빠, 용기를 내. 여기 아빠보다 나이 많은 사람도 많아.
그래도 아빠는 말이 없다. 그렇게 잠시 서로 말이 없었다. 조심스럽게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나 : 아빠 나이대 연배나 어르신들은 조금... 특히나 서양 사람 만나면 약간 어는 게 있나 봐 진짜?"
아빠 : 그런 게 있지...
전혀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아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일부러 '오버'를 했다.
나 : 어린 시절에 미군을 너무 많이 따라다녔어? 으하하.
아빠 : 이상한 게, 중국에 갔을 때는 동양 사람이다 보니까, 중국 사람들 만나면 말은 안 통해도 더 익숙한... 그리고 인천항에서 일할 때 몽고 사람들이, 몽고 사람 딱 만나면 그냥 우리 같어. 생긴 게 영 거부감이 없더라고. 그런데 서양 사람들 보면...
나 : 볼 일이 별로 없어서 그런가...
아빠는 지금 이곳의 환경이 몹시 낯설었던 것이다. 미국도 유럽도 아닌 태국 치앙마이에 있는, 그날따라 서양 사람들로 가득했을 뿐인 식당 환경이 아빠에게는 살면서 처음 겪는 일이었다. 이미 중국과 태국에 다녀온 경험이 있는 아빠에게 그런 면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여행에서 돌아와 듣고 있는 당시의 녹음 파일 속 아빠의 목소리는 주변 손님들이 떠들며 내는 웅성웅성하는 소리에 묻혀 아무리 볼륨 높여도 잘 들리지 않았다.
손님이 한창 몰리는 시간대의 끄트머리에 된통 걸린 영향인지, 피자는 주문한 지 40분이 다 되어서야 나왔다. 그 사이 아빠는 어느 정도 분위기에 적응해서 처음 도착했을 때 보다 훨씬 표정도 밝고 목소리도 커져있었다. 여기에 '고기가 많이 들어간 피자' 또한 한몫 거들었다. 역시 아빠는 피자를 좋아한다.
나 : 아빠는 피자를 언제부터 좋아한 거야?
아빠 : 처음에 먹었던 거는 니들 중학교인가 고등학교 졸업식 때 피자 먹으러 가자 그래서 그때 먹어보고 어어, 이거 맛있구나 해서…
나 : 아빤 밀가루는 안 좋아하는데 피자는 좋아하네.
아빠 : 아니, 라면을 안 먹고 밀가루 음식은 다 좋아하잖아.
나 : 그런가? 근데 라면은 왜 싫어하는 거야?
아빠 : 그전에는 라면을 자주 잘 먹었지.
나 : 언제까지?
아빠 : 회사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잘 먹었지. 그런데 회사 들어가고 부두 쪽에서 일할 때 야식으로 라면을 줬는데 처음에는, 내가 겨울에 들어갔으니까 1월 달, 2월 달에는 추울 때 난로가 없었어요. 전기 곤로처럼 있는 거, 보일러 있는 거에 라면 끓여 먹는데, 아 그거 먹고 났는데 배가 아픈 거야 설사하고. 뭘 잘못 먹었나 보다 했는데, 그런데 두 번, 세 번, 먹을 때마다 그러는 거야. 그다음부터는 못 먹는 거야. 그다음엔 야식으로 컵라면이 나왔는데 컵라면은 꼭 과자 같고 라면 맛이 안나잖아. 먹기만 하면 탈 나니까 그다음부터 안 먹어. 그래서 한 달씩 모아놨다가 집에 가져다 오기도 하고.
나 : (헛웃음)아… 그, 그게 아들, 딸을 먹이려고 가져온 게 아니었어? 으하하.
아빠 : (따라 웃으며)흐흐.
나 : 이렇게, 이렇게 내 아름다운 기억이 깨져버렸어. 그게 아빠와 엄마의 차이지.
누나와 내가 초등학생(당시 국민학생)이었던 시절. 이따금 아빠가 육개장 사발면을 한 박스씩 들고 퇴근하는 날은 우리 남매에게 선물 같은 날이었다. 아빠가 가져온 육개장 사발면을 계속 먹다가 물리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라면을 박스째로 동네 슈퍼에 들고 가서 같은 값만큼 다른 컵라면으로 바꿔와서 먹었다. 덕분에 당시 인기 있었던 '큰사발' 시리즈의 컵라면을 모조리 섭렵할 수 있었다. 누나는 튀김 우동을, 나는 새우탕을 가장 좋아했다. 당시 공장에 다니던 엄마도 야근을 하는 날이면 간식으로 나오는 팥빵을 먹지 않고 집에 가져왔는데, 지금까지 내 기억에서 아빠의 컵라면과 엄마의 팥빵은 같은 의미였다. 그런데 듣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아빠는 라면을 더 이상 먹지 못하게 되어서 집에 가져온 거였다.
아빠에 대한 아름다운 오해가 스물몇 해가 지나 태국 땅에서 이렇게 허무하게 풀어지고 말았지만 나는 이것만큼은 알고 있다. 엄마는 그때나 지금이나 팥빵을 좋아한다. 그래서 아빠에게 ‘그게 아빠와 엄마의 차이’라고 말한 것이다.
아내는 나에게 종종 '먹을 것 앞에서만큼은 배려가 없는 남자'라는 말을 한다. 아빠와 엄마에게는 있는 차이가, 아빠와 나 사이에는 없어 보인다.
테이블을 가득 채웠던 손님들이 어느새 썰물처럼 빠져나간 후에도 뒤늦게 먹기를 시작한 아빠와 나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하루 종일 함께 다니며 이야기를 하는데도 화제가 마르지 않는다. 과묵하기보다는 '투 머치 토커'에 가까운 아빠와, 그런 아빠를 닮은 나이기에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주전부리 몇 가지를 샀다. 씻고 나온 아빠는 침대에 누워 스도쿠 책을 펼쳐 들었고 나는 노트북과 카메라를 들고 호텔 로비로 내려가 사진, 녹음 파일과 메모를 정리했다.
카페와 식당을 다니며 녹음한 파일들을 노트북에 옮기면서 녹음이 잘 되었는지 이어폰을 귀에 꽂고 확인 차 들어보았는데, 피자집에서 녹음한 파일을 틀자마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아빠에게 짜증을 어찌나 심하게 내는지 현장에서 말을 할 때는 이 정도까지인지 몰랐는데 막상 내 목소리를 다시 들으니 듣기가 민망해서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다. 뒤늦게 아빠에게 미안해져 마음이 무거웠다. 기왕이면 좋은 말로 부드럽게 할 것을. 나야말로 '여기까지 와서' 아빠에게 무슨 짜증을 그리 내었나. 그래 봤자 얼마 못가 또 아빠와 투닥이게 될 걸 알면서도 반성을 한다.
작업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을 때, 이미 아빠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