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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홀짝 Oct 05. 2020

Day 3-1. 가지 않은 길은 두고두고 생각이 난다

서른여덟, 아빠와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Day 3 - 별의 도시 치앙다오

아빠와 나 1

어릴 땐 무슨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아빠를 찾았다.
지금은 아빠가 무슨 일이 생기면 나를 먼저 찾는다.

어릴 땐 아빠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나는 잘 알지 못했고,
지금은 나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아빠는 잘 알지 못한다.



체크아웃


여행 셋째 날 오전은 어제의 반복이었다. 같은 호텔 침대에서 두 번째 아침을 맞이하고, 1층으로 내려가 조식을 먹었다. 한두 가지 음식이 바뀌긴 했지만 전체적인 조식 메뉴와 식당의 분위기, 자리를 채운 사람들의 모습도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아침을 먹고 방으로 돌아온 아빠와 나는 각자 혈압약을 챙겨 먹고, 밖에 나갈 준비를 했다.


체크아웃까지는 두 시간 남짓이 남았다. 체크아웃 후에는 곧장 버스터미널에 가서 시외버스를 탈 예정이라 그 사이 어딜 다녀오기에는 애매하지만 그렇다고 방에서 마냥 뒹굴고 있기에는 시간이 아까웠다. 굵직한 일정은 한국에서 미리 정하고 왔으나 이런 자투리 시간은 여행 당일 변수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어서 그때그때 주어지는 시간과 상황에 맞추어 움직이는 편이 낫다.
 

이렇게 애매하게 비는 시간을 활용하기에 딱 좋은 선택지가 하필이면(?) 발마사지다.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아빠와 나는 어제 갔던 그 마사지샵에 한 번 더 가기로 했다. 아빠도 첫 방문이 나쁘지 않았던 것 같고 거리도 가까워서 굳이 다른 곳을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아침에 눈을 떠서 발마사지를 받기까지의 행적이 어제 오전과 완전히 같아졌다.


오전 일정이 어제와 판박이라서 그런지 조식을 먹는 것에서부터 마사지샵에 들어가 발마사지를 받는 것까지 아빠의 모습이 어제 보다 한결 익숙해 보인다. 어제는 마사지가 끝나자마자 밖으로 나가 신발을 먼저 갈아 신고 멀뚱이 섰다가 테이블에 따뜻한 차를 내어 주시는 걸 보고 머쓱하게 다시 신발을 벗었던 아빠가 오늘은 미리 자리에 앉아 차를 기다리고 있다.


나 : 어이구, 누가 보면 여기서 몇 주 있었던 사람인 줄 알것어요.


아빠 : 에이~ 무슨!


마사지샵을 나서며 건넨 농담에 손사래를 치는 아빠의 표정은 더없이 밝았다. 오늘은 나도 문득 '살다 보니 이런 날이 다 있네' 하는 생각을 했다. 한두 해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태국의 어느 마사지샵에 아빠와 내가 나란히 누워 발마사지를 받는 것은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서른여덟 해를 살다 보니 생긴 이런 일과 예순여덟 해를 살다 보니 생긴 이런 일은, 같은 일이어도 느낌의 농도가 훨씬 다를 게다. 치앙마이의 쨍한 오전 햇살에 비친 아빠 얼굴이 유난히 빛났다.


개운함을 안고 호텔로 돌아와 이틀 동안 풀어놨던 짐을 각자의 캐리어에 챙겨 넣었다. 어질러진 침구를 대충 정리하고 나오면서 머물렀던 방을 카메라에 담았다.




창푸악 터미널과 치앙다오행 버스


창푸악 버스 터미널은 호텔에서 북쪽으로 약 1km 떨어진 곳에 있다. 터미널까지 15분만 걸으면 된다고, 이게 다 아들이 일정과 동선까지 생각해서 숙소를 잡은 덕이라고 아빠에게 실없는 생색을 냈다. 도로변 인도가 좁아 이번에도 내가 앞장서고 아빠는 뒤따라 걸었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뒤따라 오는 아빠가 걱정돼서 자꾸 뒤를 돌아본다. 아빠는 그럴 때마다 신경 쓰지 말고 계속 가라면서 캐리어 손잡이를 잡지 않은 손을 내 쪽으로 휘이 휘이 내젓는다.
 

창푸악 터미널은 '치앙마이 버스 터미널1'이라고도 하는데, 치앙마이 중심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 지역을 오가는 버스와 밴, 썽태우를 탈 수 있다. 치앙마이에서 멀리 떨어진 태국 곳곳의 지방으로 가는 버스는 치앙마이 버스 터미널 2와 3에 있다. 치앙마이의 다른 터미널에 비해 아담하고 낡은 창푸악 터미널은 마치 30년 전, 할머니 댁이 있는 산골 마을에 들어가는 버스(하루에 네 번만 운행하는)를 탔던 강원도 원통의 터미널 같았다.


치앙다오행 버스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터미널 어귀에 서 있는, 딱 보기에도 내 나이 정도는 돼 보이는 낡은 버스 차창에 태국어와 영어로 행선지가 여럿 쓰여 있었는데 그중 'CHIANDAO'가 눈에 띄었다. 정차된 버스 앞 기둥에 놓인 책상에 버스 티켓으로 보이는 얇은 종이 묶음과 태국 동전을 주고받는 사람이 있는 것으로 보아 따로 표를 파는 창구를 찾을 필요가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책상 앞으로 가서 "치앙다오?" 하자 "포티 포"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치앙다오 투"라고 말하며 100바트 지폐를 내밀었다. 종이 두 장을 찢어 주고 12바트를 거슬러 주었다. 영어가 짧은 매표원과 영어가 짧은 외국인 관광객, 우리 사이에 많은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창푸악 버스터미널

 

치앙다오를 거쳐 다른 지역으로 가는 버스


아빠에게 표 한 장을 건네주고 짐 칸에 캐리어를 실었다.


나 : 아빠랑 나랑 합쳐서 88바트래.


아빠 : 그럼 얼마야?
 

나 : 한... 3500원?


아빠 : 가까워?


나 : 휴대폰으로 검색해봤을 땐 70킬로 정도?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로 나오던데.


버스표 뒷면에 볼펜 글씨로 숫자가 쓰여 있는 것은 짐작컨대 좌석 번호인 듯했다. 거의 만석이 된 버스에 올라 자리를 찾아보니 버스 맨 뒤에 있는 가운데 두 자리였다. 낡고 오래된 버스의 천장은 스테인리스로 덮여 있었고 군데군데 회전식 선풍기가 달려 있었다. 당연히 에어컨은 없다. 간혹 차 시간을 잘 맞추면 에어컨이 달린 나름 신형 버스를 조금 더 비싼 값에 탈 수 있다고 하던데 우리는 시간을 잘 맞추지 못한 게 확실했다.

 



치앙다오 버스 터미널


치앙마이 시가지를 벗어나자마자 버스 밖 풍경은 한적한 시골길로 바뀌었다. 하긴, 창푸악 터미널과 그 주변 또한 우리나라 시골 읍내 느낌이긴 했다. 포장이 매끈하게 되지 않은 도로가 많다 보니 오래된 버스는 수시로 덜컹거렸고, 그래서 엉덩이가 몹시 배겼다. 버스가 넘어가는 산속 고갯길은 포장도 되지 않은 도로였는데 툭하면 휴대폰 신호가 끊겼다. 낡은 버스 안에서 보는 차창 밖 풍경에 심심치 않게 만나는 비포장 도로까지 영락없이 우리나라 80~90년대 시골 버스 같은 느낌이었다. 손에 쥔 21세기의 산물 스마트폰이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터미널을 빠져나오기 무섭게 꽉 막힌 2차선 도로 위에서 한참 동안 발이 묶였던 버스는 출발한 지 두 시간이 넘게 지나서야 치앙다오 터미널에 도착했다.
 

치앙다오 터미널은 터미널이라기보다는 정류장에 가까웠다.(그래서 구글 지도에 'bus station'이라고 표기되어 있는지도) 터미널 안에 있는 것이라곤 작은 매점과 그 앞에서 소시지를 구워 파는 노점, 열대 과일을 썰어 파는 노점에 화장실이 전부였다. 터미널 주변에는 2차선 도로를 따라 작은 단층 건물-왠지 '건물' 보다는 '가옥'이라 불러야 할 것만 같은-들이 코로나 19 이후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는 사람처럼 띄엄띄엄 서 있었는데, 나중에 얘길 들으니 화요일마다 이 길을 따라 시장이 들어선다고 한다. 치앙다오에 도착해서 보니 이곳에 비하면 치앙마이는 그야말로 대도시였다.



버스에서 내려 터미널과 주변을 대충 훑어본 뒤에 예약해놓은 리조트 사장님께 전화를 걸었다. 치앙다오에서의 하룻밤을 보낼 숙소는 한국인 사장님이 운영하는 곳이다. 이렇게 한갓진 곳에 택시나 그랩이 다닐 리도 만무하기에 터미널에서 연락을 드리면 픽업을 나와주시기로 이미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도로 위에는 택시나 그랩은 고사하고 지나가는 차량 자체가 뜸했다.


픽업을 기다리는 동안 점심을 먹기 위해 숙소 사장님이 추천해주신 터미널 근처 식당에 들어갔다. 태국 음식을 파는 곳이라 하는데 인상 좋은 소년이 미소와 함께 가져다준 메뉴판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볶음밥, 팟타이 등 거의 모든 메뉴의 가격이 35바트였던 것이다. 방콕 물가에 비하면 치앙마이 물가가 아직은 꽤나 저렴하다고 생각했는데 치앙다오는 치앙마이에 비해서도 거의 절반 수준이라니. 메뉴 세 개를 고르고 계란 후라이에 마실 물까지 추가해서 먹고 낸 돈은 122바트(약 4,800원)였다.



치앙다오 '사랑해 리조트'


시간이 좀 더 남으면 커피라도 한 잔 마실까 했는데 식당을 나서자마자 숙소 사장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짐칸이 딸린 픽업트럭을 몰고 나온 사장님은 숙소로 가는 십여 분 동안 치앙다오와 리조트에 대한 설명과 소개를 해주셨다. 살가운 사장님을 만나 모처럼 아들 아닌 다른 사람과 대화할 수 있게 된 아빠의 수다 본능이 터졌다. 저 편에 보이는 높은 산은 등산객이 오를 수 있는지, 있으면 등산객이 얼마나 있는지, 시간은 얼마나 걸리는지 상세하게도 물어보며 중국 여행 때 올랐던 산에 대한 이야기까지 장황하게 늘어놓는 아빠. 그런 아빠를 보며 ‘굳이 뭘 그런 얘기까지 하시나’하는 생각으로 내심 불편해했던 이유는, 아빠의 그런 모습을 내가 똑 닮았기 때문이었다. 이번 여행을 통해 제대로 확인했다. 내가 빼닮은 아빠의 모습을 볼 때, 이상하게 마음이 까슬까슬해진다. 분명 나는 좋은 아들 축에는 끼지 못할 것이다.
 

방향이 산으로 나 있는 2차선 도로를 달리고 있는 중에 왼편에 '사랑해 리조트'가 한글로 쓰여 있는 나무 간판이 보였다. 사장님은 이곳에 터를 잡고 객실로 사용할 작은 독채를 여러 동 지었다고 한다. 울타리를 두른 외부와의 경계 안쪽에는 잔디를 깔고, 자갈로 길을 만들고 작은 연못을 팠다.


리조트는 전체적으로 주변 환경과 자연 그대로 잘 어울리면서도 사람의 손으로 잘 가꾸어 놓은 느낌이었는데 사장님은 오는 길 내내 '하고 싶은 것이 많은데 여건 상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게 많으니 너무 큰 기대를 하지 마시라'며 신신당부를 거듭했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 하룻밤을 지내기 위해 내가 지불한 돈이 5만 원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내가 황송할 지경이다.


우리가 사용할 방을 보기 전에 카페 겸 식당이자 프런트로 이용되는 목조 건물을 먼저 구경했다. 안에서 쉬고 있던 한국인 부부가 우리에게 반갑게 인사를 해주셨다. 초등학생 아들과 함께 세 식구가 여행 중이라고 하신다.


"우와, 흔치 않은 조합이네요"


아빠와 둘이서 여행 왔다는 말에 아내분이 하신 말씀이다.



 

산책


방에 짐을 풀고 산책을 나섰다. 주변이 한적한 와중에도 마침 근처에 숲 속 느낌의 카페가 있어서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한 잔씩 들고 길을 걸었다. 산이 있는 방향으로 쭉 걸어 올라가다 보면 절이 하나 있는데, 거기까지 갔다가 같은 길을 되돌아오면 대략 한 시간 반 남짓 걸린다고 한다. 한창 오후 시간이었지만 산바람이 솔솔 불어 걷기에 그다지 힘들거나 덥지 않았다. 보이스 레코더 챙겨 나오는 걸 깜빡해서 휴대폰 음성 메모를 켰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서 확인해보니 그때의 발걸음 소리, 아빠와 내 목소리, 바람 소리, 아빠가 커피잔을 흔들어 나는 얼음 부딪히는 소리가 생생하게 담겼다. 녹음 파일을 듣는 것만으로도 그때로 다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가지 않은 길


나 : 아빠는 살면서 크게 후회되는 일은 없어?


아빠 : 후회되는 일?


나 : 뭐, 엄마랑 결혼한 거라든가(웃음).


아빠 : 흐흐, 이런!


나 : 후회되는 일이 있나 한 번 생각해봐.


아빠 : 내가, 어렸을 때 생각했던 거 하고는 영 떨어져서 살고 있는 느낌이지. 후회라기보다는 내 마음대로 안된다는 거지. 원래 시골에서 농사짓고 살려고 했던 건데. 근데 이게, 어떻게 보면 더 잘된 건지도 모르겠고 지금.


나 : 아빠는 왜 그렇게 시골에서 살고 싶었어?


아빠 : 몰라, 하여튼 그때는 내가 시골에서 농사짓고 살고 싶어 가지고. 소 키우고.


나 : 대따 고생만 했을 것 같은데.


아빠 : 그니깐 지금 돌아보면 고생 지겹게 했을 것 같고 돈도 못 벌었을 것 같고 니들 공부도 못 시켰을 것 같고 그래. 내가 만약에 시골 살았으면 니들 대학 못 보냈을 거야.


아빠는 하루 전에 했던 말과 거의 같은 말을 했다. 인천에 오지 않고 시골에 남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 가지 않은 길이라는 것이, 막상 그려보면 걸어왔던 길보다 더 험하고 팍팍할 것 같아도 자꾸 생각이 난다.


아빠가 더 늦기 전에 시골로 돌아가서 살고 싶다고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일 거다. 그런 날이 온다면, 아빠는 시골에서 보내는 노년의 시간에 만족하게 될까. 설령 얼마 못가 때려치우고 돌아오더라도 아빠의 희망이 꼭 한 번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어떻게 할지는 그때 가서 고민해보기로 하고...


나 : 아빠는 아빠 성격에서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어?   


아빠 : 아빠도 어떻게 보면 내성적이지 뭐.

    
나 : 에이~~!(말도 안 된다는 투로) 아빠가 어떻게 내성적이야. 아까도 처음 만난 리조트 사장님하고 말을 어찌나~ 차암 나.


아빠가 내성적이면 인류의 98%가 내성적인 사람이어야 한다.


아빠 : 화가 나도 말을 잘하지 못하니까.


나 : 화를 겉으로 못 낸다고? 집안에서는 잘 내잖아~


아빠 : 으이구!


나 : 으허허, 솔직해져야지 사람이.


조금 더 걸어 올라가니 리조트 사장님이 이야기했던 갈림길이 나왔다. 들은 대로 왼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나 : 갈림길이 이런 게 참 멋있지. 아빠는 인천 가느냐 시골에 사느냐가 갈림길이었겠네.


아빠 : 근데 그게, 어떻게 뭐 선택을 해서 산다는 게 아니라 그땐 상황이 어쩔 수 없게 되어서 옮겼으니까.


아빠가 살아낸 시대에는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호사였을 수 있겠다. 갈림길을 지나 한동안 서로 말없이 걸었다.


나 : 아빠는 만약에 고등학교 가고 대학 갈 때쯤 됐으면 뭐 전공하고 싶었을 것 같애?"


아빠 : 글쎄, 그랬으면... 학교 선생 했을 거 같애.


나 : 무슨 과목?


아빠 : 역사나 지리 쪽에. 학교 다닐 때 워낙 그쪽을 좋아했거든.


나 : 아빤 외우는 거 잘했으니까... (잠시 있다가) 근데, 뭘 했어도 아빠가 대학에 가서 뭘 전공했든 지금 나이는 은퇴야(웃음).


아빠 : (따라 웃으면서) 당연하지 그거야.


나 : 그러니까 아쉬워하지 마(또 웃음).
 

웃고는 있는데, 웃어지지 않았다. 괜한 얘길 꺼냈다 싶기도 하고. 중학교를 장학생으로 입학해놓고 집안 사정 때문에 학교를 영영 그만둔 것이 아빠에게는 평생의 한이다.



아빠의 연애와 결혼


걷고 있는 도로가 산중으로 접어드니 주변이 온통 크고 굵직한 나무였다. 인천항에서 일할 때 동남아에서 수입해 들어오는 목재들이 유독 딴딴하고 좋아 보여서 궁금했다던 아빠는 이곳 나무에 큰 관심을 보였다. 나는 나대로 길을 걷다가 종종 멈춰 사진을 찍었다. 멀리 저 편에 높게 솟은 바위산이 그냥 보기에도 몹시 험악하다면서 아빠는 감탄을 했다. 나는 산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의 틈을 뚫고 나온 햇살에 감탄했다.


어느덧 터닝포인트로 정해두었던, 도로가 끝나는 지점에 있는 절에 다다랐다.


나 : 아빠, 치앙다오에서 '치앙'이 도시라는 뜻이고, '다오'가 별이라는 뜻이래.


아빠 : 별이 많아?


나 : 그렇데. 밤에 별이 엄청 많이 보여서 마을 이름이 별의 도시인 거래. 이따 저녁 먹고 사장님이 별하고 같이 사진도 찍어주신다던데.


아빠 : 아빠 시골도 어릴 적에 하늘에 별이 그렇게 많았는데.


나 : 옛날엔 그랬겠지 아무래도.


여러모로 치앙다오는 우리나라 옛날 시골, 특히 강원도 느낌이 많이 난다.


나 : 엄마랑은 요새 어때?


아빠 : 어휴, 느 외할머니 다녀가시기 전에 집을 깨끗하게 해 놨더니 할머니 가고 나서는 금방 어지럽혀 놨다고 또(웃음).


나 : 참 희한한 일이야. 어떻게 아빠 같은 사람이 엄마 성격 같은 사람하고 결혼을 할 수가 있지?
 

아빠 : 내가 느 엄마 만났던 얘기를 해줬나?


나 : 소개로 만났잖아. 군대 있을 때.


엄마는 아빠와 같이 군생활을 하던 후임의 애인과 친구사이였다. 후임이 보여주는 자기 애인 사진 속에 엄마가 같이 찍혀있었다는데, 소개해달라고 졸라서 만나기도 전에 군대에서 편지부터 썼다고. 손 글씨를 잘 쓰는 데다 글 솜씨가 있어서 부대 안 다른 사람 연애편지 대필을 심심찮게 해 주던 아빠는, 엄마에게 편지 서너 통을 쓴 끝에 답장도 받고, 외박 나가서 처음으로 엄마와 데이트를 했다고 한다.


나 : 옛날에는 엄마가 지금처럼 그러지는 않았지?


엄마는 말을 부드럽게 하거나 표현이 많은 스타일이 아니다. 속마음은 약한데 직설적이고 무뚝뚝해서 한 마디로 좀 ‘세다’고 할까.


빠 : 그때도 엄마가, 성깔 있었어. 그게 또 그렇게 톡톡 쏘는 게 이뻤어요. 재밌었어 그때는.


나 : 그냥 엄마 얼굴 보고 좋아한 거 아니야?


호기심과 재미가 이렇게나 무섭다. 내가 살면서 본 아빠는 엄마가 말을 쏘아붙일 때마다 질색을 하는 모습이었는데. 그 당시 아빠는 그냥 엄마가 예뻐서 다른 건 신경도 쓰지 않았던 것 같다. 엄마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면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들긴 든다. 내가 물려받지 못해 서운할 뿐.
 

아빠 : 1976년에, 처음 만날 때부터 우리 결혼하자고 했으니까. 지금은 개봉동이지만 그땐, 고척동 살았어 엄마가. 장마 때 비가 오면 장화를 신고 올라갔어 산동네 올라가는 길이 질퍽해가지고. 나중에 지금 다 아파트 들어찼지.


스물네 살 아빠는 스물한 살의 엄마를 만났다.


아빠 : 난 엄마한테 미리 얘기했지. 결혼하면 시골에서 살 거라고. 그러니까 꼭 시골에 살아야겠냐고 그러더라고. 그리고 두 번째 올라왔을 때 너희 큰 외삼촌이랑 왔었고, 큰 이모도 같이.


나 : 아우, 생각만해도...(엄마가 '센' 스타일이긴 하지만, 외가댁에서는 가장 '덜 센' 축에 든다. 큰 외삼촌, 큰 이모는...)


아빠 : 젊은 사람이, 꼭 시골에서 살아야 되느냐. 도시에 나와서 살 수도 있지 않느냐.


아빤 그 해 추석 때 예비 처가에 불려 가 또 같은 말씀을 들었다고 한다. 꼭 시골에 살아야 되느냐고. 아빤 그래야겠다고 대답하고는 엄마와 담판을 지었다. 나하고 시골에서 살 거면 결혼하고 아니면 말자. 아마 엄마에게는 그 순간이 인생 최대의 갈림길이었을 것이다.


1978년 12월, 엄마는 스물세 살에 강원도 인제 산골 마을로 시집을 왔다. 외할머니는 엄마 신혼방에 놓을 자개농을 트럭에 싣고 딸이 살게 될 집까지 따라왔다가 그 차를 타고 되돌아 가실 땐 울면서 가셨다고 한다. 딸이 살게 될 집이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외지고 험한 곳에 있어서.


아빠 : (강원도에서)딱 3년 살았어...
 

아빠는 그렇게 고집을 피워 신혼살림을 산골짝에 차렸지만 딱 3년이었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만난 갈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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