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홀짝 Oct 06. 2020

Day 3-2. 그런 이상한 집안이 여기 있었다

서른여덟, 아빠와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Day 3(2) - 아빠의 흑역사

아빠의 흑역사


반환점을 돌아서 가던 길을 그대로 내려오는데 길가에 소박한 주점이 눈에 들어왔다. 올라갈 땐 있는 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쳤던 모양이다. 가게 앞에 세워 놓은 입간판에는 각종 주류와 식사 메뉴가 적혀 있었다. 날이 아직 훤히 밝았지만 저렴한 가격에 파는 생맥주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도로와 접해 있는 건물 외부의 나무 테이블에 앉았다. 


맥주를 홀짝이며 내가 초, 중학생이었을 때 우리 집에 가끔 놀러 왔던 아빠 회사 동료 아저씨들의 근황을 묻다가,


나 : 아빠 예전에 아파트 처음 이사 오고 나서 빚질 때는 그 아저씨들하고 놀다가 돈 써서 빚진 거야?
 

하고 아빠의 흑역사에 대해 훅, 치고 들어갔다.


아빠 : 아니야.


나 : 그러면?


아빠 : (한 숨 쉬며) 그럴 일이 있었어.


나 : 지금에 와서 말 못 할 게 뭐가 있어~ 아빠가 이상한 데다 돈을 잘못 투자해서 날린 건 나 중학생 때였고, 분명히 나 5, 6학년 때도 엄마 몰라 돈 빌려서 난리가 났었는데.


아빠 : 그때 돈 쓴 게 한... 카드로 쓴 거지. 운동하고 그러면서 쓴 거야. 그건 얼마 안 돼.


아빠, 엄마는 인천에 올라온 지 12년 만에 셋방 살이를 벗어나 신축 아파트에 내 집 장만을 했다. 초등학교 4학년 9월, 이사하던 날 처음 가져보는 내 방을 보고 감격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빠는 그 후 몇 년 동안 테니스도 치러 다니고 볼링도 배우면서 여가 시간에 취미 생활을 많이도 하고 다녔다. 당시 나는 그런 아빠가 나름 멋져 보이기도 하고 우리 집도 이제 살만해졌구나 하면서 그저 좋아했는데 그러다 야금야금 엄마가 모르는 카드 빚이 생겼던 것이다. 한바탕 난리를 치른 후에 여전히 맞벌이를 하고 있던 엄마가 그 빚을 갚아줬다.


나 : 그럼 이후에 아빠가 투자 잘못해서 날아간 돈이 얼마였어?


아빠 : 한... 4천 넘게.


나 : 아 그때, 그때 아주... 화려했지. 다 기억나 아빠(웃음).


아빠가 투자 사기를 당했던 때가 1997년에서 1998년 사이쯤이었으니 당시 4천만 원이면 우리 집 기둥뿌리가 뽑힐만한 돈이었다. 아들과 여행지에서 기분 좋게 산책하고 앉아 쉬다가 난 데 없이 흑역사 얘기가 나오자 아빠는 갑자기 말수가 줄었고, 나는 하던 말을 계속 이었다.


나 : 엄마가 그때부터 흑화 하기 시작했어(웃음). 아빠 그때 기억나? 아빠가 엄마 몰래 받은 대출 같은 거 엄마한테 다 들킨 날 엄마 막 소리 지르고 울고, 아빠도 아파트 옥상에서 울고, 난 아빠 옆에서 아빠가 혹시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 붙잡고 같이 울고. 그때 내가 엄마, 아빠 가운데 있으면서 사람이 조금 착해진 것 같애(웃음). 양쪽 다 아예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고... 둘 다 불쌍해 보이고. 그때가 우리 집 흑역사였지. 그때 우리 집에 큰 외삼촌 왔었지? 아빠 혼내주러 으하하.


아빠는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나 : 아빠 왜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뭐. 갑자기 말이 없고 그래. 다 지난 일을 가지고.


아빠는 계속 말이 없다. 내가 너무 짓궂었나 싶어 미안한 마음에 더 목소리 톤을 올렸다.


나 : 아빠는 내가 아까 후회되는 일이 뭐냐고 물어봤을 때 그 얘기를 했어야지 으하하.


아빠 :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그래.


정말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아빠가 드디어 대답했다. 


나 : 아니 사람이 어떻게 좋았던 일만 기억하고 살아. 다 지난 일인데 뭘.


아빠 : 아빤 원래 퇴직하고 이 나이쯤 되면 그냥 시골에서 조용하게 책이나 보면서 보내면 좋겠다 했는데 그게... 그렇게 쉽게 안된 거니까 그거 때문에.




그런 이상한 집안이 여기 있었다


아빠 : 그게 또 처음에는 20% 해서... 돈이 다 잘 나왔어. 그 돈까지 재투자하고 날아갔지.


여전히 씁쓸한 목소리로, 아빤 당시를 회상했다. 지인의 권유로 넣었던 그 돈에 대해.


나 : 원래 초반엔 그래. 사기꾼들 돈 끌어 모을 때 다 그렇게 모으는 건데 뭐.


아빠 : 그때 은퇴한 교장 선생님도 1, 2억씩. 그렇게 진짜 많이 당했어 사람들이.


나 : 그래서 그런 말이 있지 아빠. 거대한 거짓을 가리려면 진실이 많이 필요하다고. 세상에서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 세계 최고의 사기꾼이 될 수 있다고.


이 말을 듣고, 아빠가 처음으로 웃었다.


사실, 다 지나간 얘기를 굳이 들추어 웃으려고 얘기를 꺼낸 것은 아니었다. 엄마는 몇 해 전부터 다단계를 하고 있었는데, 다단계라고 다 나쁜 건 아니겠지만 그게 내 눈에는 아무리 봐도 악성이었다. 좋게 이야기하고 뜯어말리고 화를 내고 어깃장을 놓아도 엄마는 도통 말을 듣지 않았다. 실랑이는 언제나 '혹시나 내가 망해도 자식들한테 손 벌리는 일 없다'는 엄마의 말로 끝이 났다. 애초에 엄마가 다단계를 시작한 이유가 늙어서도 자식들한테 손 안 벌리고 살기 위해서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자식이 부모 맘대로 되지 않듯,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더 관심을 갖고 엄마를 지켜보기로 마음먹는 것이 나로서는 최선이었다. 


나 : 아빠, 그래도 엄마가 그거 하고 나서는 기력이 좋아 보여. 여기저기 아프다는 말도 안 하지? 얼굴도 심지어 더 젊어진 것 같애(웃음).


아빠 : 느 엄마가 예전에 일 다닐 때보다는 아프다 소리를 훨씬 덜 하지.


이 말까지만 하고 지나가려다, 여전히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고 어차피 여행 중에 진지하게 한 번 이야기하려고 마음먹었던 일이라 분위기를 바꾸어 말을 이었다. 


나 :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엄마가 대출 같은 거 받지는 않았는지 부동산 등기부 등본도 떼 보라니까요. 작년부터 이야기했구만 그게 뭐 그렇게 어렵다고.


아빠 : 알았어. 알아서 할 게.


나 : 아이고 알겠다고 말만 하지 마시고. 엄마한테 좀 물어도 보고. 나도 아빠한테 그런 성격을 물려받은 걸 수도 있는데, 들여다봐야 하는 걸 보기 싫어서 안 들여다보는 것도 고쳐야 돼 아빠나 나나. 엄마가 왁왁 대니까 못 물어본다는 것도 다 핑계야. 아빠가 들여다볼 자신이 없으니까 그런 거지. 그러다 망하는 건데… 하여튼 나는, 혹시나 사태가 안 좋아지기 전에...


아빠 : 느들한테... 느들한테 뭐, 뭐라 그러냐. (문제가 생겨도) 다 털고 나가면 둘이 어디 가서 먹고사는 데는 지장 없겠지. 쯧... 아직까진.


아빠의 그 말에, 순간 감정이 격해졌다.


나 : 아니,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하는 거 자체가... 역지사지로 해서 아빠가 나한테 막 걱정을 하는데 내가 '아유 어디서 땅이라도 파면 못 벌어먹고살겠어요?' 그러면 아빠는 뭐 그 말 듣기 좋을 것 같애? 생각을 해봐요, 얼마나 그지 같은 일인지. 젊었을 땐 아빠가 돈 가지고 사고 쳤다고 기껏 집 명의를 엄마한테 돌려놨더니 엄마가 그걸 다단계를 해가지고 날려먹는다고 생각하면. 그런 이상한 집안이 어디었어 진짜. 뭐 아빠가 토스하고 엄마가 스파이크 때리는 것도 아니고.
 

감정이 격해져서 했던 그 말, 그런 이상한 집안이 여기 있다는 걸 내 눈으로 확인한 것은 아빠와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한 달이 지난 뒤였다. 아빠의 토스를 받아 엄마는 정말로 스파이크를 때리고 있었다. 그것도 예상보다 훨씬 강하게. 


아빠와 나는 잠시 동안 서로 말이 없다가 이내 툭 털고 일어나 마신 값을 계산하고 다시 길을 걸었다. 그때까지는 아직 닥치지 않은 일, 설마 그럴까 하는 일이었으므로 금세 화제를 바꾸어 기분 좋게 숙소로 돌아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저녁 먹을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고, 한인 사장님이 운영하는 리조트의 저녁 메뉴로 삼겹살과 된장찌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 : 아빠, 오늘이 아마도 이번 여행 중에 먹는 처음이자 마지막 한식이야(웃음).


아빠 : (같이 웃으며)어이구, 그까이꺼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이지.




치앙다오에서 먹는 삼겹살에 된장찌개


숙소로 돌아오자 하늘이 금방 어둑해졌다. 체크인할 때 사장님이 알려주셨던 시간에 맞추어 식당에 들어가 보니 먼저 앉은 다른 손님들은 불판에 고기를 구우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휴대용 버너와 불판, 고기, 된장찌개, 김치와 쌈채소까지 한 상차림이 준비된 테이블에 아빠와 나도 앉았다.


집 떠나 태국 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았건만 영판 낯선 치앙다오에서 아빠와 마주 앉아 먹는 삼겹살과 된장찌개는 나름 감동이었다. 여행지에서는 현지 음식을 먹는 것도 좋은 경험이라 생각하거니와 대개 해외에서는 한식 메뉴가 더 비싼 경우가 많기에 나라 밖에서는 한식을 굳이 찾아 먹지 않는 나에게는 오히려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나 : 아빠도 이왕 해외여행 가면 그 나라 음식에 도전해보고 싶고 그렇지 않아? 한식은 맨날 먹잖아.


아빠 : 시야가 좁아져, 나이 먹으면.


나 : 아빠는 아빠 스스로 그런 게 느껴져? 운전 시야가 좁아지는 건 아빠를 봐서 내가 알겠고(웃음), 다른 시야가 막 좁아지는 게 느껴져 아빠는?


아빠 : 좁아진다기보다는, 이제는 새로운 거하고 부대끼는 거를... 아무래도 꺼려지지 자꾸. 그러다 보니까 좁아지는 거야. 나이 먹고 나면 그래. 새로운 거에 도전하고 그러는 게 쉽지 않단 말이야.



여행의 지분


나 : 엄마랑 영화도 좀 보러 가고 그래?
 

아빠 : 아이구 너네 엄마가 그럴 거 같으면...


나 : 아이고, 갈 때까지 조르면 되지 아빠도... 너무 끈질김이 없어. 엄마도 참 쿵짝 안 맞춰주지만 아빠도 엄마를 외롭게 만드는 데는 크게 한몫한 거 같애. 내가 봐도 아빠는 바깥에서보다 집에서 훨씬 무뚝뚝해.


아빠 : 집하고 바깥하고 완벽하게 같은 사람이 어딨냐?


아빠는 적당히 인정하는 것 같으면서도 내심 억울한 반응이다. 그러더니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아빠 : 처음에 여기(인천) 와 살 때는 그냥 어떻게든 직장에 가고 일에 메여있고 니들한테도 해준 게 없고, 제대로 못해줬으니까 지금 와서 돌아보면. 요새 후배들은 집에서 애들하고 잘 놀거든. 그런 거 보면 이 세대가.
 

나 : 아니야. 그건 아빠가 착각하고 있는 게, 아빠는 나랑 잘 놀아준 거야. 왜냐면 낮에 아빠가 집에 많이 있으니까. 맨날 캐치볼도 하고, 내 주변 친구들 다 통틀어도 아빠보다 돈 잘 버는 아빠는 많을지 몰라도 아빠만큼 나랑 많이 놀아준 아빠는 없어. 그니까 사실은 아빠랑 나랑 이렇게 단둘이 여행을 올 수 있었던 건, 아빠의 지분이 75프로는 돼. 내가 아빠랑 여행을 가보면 어떨까라는 마음을 먹게 해 준 거는 어릴 때부터 아빠가 나한테 했던 것들 때문이지.


아빠 : 난 지금 생각해도 찡한 거는, 너네들하고 그전에 방학이면 진짜 휴가라고 해서 같이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항상 교회 수련회에 맡기고 어쩌고 하다 보니까. 니 누나가 주말마다 애 데리고 캠핑 다니고 그러는데 우스갯소리로 옛날에 아빠가 그렇게 안 해줘서 그게 한이 돼서 그러냐고 했더니 그 얘길 하는 거야 니 누나가. 그 얘길 할 때 그렇게 가슴이 찡하더라고.
 

나 : 누나가 나랑 술 마실 때도 그 얘기했었어. 어릴 때 우리 집이 식구들 다 같이 어디 여행 가고 그런 적이 거의 없었으니까.


아빠는 아빠대로 근무 여건 때문에 여름휴가라고 해봤자 사나흘을 쉴 수 있는 게 전부였고, 엄마는 그마저도 쉬지 않고 일을 나갔다. 엄마는 주말 특근 수당 때문에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출근하는 날이 더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엄마의 억척스러움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그러니 여름 방학이 되어도 동해 바다니 남해 바다니 하면서 어디 멀리 가족끼리 휴가를 가고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 여행의 지분은 대부분 아빠에게 있는 게 맞다. 아빠는 내가 어렸을 적부터 다른 아빠들과는 달리 사흘 중 이틀은 대낮에 집에 있는 아빠였다. 주간 근무, 야간 근무, 휴무가 반복되는 근무 형태의 직장 생활을 한 덕이다. 어린 나는 젊은 아빠와 글러브와 야구공을 들고나가 팔이 아프도록 캐치볼을 했다. 어떤 날은 배드민턴 라켓을 들고나가 해가 질 때까지 배드민턴을 쳤다. 친구들하고 노는 시간과 아빠와 노는 시간이 엇비슷했다.


아빠는 많이 놀아주는 아빠였고, 대화하는 아빠였다. 그것이야말로 내일모레면 마흔이 되는 내가 내일모레 일흔이 되는 아빠와 둘이서 이곳에 올 생각을 할 수 있었던 이유의 전부다.
 


트라우마


나 : 아빠는 농사 지을 때 할아버지랑 대화를 많이 했어? 할아버지는 말이 많은 편은 아니셨던 것 같은데 내 기억에는.


아빠 : 할아버지는 말 별로 없어.


나 : 그럼 아빠는 누굴 닮은 거야? 할머닌가? 아빠는 말이 많은데.


아빠 : 할아버지 하고는 별로 얘기할 것도... 할머니랑 얘기를 많이 했지. 어렸을 적부터 집안일을 할머니하고 나하고 의논해서 거의 다 했으니까.


할아버지는 내가 열 살 되던 해 1월에 돌아가셨다. 아직 남아 있는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천식으로 인한 잦은 기침과 쇠약한 몸, 그럼에도 불 같은 성격, 뭔가 오래된 듯한 냄새, 그리고 나를 어마어마하게 좋아하셨다는 것. 


나 : 나는 그거 기억나 아빠. 네 살인가 다섯 살 때 시골에 나 맡긴다고. 엄마, 아빠 맞벌이 시작할 때, 나는 막 울면서 안 간다고 그러는데 버스에 나를 강제로 태웠던 게 기억이 난다니까? 골목 시장 언덕 올라와서 버스 정류장까지. 내가 이 얘기하면 엄마가 마음 아파할까 봐 안 했는데 내가 약간, 외로움을 많이 타고 왜 이렇게 헤어지는 거를 어려워하고 정에 목마르고 그런지 스무 살 때쯤에 생각을 해봤는데 아마…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빠가 말을 받았다.


아빠 : 그러니까 지금도 아빠가 생각해보면 그런 거야. 어느 날 딱 큰아빠한테 전화가 왔어. '아들 생각나냐?' 그러길래 그게 무슨 소리냐 그러니까 '너 아들 잊어 먹겠다' 그러는 거야. 아주 깜짝 놀란 거야 아빠가. 그래서 할머니한테 전화하니까 니가 아빠한테 아빠 소리를 안 하던데. 그래서 바로 내려갔잖아. 봤는데 니가 아빠를 몰라보더라고. 그때 눈물이 팍 나더라고. 그때 니가 다섯 살 안됐을 때였을 거야. 세 살 땐가 네 살 땐가 그랬을 거야. 암튼 그래 가지고 엄마도 막 울고 불고. 그래서 바로 데리고 올라왔어.


엄마, 아빠에게서 강제로 떨어지던 네 살 무렵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걸 보면, 그 충격이 내 안 어딘가에 상흔을 남겼던 것 같다. 여섯 살 되던 해에는 유치원 입학식 날, 아빠와 함께 있다가 떨어져 아이들 틈바구니에 혼자 앉게 되자마자 자지러지게 울었다. 아마 그날 입학하는 유치원생 가운데 그런 아이는 내가 유일했을 것이다.


아빠 : 그게 나중에 너 초등학교 들어갈 때 학교 안 간다고 그럴 때 아주 그냥 가슴이 철렁한 거야.


나 : 떨어지기 싫어하니까. 분리 불안이라고 있어.


아빠 : 그때 시골에 보냈던 거 때문에... 애가 앞으로 어떻게 크려는지 큰 걱정 했지.


낯선 곳을 어려워하고 낯가림이 심한 성격은 아주 조금씩 나아지긴 했지만 대학 입학 후 첫 직장에 취직할 때까지도 약간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정말로 그날의 일 때문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아빠 또한 그걸 가슴에 두고 걱정하고 있었는지는 여태 모르고 살았다. 아빠로서는 그런 아들을 보면서 자책이 여간 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격,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옆 테이블에는 젊은 한국인 커플이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우리에게 한국에서 가져온 귀한 소주 한 잔을 권했다. 한국에서 팩소주를 좀 챙겨 왔다고 하는데, 술을 거의 하지 않는 아빠는 사양하고 나는 넙죽 감사히 잔을 받았다. 암만 태국 맥주가 맛있어도 삼겹살에 맥주만 마시기가 내심 아쉬웠던 터라 잔을 받자마자 소맥을 만들어 마셨다. 밤이 깊어질수록 조금씩 취기도 올라왔다.


아빠 : 아빠도 인천 와서 처음에는 배운 거 없고 외지에서 왔고 하니까. 그거 커버하기 위해서 하여튼 여러 사람들하고 모임이나 이런 거 일부러 다니고 그 사람들하고 관계를 하려고. 직장 생활하는 동안에 내가 판단할 때는 나를 싫어하거나 미워한 사람은 거의 없지. 내가 웬만하면 그들이 필요한 거 요구하는 거 다 해줄 수 있다는 걸 보여줬기 때문에.


나 : 이게 되게 재미있는 게, 아빠나 나나 그런 성격이 좋다고 볼 수 있지만 따져보면, 아빠나 나나 그랬던 건 사실은 사랑받기 위해서 애쓴 흔적인 거지.


아빠 : (매우 긍정하며) 그렇지.


나 : 어떻게 보면 되게 슬픈 거야.


아빠 : 슬픈 거지.


나 : 낮에 산책할 때 아빠가 얘기했잖아. 싫은 소리 잘 못하는 게 스스로 맘에 안 들 때가 있다고. 나도 아빠 말을 이해하는 게 뭐냐면, 우리랑 다른 스타일로 큰 애들 있지. 우리랑 다른 성격의, 할 말 다 하지만 뒤끝 없고 쿨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나하고 결은 안 맞지만 솔직히 부러울 때가 있어. 그런 성격이.


참을 수 없는 것을 억지로 참지는 않았다. 참는 게 낫다고 생각하면서, 진짜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하지를 못해서 참았는데 그래서 내 속이 썩을 때가 있다. 하고 싶은 말을 참지 않고 해 버리면 손가락질당하고 버림받을까 봐 두려워서 그렇지 못한 적도 있다. 그런 건 익숙하지도 않고 뒷감당을 할 깜냥도 나는 되지 않았다.


나 : 그게 나한테 좋기도 해 아빠. 참는 게. 아빠도 알겠지만, 참는 게 우리한테 좋기는 한데, 가끔은 서글픈 게 내가 진짜 얘기를 하고 싶은데 못할 때 그래서, 내 속이 썩을 때(웃음).


아빠 : 근데 지금은 돌이켜보면 그때 상황에선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거지. 방법이 없었다는 거지. 내가 처해있는 환경에서는.


아빠는 예전부터 '함부로 적을 만들지 마라'는 말을 나에게 자주 했다. 사람 어디서 어떻게 다시 만날지 모르는 거라고, 어디서든 쓸 데 없는 분란을 일으키는 사람은 되지 말라는 말도. 이런 말들이 아빠 인생 일종의 가치관이었던 것 같다.


그런 가치관이 어떻게 만들어졌을지는 아빠의 이야기를 통해 짐작해봄직하다. 아빠 어렸을 적 동네 어른들이 해주었다는 일제 식민지 시절 이야기, 6.25 전쟁 격전지였던 강원도 인제 토박이들에게서 들었던 전쟁의 기억. 함부로 누구 편을 들었다가는 언제 어떻게 다른 쪽 편이 밀고 들어와 도륙할지 모르는 공포, 빨갱이로 몰려 잡혀간 사람들.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낯선 도시에 올라와 뿌리내리기까지의 과정. 아빠 세대의 많은 사람들이 겪었을 이런 경험들은 각자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테고, 경험은 비슷했어도 만들어진 가치관의 모습은 제각각일 것이다. 아빠는 그렇게 '모나지 않게' 사는 길을 택했다.



치앙다오의 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다 밖으로 나왔다. 사장님은 그새 잔디 위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계셨다. 사람들이 모닥불 주위에 둥글게 모여 앉았다. 올려다본 치앙다오의 밤하늘은 아, 왜 이곳이 '별의 도시'라 불리는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빈틈없이 빽빽하게 박힌 수많은 별들이 화려하면서도 숨 막히고 아찔했다. 


사장님은 잔디 한가운데 카메라를 세워 놓고 손님 한 팀, 한 팀 사진을 찍어주셨다. 조리개를 몇 초간 열어두어 밤하늘의 희미한 별빛 하나까지 모두 렌즈에 담아 사진을 찍으면 육안으로 보는 것보다 더 많은 별을 사진에 넣을 수 있다. 아빠와 카메라 앞에 나란히 서서 포즈를 잡았다. "아드님이 뒤에서 다정하게 아빠 좀 안아주세요" 하는 사장님 겸 촬영기사님의 요구에 민망하지만 마지못해 아빠를 뒤에서 안았다. 며칠 뒤, 사장님이 보내준 그날 밤의 사진을 확인해보니 사진 속 아들은 아빠를 안아주는 아니라 헤드락을 걸어 아빠 목을 조르는 것처럼 보였다. 생전 안 하던 짓을 해서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었는데 사진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밤 열 시가 넘어 방으로 들어왔다. 오늘은 아빠와 한 침대에서 자는 날이다. 예약한 모든 숙소 옵션에 트윈 침대를 넣었지만 이곳 리조트는 특성상 모든 방이 퀸사이즈 침대 하나이면서 변경이 불가능했다. 부자지간에 아무리 다 큰 어른들이라도 한 침대에서 자라면 못 잘 것도 없지만, 아빠랑 한 침대에 누워 자는 게 도대체 몇 년 만인가 싶다. 기억도 나지 않지만 아무리 못해도 20년 이상 된 일이겠다. 


이전 07화 Day 3-1. 가지 않은 길은 두고두고 생각이 난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