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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홀짝 Oct 07. 2020

Day 4-1. 한 달 전, 아빠는 교통사고를 냈었다

서른여덟, 아빠와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Day 4 - 다시, 치앙마이

아빠와 나 2

아빠 : 아빠가 미안해. 아들 장가 가는데 집 한 채 못해주고, 도와주지도 못해서

나 : 아빠 왜 자꾸 그런 말을 해? 미안해지지 않으려고 자꾸 미안하다 그러는 거 아냐?(웃음)

몇 해 전부터 아빠는 부쩍 미안하다는 말을 자주 한다.



치앙다오의 아침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아침잠을 깨는 것은 치앙마이에서 흔하게 할 수 있는 경험이다. 치앙다오 또한 더하면 더했지 그에 못지않았다. 일어나자마자 대충 얼굴에 물만 묻히고 나와 아침을 먹었다. 조식 메뉴로 쌀밥에 국과 김치를 먹었으니 여행 마지막 한식은 어제저녁이 아니라 오늘 아침인 셈이다.


치앙다오에서 보내는 일정이 1박뿐이어서 하루 만에 풀었던 짐을 다시 쌌다. 이곳에서 하루이틀을 더 머물렀다면 스쿠터를 렌트해서 여기저기 타고 돌아다녀도 좋았을 것이다. 나중에 들은 리조트 사장님 말씀으로는 실제로 그런 여행객이 많다고 한다.


방에서 캐리어를 끌고 나와 밖에 잠시 세워 두고 리조트 안을 둘러보며 사진을 찍었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리조트 사장님이 버스 터미널에 데려다 주시기로 했는데, 터미널에 가기 전 괜찮은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하고 가면 어떻겠느냐는 권유에 선뜻 좋다고 답했다. 치앙마이 숙소 체크인이 가능한 시각이 오후 세 시 이후일 것이므로 치앙다오 터미널에서는 정오 무렵에 버스를 타는 것이 가장 좋은 타이밍이다. 정해진 계획들 사이 짧은 틈에 예상치 못한 행선지를 추가하는 것은 여행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

 




지앙다라 카페


아무리 치앙다오가 시골 마을 같은 도시라지만 카페가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논 길 한가운데에서 차가 멈췄다. 주위의 논들에는 색이 바랜 벼가 밑동만 남아있는 채로 물을 품고 있었다. 멈춰 선 차 저편으로 논 위에 기둥을 세워 바닥을 띄우고 짚으로 지붕을 얹어 지은 소박한 목조물이 눈에 띄었다. '지앙다라'라는 이름의 카페였다. 길에서 논 한가운데 떠(?)있는 카페로 건너갈 수 있도록 대나무와 나무판자를 이어 만든 다리가 논을 가로질렀고 주변에 쟁기, 가래 같은 농기구와 물레방아가 보였다.


신발을 벗고 올라가 커피를 주문하고 등받이가 있는 평상 한쪽 끄트머리에 앉았다. 아직 오전 시간이라 그런지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리조트 사장님과 아빠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주로 듣기만 하면서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여나 붙임성 좋고 말 많은 아빠가 쓸 데 없는 말을 하지는 않을까 저어하는 내 안의 못된 마음을 누르면서, 논 위를 둥둥 떠다니는 오리 떼와 이 논 저 논을 옮겨 다니는 철새를 마냥 지켜보면서. 이렇게 오리와 철새가 마음 놓고 노니는 걸 보니, 여기 논들에는 농약을 치지 않나 보다 생각하면서.


사장님은 치앙다오에 정착하고 리조트를 지으면서 겪었던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요즘은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한국인 손님도 더러 찾는다는데, 그때마다 대놓고 좋게 소개해달라는 말은 차마 못 하겠어서 어땠는지 소감만 물어본다고 한다.


아빠는 어제부터 줄곧 저 멀리 우뚝 솟은 산에 관심이 많다. 리조트 사장님의 설명으로는 '도이 루앙'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산은 높이가 2천 미터가 넘는 태국에서 세 번째로 높은 산이다. 가이드를 대동하여 1박 2일 일정으로 일몰과 일출 보는 트래킹을 많이 한단다. 보통 11월부터 다음 해 3월까지만 입산이 허용되는데 요즘은 산불 때문에 계속 입산금지 상태라고. 대부분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바위산이라 산세가 험한 편이다.


그리고 아빠와 나는 내일 태국에서 가장 높은 산에 갈 예정이다.



지앙다라 카페



치앙마이 복귀


하루 만에 다시 치앙다오 버스터미널에 섰다. 수많은 방문객을 마중하고 배웅했을 리조트 사장님과도 웃는 낯으로 기분 좋게 헤어졌다. 버스를 기다리던 중에 아빠는 치앙다오 터미널 공터 한편에 가꾸어진 잔디밭과 열대 나무들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쪽을 배경을 사진을 찍어달라고 한다. 이윽고 도착한 치앙마이 가는 버스는 이번에도 에어컨 버스가 아닌 어제 탔던 구식 버스였다.


'치앙다오에 오길 잘했다' 치앙마이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생각했다. 아빠와 했던 오후의 산책이며, 내려오는 길에 들렀던 바(bar), 한밤중에 올려다본 별빛 가득한 하늘과 지앙다라 카페까지. 어쩌면 여행 속 잠깐의 여행이라 불러도 좋을 치앙다오에서의 하룻밤이었다. 아빠 또한 좋았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지만, 그걸 굳이 아빠에게 확인받고 싶어 버스 옆자리에서 휴대폰 고스톱에 열중하고 있는 아빠에게 어땠느냐 물었다. 아빠도 숙소며 카페까지 다 좋았단다.
 

치앙마이 터미널에 내리자마자 택시를 호출했다. 치앙마이 신시가지인 님만해민 인근 호텔이 이번 여행 세 번째 숙소다. 창푸악 터미널로 출발지를 지정하긴 했는데 마땅한 접선(?) 장소를 지정하는 데 애를 먹어서 그랩 기사나 우리나 서로 얼마간 헤매다 겨우 차에 탈 수 있었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언젠가 창푸악 터미널에서 그랩을 호출한다면 터미널 근처 세븐일레븐 앞으로 접선 장소를 정하시길.



코코텔 치앙마이 님만(Kokotel Chiang mai Nimman)


여덟 밤을 머무르는 이번 여행의 세 번째 숙소인 코코텔은 님만해민에 위치한 3성급 호텔이다. 님만해민에 있는 호텔 대부분은 몇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는데, 님만해민이 신시가지이다 보니 대부분의 호텔들이 비교적 최근에 지어져서 깔끔하고 새 것 느낌이 난다. 치앙마이 올드타운에는 규모가 소박한 고풍스러운 부티끄 호텔이 많다면 님만해민은 세련되고 모던한 느낌의 호텔이 많은데, 숙박비와 호텔 성급에 따라서 규모도 다양하다.


치앙마이 도심이 방콕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그래도 비교적 큰 쇼핑몰과 젊은 층이 많이 찾는 이른바 핫플레이스 또한 님만해민에 몰려 있다. 여러 의미에서 치앙마이 올드시티보다는 '세련, 깔끔, 번화'라는 단어가 더 잘 어울리는 곳. 님만해민 자체가 그다지 넓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중심부에서 숙소까지의 거리에 따라 숙박비가 달라지기도 한다.
 

님만해민 지역 숙소의 대표적인 단점은 '비행기 소음'이다. 치앙마이 국제공항에서 이착륙하는 비행기가 님만해민 바로 위를 지나기 때문인데, 이 일대의 거의 모든 호텔에서 상공을 낮게 스쳐가는 비행기로 인한 커다란 소음을 접할 수 있다.


코코텔 또한 이런 특징을 모두 지니고 있다. 2018년에 지어진 새 것 같은 호텔. 몹시 깔끔하고 정갈한 인테리어에 환한 분위기와 딱 그런 분위기에 걸맞은 호텔 스태프들. 그러면서도 2인 조식 포함 1박 평균 4만 원 중반의 적당한 가격이 매우 만족스럽지만 객실 발코니에서는 이륙하는 비행기의 밑바닥을 바로 눈앞에서 보는 흔치 않은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비행기 소음이 굉장하긴 했지만 밤새 뜨고 내리는 것은 아니어서 자는 데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낮 시간엔 거의 밖에 있으니 신경 쓰일 일은 아니었다.

 

보통의 호텔은 객실 냉장고에 작은 플라스틱 패트에 채워진 생수를 비치해 놓는데 코코텔은 그 대신 빈 유리병 두 개를 방에 두고 복도에 설치된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마시도록 해놓았다. 환경을 보호하기 위함이라고 쓰인 설명 문구에 불평보다는 흔쾌한 마음이 들었다. 이곳에 대한 좋은 기억 중 하나다.


코코텔 치앙마이 님만


 

청도이 로스트 치킨


호텔에 짐을 풀어놓고 오후 세 시가 넘어서야 아주 늦은 점심을 먹으러 나왔다. 치앙마이 대학 호수 주변을 거닐다가 학교 앞 야시장에서 저녁을 먹을 생각이긴 하지만 치앙다오 리조트에서 조식을 먹은 뒤로 아무것도 먹은 게 없어 뭐라도 채워 넣어야 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치앙마이에서 가장 큰 쇼핑몰인 '마야몰'을 님만해민의 중심부라고 했을 때, 코코텔은 중심부에 아주 가까이 있지는 않다. 그래도 대략 걸어서 15분 정도면 중심에 닿을 수 있고, 걸으며 지나가는 길에 유명한 카페나 식당이 몰려 있어서 먹거나 마실 곳을 찾으며 돌아다니기에는 꽤 좋은 위치였다.
 

길을 걸으며 둘러본 님만해민의 풍경과 분위기는 확실히 올드시티와는 달랐다. 올드시티가 목가적인 분위기의 예쁜 시골 읍내 같았다면 여긴 훨씬 도회적인 느낌? 올드시티와 님만해민은 거의 붙어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인데 이렇게나 전체적으로 다른 분위기를 낼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여행 계획을 짜면서 후보 리스트에 올려놓은 님만해민의 식당 중에서 '까이양'을 파는 곳으로 향했다. 태국어로 '까이'가 닭이고 '양'이 굽다는 뜻이어서 그냥 구운 닭 요리다. 태국 스타일로 염지한 닭을 불에 구운 음식인데, 그냥 우리나라에서 먹는 숯불구이 닭과 맛에서 큰 차이가 없다. 태국에 여행 왔을 때, 특히 태국 음식에 대한 경험이 없거나 별로 좋아하지 않는 동행과 함께일 때, 까이양 맛있게 하는 식당을 찾아가서 먹으면 실패가 거의 없다. 닭을 먹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면 태국 음식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까이양은 그냥 맛있는 음식이다.


코코텔에서 마야몰로 향하는 쭉 뻗은 직선 도로를 따라가다 어느 지점에서 왼쪽 길로 방향을 틀어 조금 더 걸었다. 오른편으로 사진에서 본 것과 같은 모습의 청도이 로스트 치킨이 보였다. 스마트폰 지도 앱 하나로 생전 처음 간 외국 동네에서 인터넷 검색으로 고른 식당을 이렇게나 쉽게 찾아갈 수 있다. 하루이틀 사용해본 것도 아니면서 새삼 감탄하며 식당에 들어갔다.
 

우리나라 김밥천국에 가면 테이블마다 있는 주문표처럼 메뉴 이름과 가격이 인쇄되어 있는 기다란 종이에 볼펜으로 체크해서 건네는 주문 방식이 친근했다. 식당을 찾는 외국인 여행객들을 위해 음식 사진에 영어 설명을 더한 메뉴첩을 아빠에게 보여주며 주문할 음식을 골랐다.
 

치앙다오에서 갔던 식당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메인 메뉴인 까이양이 85바트에 흔히들 태국의 김치라고 말하는 쏨땀도 40바트여서 생각보다 훨씬 저렴하구나 생각했는데 막상 주문한 음식이 나온 것을 보니 예상보다 소박한(?) 양에 생각을 살짝 고쳐먹었다. 훨씬 까지는 아니고 적당히 저렴한 수준이다.


늦을 대로 늦은 점심이라 금방 저녁도 먹어야 해서 차라리 잘됐다 하는 마음으로 포크를 들었다.

 

아빠 : 이건 그냥 닭인데?


아빠는 까이양 한 조각에 완전히 경계심을 풀었다. 함께 주문한 찰밥도 아주 맛나게 드셨다. 둘째 날 저녁 창푸악 야시장의 경험을 교훈 삼아 내심 메뉴 선정에 신중을 기하는 중이다. 거기에 살짝 맵고 새콤한 그린 파파야 무침인 쏨땀까지. 한국에 돌아와 이 글을 쓰는 중에 포털 사이트에 '까이양'을 검색해보니 조리법에 이런 설명이 나온다.


'접시에 까이양을 담고 소스를 작은 볼에 담아 놓는다. 여기에 찹쌀과 쏨땀을 곁들여 먹는다'


치앙마이에 다녀온 지 몇 달이 지나서야 그때의 메뉴 선택이 제대로 얻어걸렸음을 깨닫고 피식 웃는다.



청도이 로스트 치킨



2019년 12월 7일. 출발 D-39


토요일 오전, 미루고 미루었던 거실 책장 정리를 시작했다.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꽂아 두었던, 꽂아두었다는 말이 민망하게 대충 쌓아두었던 책들과 잡동사니들을 전부 비워내고 묵은 먼지를 닦았다. 다시는 쓸 일도 볼 일도 없어진 것들과 이별하기 위한 결단을 내리기가 버거웠지만 그래도 비교적 순조롭다 할 만했다.


휴대폰 벨소리가 울린 것은 정오가 다 될 즈음이었다. 휴대폰 화면에 뜬 '엄마'라는 발신자 표시가 어색했다. 엄마는 어지간해서는 먼저 전화하는 일이 없다. 그것도 토요일 이 시간에 전화라니.


나 : 어, 엄마 웬일로 이 시간에 전화를 다 했어?


엄마 : 아유… 니 아빠 또 차 사고 났다.


엄마의 목소리는 몹시 떨리고 있었고 거의 울먹이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 짧은 순간에 오만 가지 생각이 내 머리를 훑고 지나갔다. 아빠가 조금이라도 더 건강하고 기운 있을 때 둘이 여행 한 번 꼭 다녀오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한 달 뒤면 함께 떠나게 되었는데. 숙소며 일정이며 한창 준비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영화나 드라마 시나리오를 이렇게 써도 진부하다는 소리를 들을 법한 일이 나에게 닥친 것은 아닌지 덜컥 겁이 났다. 제발.


천만다행으로 차는 크게 망가졌지만 운전자인 아빠는 별 탈이 없었다. 일단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자초지종을 듣고는 쓸어내린 가슴이 한 번 더 내려앉았다.


아빠는 엄마와 함께 90세가 넘은 외할머니를 모시고 집에 오는 길이었다. 이제는 혼자 생활하기 버거워지신 외할머니를 잠시라도 집에 모시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지난달에 들었는데 그날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사고가 난 차에는 당시 67세 사위와 64세 딸, 그리고 아흔 노모가 타고 있었다. 운전자인 아빠는 고속도로에서 정차해 있는 앞차를 뒤늦게 발견하고 그대로 뒤에서 추돌했다. 차에 타고 있던 세 분은 물론 앞 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도 크게 다치지 않았다는 게 다시 한번 천만다행이었다.
 

아빠가 후방 추돌 사고를 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최근 3년 사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정지해 있는 앞차를 후방 추돌하는 사고는 거의 예외 없이 뒤차 운전자의 과실이 100%다. 젊은 시절부터 아빠의 운전 스타일은 과속을 하거나 차선 변경이 잦은 편이 아니었다. 그런 아빠가 65세 이후에 3년 사이 두 번의 후방 추돌 사고를 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집중의 문제였다. 단순 부주의라 해도 즉각 대처가 잘 되지 않았다는 거다. 몸 쓰는 일과 운동을 여전히 즐겨 할 정도로 비교적 건강한 60대 후반이지만 적어도 운전에 있어서만큼은, 아빠는 이제 늙으셨다.


... 라는 말을 아빠에게 꺼내기란 참 고약한 일이다. 그 고약한 일을 이번 여행중에 다시 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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