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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홀짝 Oct 02. 2021

물이 새거나 돈이 새거나

인알못의 인테리어 턴키 시공기 09

인테리어 계약서와 분란 방지 매뉴얼


드디어 인테리어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세상에 중요하지 않은 계약서가 어디 있겠냐만, 이렇게 액수가 큰 거래의 계약서는 남다르다. 계약서의 주요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 공사 기간

: 계약서에 명시된 공사 기간을 처음부터 잘 조율해야 한다. 지나치게 타이트한 일정을 요구하면 꼼꼼한 시공을 기대하기 어렵고, 업체에서 먼저 일정을 타이트하게 잡아 인건비를 낮춰 설정하면 결국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공사기간을 늘리고 추가 금액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2. 대금 지불

: 공사 시작에 앞서 지불하는 계약금, 공사 기간 중 지불하는 중도금, 공사 완료 후 입주할 때 지불하는 잔금이 있다. 잔금 비율을 일정 이상 두어야 입주 전 하자 점검 시 신속한 일처리를 기대할 수 있다는 조언이 많다. 내 경우엔 개인적인 자금 운용 사정으로 계약금-중도금-잔금 비율을 3:3:4로 하기로 양해를 구하고 계약했다. 대금 지불이 늦어져서 공사가 지연되면 갑 책임, 을 때문에 공사가 지연되면 을 책임으로 상대에게 지연 일수당 계약금의 일정 비율을 보상해야 한다.


3. 추가 공사

: 갑(의뢰인)이 요구한 견적서 외에 공사에 대해서는 추가 비용과 일정 지연의 책임이 갑에게 있다는 당연한 내용이 있다. 견적서대로 공사를 진행하는데 추가 비용을 요구하는 경우는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4. 하자

: 하자에 대한 보수 책임기간은 1년이다. 갑의 과실로 인한 보수나 천재지변, 화재 등으로 인한 보수 등 상식적으로 업체 책임이라 할 수 없는 경우에는 유상 보수해야 한다. 시공상 하자에 대한 보수는 1년 내로 요청하면 무상이다. 


위 내용을 보아서도 알 수 있듯, 계약서에 딱히 납득하기 어려운 조항은 없었다. 그냥 갑 책임이면 갑이 보상, 을 책임이면 을이 보상 이런 식이다. 대놓고 뒤통수치려고 만든 계약서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분쟁은 계약서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해석’의 차이로 발생한다. 꼼꼼히 읽어 보기만 한다면 크게 당할 일은 별로 없다.


계약서와 함께 받아 든 공사 일정표와 ‘인테리어 공사 진행 관련 고객 전달사항’에 의외로 숙지해야 할 정보가 많았다. 일정표에는 날짜 별로 계획한 시공 내용이 적혀 있었고 매뉴얼에는 일정에 맞추어 내가 해야 하는 일과 할 수 있는 일이 따로 설명되어 있었다. 마감재 양생을 위해 보일러를 가동하려면 가스 전입 신청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욕실 타일은 최소한 시공 며칠 전에 요청해야 하는지와 같은 각각의 데드라인이 주요 내용이다.


‘액자 레일은 최소한 언제까지 요청을 해야 한다. 콘센트 추가 요청은 어느 날짜 이후에는 불가능하다. 마감재 변경 요청이 가능한 데드라인은 언제다’ 몇 페이지에 걸쳐 꼼꼼하게도 적혀 있는 내용을 보니 어렵지 않게 추측이 가능했다. 


‘이것 때문에 분란이 꽤나 일어나나 보다’ 


업체 측에서 이런 데드라인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고 있다가 의뢰인이 갑자기 시공 일정상 수용이 불가능한 요청을 하면 서로 곤란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업체에서 먼저 이런 사항을 알려주지 않는다면 반드시 계약 시점에 꼼꼼하게 물어보길 바란다. 


반대로 업체 측에서 기껏 이런 매뉴얼을 줬는데도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있다가 뒤늦게 딴소리를 하며 갑질을 시전 하는 일 또한 없어야 하겠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그런 거는 계약 전에 미리 다 결정해 놓고 안 바꾸면 되는 거 아니야?’하면서 어깨에 뽕을 잔뜩 넣고 있다면 자세를 고쳐 앉아 다시 한번 생각하길 바란다. 나의 경우, 공사까지 불과 2주밖에 남지 않은 시점까지도 여전히 타일 디자인이나 욕실 수전을 뭐로 할지부터 주방 수납장은 어떤 스타일의 필름을 붙이고 레이아웃은 어떻게 할지 아직 정하지도 못했거나 정해 놓고도 갈팡질팡 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깜빡하고 잊고 지나가는 일이 없도록 따로 캘린더를 만들어 정리해두었다


선택의 연속 : 디자인


인테리어 공사를 하기로 마음먹은 시점에서 계약서에 사인을 하기까지 대략 한 달의 시간이 지났다. 변함없이 인테리어 카페와 <오늘의집>을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남의 집 랜선 집들이에 빠지지 않고 기웃거리는 프로참석러다. 쩌억 갈라진 마른땅이 비를 빨아들이듯 메마른 인테리어 두뇌에 정보를 쏟아부으니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또 다르다. 업체 견적 상담 다닐 적에 그렸던 우리 집의 모습과 계약할 시점의 그것이 같지 않았다. 시시각각 인테리어 디자인의 디테일이 이랬다 저랬다 하며 머릿속에 ‘인테리어최종본.pdf’, ‘최종본V2.pdf’, ‘진짜최종.pdf’, ‘진짜진짜마지막.pdf’파일이 매일 덧씌워졌다.


계약을 마치고 나서 곧장 세부 디자인을 결정하는 단계로 넘어갔다. 당신이 미워하는 사람이 선택 장애가 있거든 인테리어 세부 디자인을 고르도록 하라. 아마도 상대는 그 자리에서 얼마 못가 경기를 일으키거나 무릎 꿇고 울면서 제발 도와 달라는 애원을 하게 될 것이다.


내 앞에 수십 종의 타일 샘플이 놓였다. 현관 타일, 욕실 타일, 주방 발코니 타일, 거실 발코니 타일을 골라야 한다. 현관 타일 고를 땐 현관에 붙일 필름 색도 함께 골랐다. 미리 생각해둔 바가 없지 않았지만 생각에 없던 디자인의 타일을 보니 하나하나가 또다시 새롭다. 현관 발코니와 욕실은 600각 포세린으로 하기로 처음부터 견적을 냈지만 그건 타일 사이즈와 재질을 일컫는 이름일 뿐이다. 결은 얼마나 살아 있는가, 테라조인가 아닌가 여차저차 따질 게 많다. 그에 따라 주렁주렁 달리는 색상의 가짓수는 덤이다. 


타일의 산을 넘자 이번에는 바닥이다. 이 또한 생각해둔 강마루 모델이 있었지만... 내 앞에 이것저것 깔리기 시작하니 혹하는 게 한둘 아니다. 원목 질감 한껏 살린 텍스쳐 마루라는 걸 보니 이걸 깔면 자연과 내가 막 하나 된 느낌으로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귀 얇은 사람만 고생이 아니다. 눈도 얇으면 고생이다.


붙박이장과 문짝의 브랜드, 색상도 정했다. 샘플 카탈로그가 내 앞에 놓일 때마다 정신줄 부여잡기가 힘들었다. E0 자재를 쓰기로 해서 붙박이장은 색상만 잘 정하면 되니 그건 쉬울 줄 알았는데 화이트도 다 같은 화이트가 아니었다. 이걸 벽지 색상 하고 조합해 고르려니 난이도에 가중치가 붙는다. 벽지는 또 어떻게? 화이트톤 페인팅 느낌의 실크 벽지를 생각해두었는데 3곳의 제조사에서 나온 각각의 샘플북이 테이블 위에 펼쳐졌다.


다시 말하지만 견적을 요청할 때 이미 나는 대략의 색상과 제조사, 모델을 다 정해놓고 있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요 정도 급으로 요렇게 하면 얼마 정도 나오나요?’의 의미에 ‘요런 느낌의 디자인으로 하고 싶습니다’를 더한 거였지 세부 요소 하나하나가 확정적이지는 않았다. 제조사와 개별 색상, 그 외 다른 요소들 사이에 유의미한 차이가 없더라도 아주 사소한 디테일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그냥 짬뽕 땡기는 날 중국집에 그냥 짬뽕을 시킬지 삼선짬뽕을 시킬지 고르듯 냅다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계약서에 사인한 날 고른 디자인으로 무조건 시공까지 들어가는 건 아니어서 지나치게 부담 갖지 않고 고르려 했지만 워낙 카테고리가 많고 옵션이 다양해서 여간 부담이 아니었다. 아직 수전과 세면대, 위생도기 고르는 작업은 시작도 안 했는데도 그랬다.


부지런히 캡처해서 모아둔 흔적


선택의 연속 2 :  공사 내용


계약서를 쓰기 직전까지 갈팡질팡했던 몇 가지 공사 내용이 있었다. 거실 폴딩도어가 로망이었지만 후기를 찾아보고 주변의 조언을 구할수록 장단점이 워낙 극명하게 갈려서 망설여졌다. 기대보다는 실용성이 떨어진다고도 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문틀이 내려앉는다는 후회의 글도 있었다. 누군가는 닫아 놓고 있을 땐 문짝 개수만큼 샤시 프레임이 더해져서 답답해 보이는 게 불만이란다. 뭣보다 ‘그럴 거면 그냥 확장을’ 하라는 말이 자꾸 밟혔다. 돈은 더 들지만 나중에 매매할 때 확장 비용의 일부를 보전할 수 있다는 귀띔도 솔깃했다. 그렇다면 확장을 해야 하나. 확장의 미덕이 아무리 우주를 감싼다한들 확장은 안될 말이었다. 아내가 확장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결국 고민만 실컷 하고 폴딩도어도 확장도 없이 가기로 했다.


주방 싱크대 맞은편 벽에 대한 옵션도 수 가지로 갈렸다. 그냥 냉장고 가벽만 설치할까. 그 옆에 붙박이장을 설치할까. 아니면 시중에 파는 수납장을 사다가 들일까. 아예 비워 놓고 주방 발코니에 하부장을 들일까. 수납공간은 부족하지 않을 것인가. 예산은 감당 가능한가. 냉장고를 새로 사기로 했는데 냉툭튀 하는 800리터대 냉장고를 살 경우와 인테리어에 특화된 깊지 않은 냉장고를 살 경우에 따라 주방 수납의 모습은 물론 소요 예산도 달라지게 될 터였다. 이걸 가지고 또 몇 날 며칠을 고민하고 왔다 갔다 했다. 


그밖에도 속 시원이 확정 짓지 못한 자잘한 공사 내용이 몇 가지 더 있었다. 계약서에 사인은 했지만 최소한의 여유를 두고 공사 내용을 변경하는 건 어렵지 않다고 했다. 그저 비용이 추가되면 그만큼 돈을 더 지불하면 될 일이다. 데드라인이 코앞에 닥칠 때까지 이렇게 갈팡질팡 하겠구나, 쉬이 예상되는 바다. 


평상시에 노력한 자와 벼락치기 한 자는 디테일에서 차이가 난다. 30여 년을 인테리어에 일절 관심 없이 살았던 놈이 제아무리 수십만 볼트짜리 벼락을 친다한들 티가 안 날 수는 없다. 인테리어에 있어서 내가 준비된 자였다면 이렇게까지 오락가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처음부터 시공 계획과 디자인을 꽉 짜 놓고 다른 변수에 대처하는 여유를 남겨두지 않았을까. 인알못들이여 선택을 두려워 말자. 갈팡질팡하며 슬퍼하지도 말자. 인테리어와 담쌓고 살았던 지난날의 과오에 대한 세금 같은 것 일 지어니. 


굳이 먼저 지나간 선배로서 없는 팁이라도 긁어 드리자면 고민할 때에는 늘 ‘예산’과 짝지어 선택하길 바란다. 자동차 알아볼 때 ‘이왕이면’ 테크 몇 번 타면 모닝 사려다 벤츠 산다는 말이 있다. 인테리어도 마찬가지다. 이 부분에서 ‘조금 더 쓰면’, 저 부분에서 ‘이 정도 액수 차이면’하면서 티끌 견적을 부지런히 모았다가 태산 같은 견적 폭탄을 맞고 원점으로 돌아와서 다시 선택의 기로 앞에 서는 수가 있다. 돈이 많이 들어가는 큰 건 수를 포기하고 그 돈으로 자잘한 퀄리티를 여럿 올리든, 자잘한 거 여럿 포기하고 큰 건 한 방에 힘을 쏟든 해서 본인 스타일에 맡게 나름의 예산 밸런스를 잡아야 한다. 아님 대출을 더 받든가.


욕실 : 방수와 덧방


공사 시작 직전까지 수두룩 빽빽하게 놓인 여러 선택의 기로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있으니 바로 욕실 공사다. 


구축 아파트를 매매할 때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은 누수다. 아랫집에 물이 새면 윗집이 수리해줘야 하는데, 피해 규모에 따라 복구 비용에는 차이가 있지만 2~3백만 원은 우습게 나온다. 통상 매매한 지 6개월 내에 누수 피해가 발생하면 매도인 측에서 비용을 지불하게끔 되어 있다고 하는데 문제는 매수인 측이 인테리어 공사를 하고 들어오는 경우다. 


공사 없이 들어와 살다가 누수가 발생하면 원인 이래 봤자 아파트 노후 말고는 딱히 설명이 안되니까 누수 발생 시점에 따라 매도인이든 매수인이든 책임을 지면 그만인데 인테리어 공사를 하면 작업 실수나 공사 진동으로 인한 누수 가능성까지 더해져서 책임 소재가 몹시 불분명해진다. 그래서 통상 인테리어 공사를 하고 들어간 집에서는 6개월 이내에 누수 피해가 발생해도 매도인 쪽에서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 매수인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인테리어 공사와 누수의 인과 관계가 없음을 증명하거나 인테리어 업체 측의 실수를 입증해서 매수인이나 인테리어 업체 쪽에 보상을 받고 싶겠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누수는 보통 욕실에서 일어난다. 인테리어 공사 항목에 욕실이 들어간다면 누수 피해 발생 시 매도인에게 책임을 지울 가능성은 제로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럼 욕실 공사 후 발생하는 모든 누수는 인테리어 업체의 잘못인가? 그렇지 않다. 아까도 말했지만 공사 중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진동에 의해서도 누수는 발생할 수 있다. 


인테리어 공사를 의뢰하는 입장에서는 바로 이 지점부터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냥 기존 욕실 타일 다 철거하고 방수 시공까지 싹 해버리면 머리 아플 일은 덜 할 수 있다. 방수 시공을 하면 누수 발생 가능성이야 아무래도 확 떨어질 테고, 설사 물이 샜다 하더라도 인테리어 업체 측에 책임을 물을 여지가 있다. 대신 철거비에 방수 시공비까지 해서 돈이 많이 들어 머리 대신 통장이 지끈거린다. 


타일을 철거하고 방수 시공을 안 하면 방수 시공 비용은 절약하겠지만 아랫집 천장에서 물이 새는 일이 없게 해달라고 매일 밤 기도하며 잠들어야 할지 모른다. 누수가 발생했을 경우 매우 높은 확률로 방수 시공 비용보다 큰돈이 나간다. 


타일 철거 없이 덧방(기존 타일 위에 새로운 타일을 덧입히는 것)을 하면 철거비도 아끼고 방수 시공비도 아낄 수 있다. 방수 시공을 안 할 거면 차라리 덧방을 하는 게 나을 수 있다. 기존 타일 철거하느라 가해진 충격이 누수 발생 가능성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결국 물이 새면 꽝이다. 


참으로 절묘한 밸런스다. 리스크를 줄이려면 적지 않은 돈이 더 든다. 그런데 돈을 들이지 않고 있다가 사고가 발생하면 더 큰돈이 들어간다. 아파트 연식과 구조, 의뢰인의 성향과 예산 사정에 따라 뭐가 정답이라 할 거 없이 각자의 판단으로 남겨두는 영역이다.


나의 경우, 거실 욕실은 타일 철거 후 방수 시공을 진행키로 했다. 안방 욕실은 방수 시공과 타일 철거 없이 덧방으로 시공한다. 세면대와 위생도기(변기), 샤워 부스로 이루어진 안방 욕실에서 샤워 부스를 없애고 그 자리에 인조대리석 상판과 하부장을 놓기로 한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샤워 부스를 파우더룸으로 만들고 욕실을 건식으로 쓰기로 한 만큼 방수 시공을 하지 않더라도 누수의 위험성은 크지 않을 거라는 판단.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이 새면 내 업보를 탓하며 기꺼이 통장에서 돈이 새어 나가는 것까지 감당하리라.


거실 욕실 철거 작업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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