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워서 그러는 거지?

나이키=호미

by 은수

프롤로그에 부쳐


'사춘기와 인문학'은 사춘기가 본 세상 이야기를 네 컷 만화로 그려준다. 그러면 엄마인 내가 함께 답을 찾는 글을 쓰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인문학은 우리가 사는 일상 가까이에 있었다. 책상에 각 잡고 앉아서 인문학을 하지 않더라도 괜찮았다. 우리가 본 것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그 근원을 깨달을 때, 우린 더욱 깊어질 수 있었다. 그가 중2 사춘기 소녀였더라도.
초윤그림

피곤할 때 입술에 포진 하나 생기는 건 흔한 일이지만, 포진이 안구에 생긴 적이 있는 딸은 예외였다. 얼굴에 좁쌀만 한 포진이 한 개라도 보이면 곧바로 병원으로 가야 병을 키우지 않았다. 한동안 보이지 않던 포진이 아이의 한쪽 콧구멍을 막을 기세로 커지고 있었다.


병원 대기실에는 서너 명의 환자가 있었다. 접수를 하고 앉아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옆에 앉은 할머니가 지긋이 우리 쪽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느껴져 돌아보자 할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걸었다.


"신발이 하도 예뻐서 물어보는데, 발 편해요?"

내 운동화를 가리키며 묻는 거였다.

"아, 예 편해요.. 하하"

내가 어색하게 대답했다.


"내가 집에 50만 원짜리 신발이 있는 사람이야!"

"네?"

갑자기 돌변한 할머니를 파악해 보려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나이키 이건 절대 안 신어!"

황당했다. 바로 좀 전에 신발이 예뻐서 물어본다며 말을 걸지 않았나! 하지만 내가 정신 차릴 틈도 없이 할머니는 다시 돌이킬 수 없는 한방을 날리고 말았다.


"난!! 나이키 이거 보면 막, 호미 같고 칼 같은 거 떠올라서... 아휴 싫어라!"


날벼락이었다.

더 말을 섞을 의욕도 사라져, 얼른 진료 순서가 되기만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할머니는 이번엔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설명하느라 거의 무아지경이었다.

"난 일주일에 한 번씩 비행기타. 부산에도 집이 있거든!"

"아, 네.."

"나, 부산 센 X시티 할머니야! 작은 딸이 거기 살고 있고 우리 애는 미국대학에서... “


속사포처럼 쏟아낸 이야기에 내 반응이 변변찮은 게 못마땅했는지, 할머니는 이번엔 내 옆에 앉아 있던 딸을 가리키며 말했다.


"요즘애들 버릇이 없어! 버스에서 자리 양보도 안 해! 센 X시티 사는 애들은 절대 그런 애들 없어! 여기 제주도 애들이 특히 그렇다니까!"


아휴, 싫어라

나이키=호미라는 느닷없는 공격에 나는 이미 더는 겨뤄 볼 의지도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어른이 돼서 가만히 있는 어린아이를 면전에 두고 '요즘 아이들 버릇' 운운하는 모습을 보자니, 아휴 싫어라! 소리가 목까지 차올랐다.

자리를 옮겨 앉아야 되나? 생각할 즈음 다행히도 간호사가 아이 이름을 불렀다. 우리 둘은 겨우 할머니로부터 벗어나 각자 호미가 그려진 신발을 끌고 진료실로 도망갈 수 있었다


진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할머니는 또 다른 사람을 붙잡고 얘기하느라 우리에겐 관심도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병원 건물을 완전히 빠져나올 때까지 딸과 나 사이엔 묘한 침묵이 흘렀다. 우선 우리가 신은 신발이 더 이상 호미 말고는 다른 무엇으로도 보이지 않는 신기한 체험을 했다.


" 딸아, 너 괜찮아? 할머니가 요즘 애들 버릇없다 했잖아. 그건 너한테 한 말이 아니라 할머니 표현의 문제인 거 알지?"

위로를 해주고 싶었지만, 딸은 나이키=호미 발언에 웃음이 터져 수습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연신 내 신발을 가리키며 "호미, 호미"를 외칠 뿐이었다. 집에 거의 도착할 때까지 우린 서로의 호미를 가리키고 또 가리켰다.


잠시 뒤 진정이 된 딸이 나에게 물었다.

"엄마, 저 할머니 외로워서 그러는 거지?"

".... 아마도?"


그날 우리와 처음 만난 어르신은 관계 속에서 75년을 살아온 어른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서툰 방식으로 다가왔다. 열다섯 살에게도 감추지 못한 외로움을 겹겹이 두르고 말이다.

세상엔 다양한 사람이 얼마든지 많고, 모두에겐 그럴만한 서사가 담겨 있음을 어린 딸과 함께 헤아려 보는 날이었다.